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요한복음3장 16절~21절

요한복음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쉬운 일도 생긴다.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목표를 향하여 나가다 되지 않으면 특히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실패 했으면 좌절하게 된다. 한국에는 ‘좌절 금지(OLT)’ 그림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땅을 치고 있는데 그 사람 앞에 금지를 표하는 동그리미에 사선을 그어 놓은 그림이다. ‘좌절’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무기력과 한계를 느낄 때 오는 생각 중에 하나이다.

사람의 한계와 무기력을 느끼게 되면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네 탓이라’는 생각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 일이 되지 않았어! 너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아! 특히 부부사이에 이런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사람의 무기력과 한계에 직면하면 누군가에게 탓을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의 마음이 조금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오늘 묵상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사람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다 감당하셨다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책임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나를 구하려고 하지 다른 사람을 먼저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MBC ‘어느 날 갑자기’에서 대구 지하철 사건을 다루었는데 한 목사님께서(그 때는 전도사님) 지하철에 연기가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기침을 하고 있어서 목사님이 가지고 계신 목캔디를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목캔디 하나가 남았을 때에는 그 하나를 나도 살아야겠기에 다른 사람을 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죽고 너를 살릴께”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죽음에 처하였을 때 떠오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에서도 연기가 나는 지하철 안에서 “당신을 사랑해, 미안해”라고 문자 메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은 인간을 사랑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너 때문이야’라고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지 말고, 서로를 위하는 말을 사랑을 담아 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나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사랑해’라고 귀에 속삭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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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기

오래 살기
요한복음3장 1절~15절

요한복음3장 15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전에 말하는 세 가지 대표적인 거짓말이 있다. 아가씨들이 시집가기 싫다, 장사꾼이 손해보고 팔았다, 노인들이 일찍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노인은 오래 살고 싶어한다. 노인 뿐 아니라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성경에서 오래 사는 방법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신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구 중에 하나이다. 욕구는 언제 생기냐 하면 부족할 때 생긴다. 물을 마실 욕구는 물이 부족할 때 생긴다. 돈을 벌 욕구는 돈이 부족 할 때 생긴다. 부족한 것을 아무리 채워도 부족함을 느낄 때, 그리고 부족함을 통제하지 못할 때 ‘중독’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언제 생기는가? 삶에서 부족함을 느낄 때 생긴다. 특히 더 살고 싶은데 더 살지 못할 때 생긴다. 죽음이 눈 앞에 있을 때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래 살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하도록 삶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너무 바빠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나타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 마귀들은 사람을 바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창세기 4장 26절에 “그에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 때에 이르러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에노스’의 뜻이 무엇인가? ‘연약한 인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대면(confront)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

요즘은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 선생님을 찾는다. 의술이 발달하여 하나님보다 의료 기술을 믿는다. 그러나 의료 시술의 전문가인 의사조차 많은 병들을 치료하지 못하여 인간의 한계를 느낀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을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한계를 느낀다고 다 하나님을 찾는가? 아니다.

누가 하나님을 찾는가? 인간의 자존심을 꺾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이다. 정치가이며 종교가이며 이스라엘에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니고데모가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예수님께 찾아 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오래 살 수 없다. 영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 영이 살기 위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거듭나야 오래 살 수 있다. 나는 영생을 가졌는가?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요3:3). 정말 오래 살고 싶은가? 그러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예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있다면 아직 죽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죽음에 이르면 오래 살고 싶고, 오래 살고 싶으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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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바꾸기

말 바꾸기
요한복음2장 13절~22절

요한복음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 일으키리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헐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에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는 증거의 말로 사용합니다. “너희”를 “내가”로 바꾸어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트리고 사흘만에 다시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한 단어를 바꾸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세상의 흔한 일들을 성경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말을 바꾸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정적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상대가 한 말을 바꾸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기억력의 한계와 여러가지 능력의 한계로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상대가 말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의도적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밥이 있으면 반찬이 있어야 하고, 밥과 반찬이 있으면 고기가 필요하고, 고기가 있으면 더 다른 것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욕심입니다. 육신의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채우지 못하는 갈증이 있습니다. 목마른 갈증을 채우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육신의 욕심은 세상의 물로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도 있지만 같은 말씀으로 말씀을 믿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2장 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믿지 못할 상황이나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때 믿지 못할 말씀이나 상황들을 깨닫고 믿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되는 상황이 지금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믿을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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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

점입가경
요한복음 2장 1절~11절

요한복음2장 10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든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점입가경(漸入街境)은 중국의 고개지의 화가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그는 사탕수수를 먹을 때 꼭 맛이 없는 끝부터 씹어 먹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갈수록 점점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에서 유래한 점입가경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첫 번째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께서 없었더라면 설상가상이 될 뻔하였다. 설상가상은 눈 위에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2장 1절은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이 된다. 혼인 잔치가 사흘 동안 계속 되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 혼인 잔치가 되던 부활의 시간을 의미하던 기쁜 날이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속에 포도주가 빠지면 결혼의 흥이 깨지게 된다. 기쁜 날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흥이 떨어지게 되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 예수님께 “저들이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여인이여’ 이 말을 가지고 예수님은 어머니도 모르는 불효자식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인은 ‘여인’의 높인 말로 쓰였다.

