죽음 아래 있는 영생

죽음 아래 있는 영생
요한복음 5장 19절~29절

요한복음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장례식장에 가보면 죽은 자를 애도하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유교적인 관습으로는 자녀들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질문을 해 본다.

오늘 말씀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 때’라고 말한다. ‘이 때’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현재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죽으면, 죽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영생의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말씀하신 영생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다는 말이다. 영생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현재 완료형을 쓴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현재에 이루어진 사실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생의 말씀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의 공통점은 ‘지금’ 영생이 내게 주어졌음을 보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고 외친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말해도 믿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망’에 있음을 진실로 강조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다시 살린다는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었음을 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아직 ‘사망’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영생은 어디에 있는가? 영생이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 진나라 진씨황제도 ‘불로초’를 찾아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오늘도 사람들은 영생을 먼 곳에서 찾고 있다. 영생을 먼 곳에서 찾는 이유는 육신의 욕망으로 영생을 찾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한 것을 듣지 않고 다른 소리들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않고 영웅들이 한 일들을 바라 본다. 육신의 욕망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높아지려 한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영생을 가까운 곳에서 찾지 않고 먼 곳에서 찾게 한다. 영생이 먼 곳에 있어야 ‘자기’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면 찾지 못한다. 자기의 힘으로 영생을 찾으려 하지만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님도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5:19)”고 말씀하신다. 영생과 죽음은 바로 옆에 있는데 영생을 찾기 위하여 먼 곳에서 헤매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요, 영생을 가까이서 얻으려 하면 살 것이다.

죽음 아래 영생이 있다. 자기를 높이면 죽지만 자기를 낮추면 생명을 얻는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아래 있고, 죽음에서 자기를 낮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살지만, 죽음에서 자기를 높이면 죽기 때문이다. 죽음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는가? 몸을 낮추는가 아니면 몸을 높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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