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본 이정표
요한복음 9장 1절~12절
요한복음9장 2절~3절,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보모니이까,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제(9월5일) 한 형제를 만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마귀에 들렸다, 탕자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괴롭다고 말했다. 그 형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자신이 죽기까지 희생하였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은 지키려 하면 잃게 되고, 버리면 얻게 된다. 목숨을 얻으려 하면 죽게 되고, 목숨을 버리면 살게 된다. 노력하면 물질은 얻을 수 있지만,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옛 어른들은 사람의 마음을 갈대라고 말하기도 하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맑은 물은 보면 알지만 까만 사람의 마음은 보아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사람 관계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죄에 대한 돌이킴(회개)은 내 마음을 깨끗하게 보게 한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유대의 소경이나 절름발이 등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죄로 인한 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습관이나 전통을 완전히 뒤집고 계셨다.
예수님은 죄의 손가락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로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죄는 인간을 죽게 하고, 인간을 병들게 하였다. 죄는 기쁨보다 슬픔을 화평보다 다툼을 가져온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기쁨이나 화평은 없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뱀의 말을 따른 결과였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가 죄이다. 죄는 알면서 따라야 할 것을 따르지 않고, 알면서 의도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마음의 결과이다.
죄는 마음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죄는 다른 사람의 죄는 깨끗하게 보이게 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흐리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흐린 눈을 씻고, 지금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죄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요9:3).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도 ‘나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죽어가고, 나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산다. 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어제 만난 형제는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할 ‘소경’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부르는 사인이고, 하나님께서 그 형제와 직접 만나고 싶다는 하나님 사랑의 사인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정표를 거꾸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