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파도를 넘는 지혜와 능력

높은 파도를 넘는 지혜와 능력
창세기 29장 1절~20절

창세기 29장 20절,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어제 웹 사이트를 열어 보았더니 보지 못한 글이 올려져 있었다. 깜짝 놀라 그 글이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 버렸다. 개인 정보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안전한지, 안전을 잃는 것을 불안해 하였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을 찾아갔다. 75년을 넘게 살던 장소를 떠나는 야곱은 불안했다. 불안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안정을 찾았다. 안정을 찾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에 도착하였다. 야곱이 하란에서 목자들을 만났다. 야곱이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고 물었다. 목자들은 라반을 “안다”고 대답했으며, 그 목자들은 라반의 목자들이었다.

야곱이 라반의 목자를 만나게 된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 한 번에 라반을 찾을 수 없었다. 야곱이 고향과 먼 타지에서,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외삼촌 라반을 찾고 있었다. 먼 타지 하란은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가 하란을 떠난지 100년이 지났다. 어머니를 알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리고 한번도 와 본적 없는 장소에서 외삼촌 라반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은 그 사실을 알고 불안해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쉽게 라반을 찾았다. 야곱이 라반을 아느냐고 물어본 목자가 라반의 목자였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라반을 만나 라반과 함께 살면서 20년 동안 고생하게 된다. 야곱이 라반을 만나 고생하게 된 사건을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을 한다. 한 관점은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형에게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았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이었다는 관점이다. 또 다른 관점은 야곱이 비록 사기를 쳐서 형에게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았지만, 야곱이 라반과 함께 한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였다는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은 인과응보론적인 관점이고, 후자의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본 관점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중도의 입장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택하였다. 그러나 택한 야곱을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없었다. 야곱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야곱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야곱이 변하기 위하여 자신을 닮은 라반과 함께 있어야 했다. 라반을 통하여 야곱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깨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 있었기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깨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할 수도, 자신을 비울 수 있다. 자기을 비우고,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모습 자체를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깨닫는다면, 환경의 높은 파도를 넘을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를 닮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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