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산
창세기 44장 14절~34절
창세기 44장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셨사오니.”
한국이 일본에 36년간 무력으로 점령 당한 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러한 일본의 정책에 기독교가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백성들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종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가 기독교였다. 3.1운동에 서명한 33인의 지도자 중에 천도교 지도자가 15인, 기독교 지도자가 16인 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기독교가 신사참배의 높은 위기 앞에 주저 앉아 버렸다.
요셉의 형들에게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누군가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었다. 이 일로 인하여 베냐민은 이집트에 잡힐 위기에 놓였고, 형들은 어떠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만 찾으려 할때, 유다가 이집트의 총리 앞에 당당하게 말했다: “종들은, 막내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갈 수도 없고, 아버지 얼굴을 뵐 수도 없습니다(창44:26).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창44:33)”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집트 총리 앞에 드렸다. 유다가 베냐민의 생명과 바꾸려는 마음을 어떻게 가졌을까? 유다가 자녀를 잃어버렸던 아버지였고, 동시에 자녀를 잃게되는 아버지 야곱의 고통과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야곱이 자녀를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유다 자신이 이집트의 종으로 사는게 유다에게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자녀를 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면,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연민을 갖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쉬운 말인데 실제적으로 적용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위기의 산을 쉽게 넘는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면, 우리가 위기를 넘어가려고 하기보다는 위기의 산보다 더 높은 물(성령)이 차올라서 자연스럽게 위기의 산을 넘도록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