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꼬 없는 찐빵

앙꼬 없는 찐빵
요한복음 5장 10절~18절

요한복음 5장 10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리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가치관이 없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옳은 것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일 된다.

한국은 국회에서 법을 제정한다. 법의 근간은 ‘법의 정신’이다. 정의가 법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또한 ‘정의’가 사라진 법의 집행이라면 법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 논쟁이다. 십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안식’ 즉 ‘쉼’을 통하여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보다 ‘쉼’에 우선시 두었다. 법의 정신이 사라지고 법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거룩이 없는 쉼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한 쉼은 거룩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과거의 유대인이 행하였던 ‘쉼’에만 우선시 두었던 일들을 교회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전통이 성경보다 우선시 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사람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라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고,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반응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하여야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유대인은 예수님께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박해를 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핍박하였다. 사랑이 없는 율법, 예수님 없는 율법은 더 이상 율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에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함께 하면 ‘정의’가 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도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다수’가 옳은 사회가 되었다. 어떤 때에는 소수의 말에 경청해야 할 때가 있다. 소수의 말에 경청하지 않는 ‘다수’는 민주주의 정신을 잃어버린 앙꼬 없는 찐빵의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백성 전체’가 주인이지 ‘백성의 다수’가 주인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의지, 감정이 성경에 부딪쳐 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앙꼬의 맛을 보지 못하는 찐빵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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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까?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까?
요한복음 5장 1절~9절

요한복음5장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대기만성’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인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오래 기다리면 큰 그릇이 만들어지는가? 오래 기다리면 큰 인물이 되는가? 시간이 지난다고 큰 그릇이 되거나 큰 인물이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큰 인물이나 큰 그릇이 된다면 큰 그릇이나 큰 인물만 세상에는 남아 있어야 한다.

예전에 은퇴하신 목사님들이 “준비된 만큼 하나님께서 쓰신다”라는 말을 하셨다. 잘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쓰신다는 말이다. 준비된 사람이 쓰일까? 준비된 사람이 쓰이지만 준비된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 의해서 쓰이게 된다. 요즘에는 준비된 만큼 쓰인다고 말하는 목사님들을 잘 만날 수 없다. 오히려 쓰이려면 ‘성골’이든 ‘진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목사님들을 만날 수 있다. 무슨 말일까? ‘성골’은 아버님과 장인 어른 모두 목사(혹은 장로)인 경우, ‘진골’은 아버님이나 장인 어른 한 분이 목사(혹은 장로)인 경우를 말한다. 예전의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준비 된 사람들은 있지만 준비된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이 없어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시느라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계시다”고 말하신 은퇴하신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이 난다.

오늘 말씀은 서른 여덟 해가 된 병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병을 낫고자 하여 베데스다 연못에 있었지만 38년이 지나도 병이 낫지 않았다. 처음에 베데스다 연못에 병자가 왔을 때는 병을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자 병을 낫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사라져갔다. 현실에 순응하였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길을 찾았다. 그리고 병자는 하루 하루를 아무 의미 없이 보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찾으시고 가까이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병자에게 묻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나는 병을 고치러 왔는데 병은 고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 중에 하나는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가족 문제도 해결이 되고, 세월이 지나면 현재의 고통도 사라지고, 세월이 지나면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진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이 약인가? 세월은 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문제는 세월이 지날 수록 더 커진다. 비록 문제가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고 수면 밑에 있어서 해결된 것 같이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비밀’이 되어 수면 밑에 있던 문제는 아들 세대, 손자 세대까지 괴롭히는 문제가 된다. 세월이 지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고통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들이 솟아 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걸림돌만 만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마음의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가? 소원을 이루려면 어린아이가 먹고, 자고, 입고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소원을 위하여 먹고, 자고, 쉬고, 일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나가면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늘 앉은뱅이 병자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앉은뱅이 병자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시간이 지났는데 이루지 못한 마음의 소원이 있는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그러면 시간이 지나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마음의 소원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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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표적

사랑의 표적
요한복음 4장 43절~54절

요한복음4장 54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사람들 사이에 없어서 안될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 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맞추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한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도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믿으면서 가끔 떠오르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실까?’이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 대신 죽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 고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기 가지 70년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을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삶에서 확인 받고 싶어 한다. 사랑을 확인 받는 방법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고, 또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하여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특별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한다.