예수님이 계셔도 혼인잔치가 엉망이 될 뻔 하였다. 예수님이 계셔서 떨어진 포도주를 채우는 일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 혼인 잔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설상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상가상이 될 뻔한 가나의 혼인잔치가 어떻게 점입가경이 되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의 믿음과 하인들의 순종의 조화가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또한 하인들은 예수님의 어머님의 말에 따라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시킨 그대로 행하였다. 그랬더니 가나의 혼인잔치에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기적을 보려면 넘어야 하는 산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가졌던 믿음과 하인들이 행하였던 순종이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순종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떻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도 순종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계시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도가 거절되어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의 길은 설상가상의 길이 아니라 점입가경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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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정점

화룡정점
요한복음 1장 43절~51절

요한복음1장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다나엘은 마음에 거짓이 없고, 성경에 능통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아직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화룡정점이란 장승요가 벽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즉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완성시키다라는 뜻이다. 나다나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는데 어떻게 중요한 부분을 채웠는가? 빌립의 전도가 나다나엘의 부족함을 채웠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어도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요1:45)”라고 소개했다. 성경은 메시아는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친구의 말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찾아 오셨다(요1:47).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말씀하시니,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묻기를 “언제부터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였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빌립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을까? 오실 메시아에 대한 묵상을 하였을 것이다.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을 꾸었을 것이다. 나다나엘에게는 꿈이 있었지만 꿈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꿈을 이룰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재주와 능력이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펼치는 사람들은 적다. 용에 눈을 그려야 한다. 용의 눈은 어떻게 그리는가? 예수님께서 눈을 그려주셔야 한다. 나다나엘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눈을 그려주셨다. 의심스러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을 때 화룡정점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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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고 싶다

소통하고 싶다
요한복음 1장 35절~42절

요한복음1장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걸어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의 말에 제자들이 ‘토’를 달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과 제자들이 어떠한 관계로 맺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이 말을 할 때 제자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선생님이 제자에 대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영향력을 주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선생님이라면 그 영향력은 더 클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King James에는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하는 사이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이었다.

요즘 한국에는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회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다. 부모와 자녀, 형과 동생, 언니와 동생, 선생님과 제자 사이가 서로 소통하기에 너무 먼 사이가 되고 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상호간의 관계가 무너지고, 무너진 상호 관계는 사회를 암울하게 이끌어갈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소통’이다. 소통은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소통이 된다.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도 ‘세상에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의 소통을 이룰 수 있다. 사회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뜻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목사인 나도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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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소리

메아리 소리
요한복음1장 19절~24절

요한복음1장 23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산을 올라가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산 정상에 섰을 때의 기쁨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있다. 특히 산에서 “야호”하고 소리 질렀을 때는 지금까지 마음 속에 묻혔던 10년 묵은 때까지도 흘러내려 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야호’하는 메아리 치는 소리가 귀에 다시 들릴 때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흐르는 전율을 느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말씀을 믿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묻고 있다. “네가 엘리야냐?” “아니다.”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그리스도)냐?” “아니다.” 그러면 넌 누구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세례 요한은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 별명이 “소화제”였다. 그 친구는 자기를 “소화제”라고 부르면 싫어했다. 사람을 물건에 비유하거나 소리에 비유한다면 매우 싫어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넌 소리 없는 그림자야”하고 나에게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다. 회개하라고 외치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리를 질러야지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면 누가 회개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하고, 또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광야에서 회개를 소리치고 있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전략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전도 전략은 ‘도시 전도’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전도 전략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람의 시선을 피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넌 귀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우쭐하여 “그래 난 귀한 사람이야”라고 메아리 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례 요한에게 “당신은 귀한 사람이야”하고 말해도 세례 요한은 “아니야, 난 단지 광야에 소리에 불과해”라고 대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광야에 소리치는 사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다.

작은 일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는 작고 크고가 없다. 사람들의 눈에 작은 일과 큰 일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작은 일과 큰 일이 없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나님이 부르신 소리에 그대로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보자. 주님의 메아리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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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흐르는 물

거꾸로 흐르는 물
요한복음1장 15절~18절

요한복음1장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르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그 분은 나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세상의 이치는 나이 순으로 돌아가지만 하늘의 이치는 존재 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 순으로 흘러가야 세상은 제대로 흘러간다. 물이 흐르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한다. 낮은 곳에서 높을 곳으로 물은 올라가지 못한다. 높은 곳으로 물이 올라가려면 모터로 물을 강제로 올려야 한다. 강제로 물이 올라가더라도 물은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이 흐르는 이치가 세상의 질서이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이 보인다. 질서를 무시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한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은 내려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썩으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시대의 오늘 말씀은 물이 거꾸로 흐르는 말씀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성경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 늦게 태어나도 세례요한은 그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장이 시골의 한 농부를 존중하고 그 분이 메시야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바라보고 하늘의 이치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요한복음1장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사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King James 성경 은혜 위에 은혜를 “grace for grace”라고 말한다. 은혜를 위한 은혜, 진정한 은혜를 받은 자만이 세상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현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였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하늘의 이치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야 세상의 이치를 안다고 말한다.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은혜를 위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받는다는 ‘have received’라고 하고 있다. 은혜는 이미 받은 상태이다. 그 은혜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은혜를 이미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사람들의 은혜(favor)를 받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하는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며 그 사람이 원하는 일들을 해주며 비싼 선물까지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이시고, 나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은혜를 얻는다고 한다.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너무 어렵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거꾸로 흐르는 물에서 뛰어나와 제대로 흐르는 물로 들어가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창조자이며 거꾸로 흐르는 물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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