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의미

사는 의미
창세기 3장 1절~13절

창세기 3장 11절~12절, “11절: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람들이 종종 탓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녀들은 “부모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부모들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결과가 이렇구나”라는 말을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끼리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하여 서로를 탓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서로를 탓하기 시작하였다. 아담은 하와가 선악과를 주어서 선악과를 먹었고, 하와는 뱀이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상대를 탓하고 있다. 행위를 선택하는 사람은 아담과 하와이다. 행위를 선택한 사람이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빅터 프랭크는 2차세계 대전 때 아우슈비츠 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 아우슈비츠 감옥은 죽을 순서를 기다리는 죽음의 정류소와 같은 곳이었다. 죽음의 정류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죽음의 정류소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다. 그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할 때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인생의 의미를 막연하게 찾은 것이 아니라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나가서 “책을 써야 한다”, “집에서 면도를 하고 싶다”, “가족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겠다”,라는 등의 인생의 의미를 구체적인 행동과 연관되어 찾았을 때 죽음의 극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서로 탓하면서 살면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을 때 고통과 죽음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게 된다. 죽음과 고통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때 빛이 비추게 된다. 죽음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죽음과 고통을 정면으로 부딪칠 때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인생의 의미를 찾을 때 사람은 성장하게 된다. 사람에게 죽음과 고통은 절망을 주어 삶을 좌절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소망을 주어 성장하게 하는 삶의 에너지인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의 에너지는 죽음의 에너지로 바뀐다. 고통이나 죽음에 이르는 아픔을 피한다면 죽음과 고통이 서서히 우리의 목을 조여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과감하게 대면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면 생기가 공급될 것이다. 아픔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대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의 삶에 생명의 에너지가 넘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정면으로 대면하여 찾아야 하는 ‘사는 의미’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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