예수님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표적과 기사가 있어야 사람들은 믿는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하나님의 표적을 보이신다.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었다. 아버지는 병든 아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간다. 예수님을 찾아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간청을 듣고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다. 예수님이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두 번째 표적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으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가? 둘 다 맞다. 믿음의 간청으로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표적이나 기사는 믿음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가 보여주는 사랑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증거를 갖게 된다. 하나님 사랑의 표적을 봐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가슴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 할 때 하나님께는 사랑하신다는 표적과 기사를 나에게 보여주신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할 사랑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내가 보여주는 사랑의 반응만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표적을 보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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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가는 글

주변을 바라보면 풍성하고 풍요해 보인다.

그러나 좀더 가까이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는 갈증에 사람들은 메말라 간다.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더 외로운 사람
가진 것은 많은데 더 불안한 사람
권력은 가졌는데 더 무시 받는 사람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진정한 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따뜻한 정이 있었다.
적은 사람이었지만 끈끈한 정이 있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서로 나누고자 했다.
가진 권력은 없었지만 서로 도우려 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성숙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더 어린아이 같은 노인이 많이 있다.
나이가 든다고 성숙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려고 마음을 닦고, 다른 사람을 살피는 지식을 넓혀야 성숙해 진다.

각 시대의 끝자락에서는 사람들이 말세다 말세다라는 말은 했지만
아직 말세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말세가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깨닫고 하늘의 시민으로 사는 성도가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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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

들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
요한복음4장 39절~42절

요한복음4장 42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어린아이의 인격이나 사회성은 2~3세가 되기 전에 형성이 된다. 물론 사회성의 형성의 시기를 5~6세로 더 늦게 보는 학자도 있다. 초기 어린아이의 인격이나 자존감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어머니이다. 아이의 인격은 아이의 행동에 따른 어머니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고, 아이의 자존감은 어머니와의 친근감 형성 정도에 따라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낮아진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나타내는 반응이나 친근감은 ‘말’로 아이에게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의 인격이나 자존감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어머니의 말’이다.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도 ‘말’이다. 특히 일어나서 어떤 말을 듣느냐는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인 중에 하나가 된다. 아침에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뉴스라면 주변 환경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가족이 그 사람의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침에 듣는 소리 중에 일어나서 듣는 소리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에 듣는 소리가 인생의 방향키가 되기 때문이다. 들리는 말이 인생의 방향키가 되는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이다(롬10:17). 믿음이 들음에서 생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들리는 대로 산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이 좋아하는 삶을 살고, 환경의 말을 들으면 환경에 순응하면서 산다. 즉 들음에 따라 믿음이라는 가치관이 생기고,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움직이는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돈의 말을 들으면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삶의 현상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소리 외에 다른 소리를 들으면 만족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소리 외에 다른 소리를 들으면 만족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외의 다른 말은 창조된 말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말에 따라 움직이면 아무리 채워도 부족하고 갈증을 느낀다. 그러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말을 들으면 만족한 삶을 살게 되어 있다. 물론 창조된 물질이 채워질 때에는 쾌락(잠깐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창조된 물질의 쾌락은 오래 지속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물질을 요구하게 된다. 창조된 물질은 창조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채워도 만족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만족하게 된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창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오늘 무슨 말을 듣고 사는가? 여러분이 듣는 말이 무엇인지 알려면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나는 만족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부족한 삶을 사는가” 인생은 듣는 말에 따라 만족하면서 살기도하고 부족한 삶을 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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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살리는 양식

영을 살리는 양식
요한복음 4장 27절~38절

요한복음4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살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의식주’라고 말한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곳이 해결이 되어야 한다. 해결해야 할 세 가지 중에 ‘식(먹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인간의 문제이다. 다른 두 가지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식’이 없다면 아마도 90일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육이 양식이 필요하다면 영도 양식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마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치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양식이 될까? 농부가 수고해서 땅에서 양식을 얻는 것 같이 예수님도 양식을 얻으려면 땅에서 수고를 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수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수고이다.

