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1장 1절~14절

요한복음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태초는 창조 전 즉 시간이 시작 되기 전의 태초를 말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목회를 할 때 어느 장로님이 내 설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내가 설교 중에 성경 말씀을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야기’나’ 말’로 말한다는 것이었다. 성경 중에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성경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0~40년 전에 한국에서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욕이라고 말하는 목사님도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이에 대하여 토를 다는 목사님은 거의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의 말씀이다. 말씀이 만약에 저주의 말이었다면 어떨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주한다는 신명기의 말씀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의 말씀은 잃어버렸던 에덴 동산에 대한 회복과 개인적 구원을 말하고 있다. 구원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 땅에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도 임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요한복음1장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나님께서 그 말씀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는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있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비추고 계시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추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빛이 비추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가게 되어 있다. 빛이 비추는데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 어둠 속에 거울이 있으면 빛을 비추어도 어둠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거울이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반사하면 빛이 비추어도 어둠은 어둠이다. 어둠이 빛은 흡수되어야 밝아진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사한다면 빛이 있어도 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안에 있는 거울은 무엇인가? 그 거울은 어둠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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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가르침

권위 있는 가르침
마가복음 1장 16절~28절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인 구성원에게 인정을 받고, 사회 구성원이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위는 스스로가 복종하는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강제로 복종하게 하는 영향력이 권위가 아니다.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권위는 사람의 인품을 존경해서 복종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높은 지식에 스스로 복종하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룬 사람을 존경하기도 한다.

22절에 예수님을 가르켜 권위 있는 자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서기관이나 제사장과는 다른 권위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가진 권위가 무엇이었을까?
교수는 지식을 쌓고 전달함으로써 권위가 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을 명장이라고 말한다. 그 분들은 빵을 맛있게 만드는 경험이 그들의 권위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교수가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나오는 권위와 빵을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빵을 만드는 명장의 권위가 합하여진 권위는 아닐까?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사랑을 섬김으로 보여 주었다. 바보 의사, 고 안수현(고려대 전문의, 육군 대위, 유행성 출혈염으로 사망)의사는 죽음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의 가진 권위는 가진 지식대로 실천하는 사랑의 권위라고 생각을 한다.

예수님이 가진 행동을 보인 사랑의 권위, 예수님이 가진 지식을 몸으로 실천하는 권위는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위가 있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권위는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는데 권위가 있다. 그 권위가 사람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 일 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나타내려고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서기관들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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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1장 9절~15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9절에 “그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 이르러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분은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잃었던 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 앞에 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의 사역을 하시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오히려 숨기면서 세상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든 세상의 질서에 스스로 복종하고 따르고 계시다.

정치가, 판사, 검사들은 자기가 만드는 법에 따르기보다는 법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때가 많이 있다. 목사도 말씀의 권위 아래 자신을 숙이기보다는 말씀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이 산산이 부서트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스스로 복종하고 계시다.

인간의 욕망이 산산이 부서져야 진정한 세례를 받을 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몸으로 보여 주셨다. 세례는 육신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성령께서 임하셨다.
그리고 11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욕망이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질서에 따르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내 자신을 향한 질문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매일 매일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하나 하나 벗어 던져 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버릴 때 내게 있던 짐들도 하나 하나 벗기어질 것이다. ‘주님 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내 안에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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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

세례요한
마가복음 1장 1절~8절

복음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복음의 시작을 말하고 마가복음 1장 2절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전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앞을 준비하는 사람을 보낸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기 700년 전에 말씀하신다.

왕의 왕, 왕의 전사라 보냄을 받았다면 멋있고, 훌륭하고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대단한 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례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보냈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말한다(요1:23).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을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 요한
그의 모습을 보면 어느 한 구석도 멋있고,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사람이 모이지 않는 곳…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세례 요한을 바라본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을 해야지,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치는 세례 요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세례 요한은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4절, 회개의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유가 이스라엘 사람들보고 회개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회개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용한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 한적한 곳, 그리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든 곳에서 회개가 이루어진다. 회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광야이다. 회개를 소리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은 혼자서 고분분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회개는 사람의 모인 곳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지 않는 광야에서 외칠 때 회개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오늘 날 목회자가 소리치는 회개의 장소은 어디인가?
광야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외치고 있는가?
광야를 모르면 진정한 회개의 소리를 칠 수 없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바라보고 나가는 자리가 광야이라고 생각을 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광야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광야에서 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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