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육신의 양식은 식물이나 동물일 것이다. 그러나 영의 양식은 ‘말씀’이라고 한다. 영의 양식을 먹어야 세상과 싸울 힘이 생긴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마음 속에 있는 신명기 말씀을 밖으로 말씀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겼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육신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영혼육을 가진 존재이다. 육신의 떡과 함께 영의 떡이 필요하다. 떡만 먹는다면 육신만 살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면 영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을 살리려면 어떻게 하는가? 말씀의 씨를 심고,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으려면 제자들은 일한 사람들의 수고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신다(요4:38).

예수님께서 일하지 않고 일하지 사람들의 수고에 참여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땅에 뿌린 씨를 자라게 하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말씀의 씨를 땅에 뿌려서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 수고에 참여한다는 뜻은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자라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이 단지 다 자란 열매를 따서 먹으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나의 육신인 땅 속에서 뿌려져야 한다. 뿌려진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먹어야 나를 살리는 양식이 된다. 자란 말씀의 열매를 따먹어야 영을 살리는 양식이 된다.

자란 말씀의 열매를 따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 육신에서 자란 말씀의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육신의 양식은 육신 속으로 들어가야 양식이 되지만 영의 양식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영의 양식이 된다. 오늘 내가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은 무엇인가? 내 안에서 자란 말씀의 열매를 따서 죽어가는 영혼에게 양식을 주어야 내 영이 오늘의 양식을 먹고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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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를 마신 여인

생수를 마신 여인
요한복음 4장 1절~26절

요한복음4장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물은 생명을 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다. 인간의 몸의 70%가 물이다. 주변에 물이 많아서 그런지 물에 대하여 귀한 것을 모르고 산다. 그러나 물이 귀한 사막에서는 물 한방울이 소중하다. 살다 보면 가장 귀한 것을 놓치고 살 때가 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이 계시는 유대는 물이 귀한 지역이다. 그래서 유대는 얼마나 많은 우물을 가졌느냐에 따라 부자인지 부자가 아닌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서 한 여인이 오자 물을 달라고 하신다. 유대인이 어찌하여 이방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신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구했지만 정작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구하여야 할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살면서 자신이 위치를 잘 모를 때가 있다. 사람의 눈에 부자인 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눈으로는 가난하고, 사람의 눈에 가난한 듯 하지만 하나님의 눈 앞에 부한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하나님 앞에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어떻게 아는가? 죽으면 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자가 귀한 사람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어떻게 생수를 찾는가? 사마리아 여인은 영생하는 생수를 찾았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것을 보아 외모가 출중한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사마리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여인들이 부러워하는 여인,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지만 항상 목이 마른 여인으로 살고 있었다. 목마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생수를 마시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생수를 찾고 마시게 되었는가? 예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섰을 때 여인은 생수를 마시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은 가지만 생수를 마시지 못하면 신앙에 갈증을 느낀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찾았지만 아담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였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어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나님께 말한다. 생수를 마시려면 내 모습을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들어내어야 한다. 돈을 좋아하는데 거룩한 척하려고 한다. 문제가 많은데 문제가 없는 척한다. 미운데 사랑하는 척한다. 한국의 유교 문화 중에 하나가 ‘아닌 척’하는 문화이다. 사람 앞에 ‘아닌 척’하면서 산다면 하나님 앞에도 ‘아닌 척’하고 살 것이다. ‘아닌 척’하는 태도를 버려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다. 사람 앞에 ‘아닌 척’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닌 척’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막7:12). 오늘 내가 사람 앞에 ‘아닌 척’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을 하나 하나 버리게 될 때 영원한 생수를 찾고 마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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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도장 찍히기

눈 도장 찍히기
요한복음3장 31절~36절

요한복음 3장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경남 사천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갈 때 산을 몇 개를 넘어서 걸어가야 된다. 밤에 산을 걸을 때 별이 얼마나 빤짝이던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본 기억이 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보았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하늘에 속하고,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 위에 있다. 땅에 속한 사람은 땅을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사람은 땅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 땅에 속한 사람은 돈을 다스리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살지 못하게 된다. 땅에 속하면 땅의 소산에 자유롭지 못하고 땅의 소산에 묶여 산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유가 없고 속박만 있다.

어떻게 땅을 다스리면서 살 수 있을까? 예수님께 속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만물을 다 예수님 손에 주셨기 때문이다(요3:35).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지 않고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속하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속하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다스릴 수 없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다스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다스리지 못한다. 오히려 땅의 노예가 될 뿐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찾을 길이 없다. 성경은 보이지 하나님을 찾는 길을 알려준다. 요한복음4장 32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의 백성이라고 도장을 찍으신다(요3:33).

“너 내가 눈도장 찍었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인이 남자에게, 남자가 여인에게 내게 속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눈도장을 찍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께 눈도장을 찍힐 수 있을까? 환경과 사람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다. 환경과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흔들리는 사람이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도, 예수님께 속한 교회도 하나님의 향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눈도장을 찍힌 사람은 냄새가 나는 악취 속에서도 바위의 핀 꽃의 향기를 맡는다. 환경과 사람이 나를 절벽에 밀어도, 한 마리 독수리가 되어 절벽을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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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넘어서

경쟁을 넘어서
요한복음3장 22절~30절

요한복음3장 26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 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 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

경쟁에서 진 사람은 화가 나게 된다. 오늘 말씀이 경쟁에서 진 세례 요한의 이야기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람들이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자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더 따르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례 요한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연애인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산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연애인들이 인기가 떨어지면 정신적으로 힘들어 한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한 연애인은 자기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기를 절벽으로 밀어 떨어트린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보다 더 인기가 좋은 것을 보고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노라(요3:29)”고 말한다. 예수님이 자신 보다 더 높아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자기 보다 더 높아지고 더 존귀해 지는 사람을 축하해 주고 기뻐해 줄 수 있을까? 한국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말한다. 이웃이 나보다 더 낫게 보이면 속상하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사람들, 사람들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아지면 속상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잘된 모습을 보고 속상하다는 것은 자아가 안정적이지 못하는 말이다.

‘자아(self)’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따라 움직이면 불안하게 되어 있다. 내 자신이 사람들이나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나 뜻에 움직여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요즘 가정사역상담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져서 His University에서 Ph.D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아내가 Ph.D 추천서를 써주기로 하였다. 아내가 아들에게 영어를 도움을 받아 추천서의 초고를 써왔는데 아내의 생각보다 아들의 생각이 들어간 추천서였다. 추천서의 글귀 중 하나가 “그는 12년 전에는 진정한 크리스찬이 아니였다”라는 영어 문장이 내 눈에 보였고, 나는 문장을 읽자마자 화가 났다. 돌아서서 생각하니 그렇게 화 낼 이유는 아닌데 왜 화를 냈을까 하고 내 자신을 상담해 보았다. ‘나는 아들에게 열심히 잘한다고 하였는데 아들의 눈엔 아버지가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화가 난 것이다. 나의 열심이 아들의 기대에 미지치 못한 것을 보고 나에게 화를 낸 것이다.’ 아들의 문장은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다고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살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경쟁을 하게 된다. 경쟁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경쟁 속에 중독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경쟁보다 서로 돕고 공생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서로 돕고 공생하면서 사는가? 세례 요한은 자기의 역할을 분명히 알았기에 예수님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돕고 공생하려면, 나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다면, 그리고 그 위치를 하늘의 뜻으로 안다면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질투하지 않고 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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