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기도

겟세마네 기도
마태복음 26장 46절

마태복음 26장 46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끝내시고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참조)”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끝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일어나 내려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라고 담대히 말씀하셨다.

기도하는 동안에 예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십자가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를 하시면서 달라지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하시면서 유혹을 이기시면서 달라지셨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유혹을 받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게 찾아온 유혹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으실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에게 찾아온 유혹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면서 깨달으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앞으로 하나님과 끊어지는 고통보다 과거에 우리와 끊어졌던 고통을 더 아파하셨음을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깨달으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하는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에 깊이 숨어 잠재해 있는 하나님 마음을 깨닫는 기도이기도 하다.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처럼
마가복음 14장 38절

마가복음 14장 38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를 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졸고 있는 제자를 보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the spirit truly ready, but the flesh is weak)”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영은 준비되어 있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졸고 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King James Version 참조).

예수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을 볼 때 “한심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이해하셨다. 왜냐하면 졸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중에 뽑힌 세 명의 정예용사이기에 제자들에게 화를 내실 수 있는 상황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하신 이유도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예수님 없이 제자들이 걸어야 할 어두운 밤을 안타까워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라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걸어 가는 인생길 주위에는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많은 위험이 있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하시는 말씀은 “위험물들을 보지 말고 나만 바라봐”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공중에서 흔들리는 줄을 잡고 산을 넘어가는 훈련을 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조교가 “아래를 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고 건너 오라”고 말하는 것 처럼…

하얀 종이

하얀 종이
-김 준영-

황량한 땅에 꽃씨를 뿌리자고
내 소매를 잡아끄는 고운 마음을
하얀 종이 위에 무엇으로 그릴까?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메아리도 어지러운데
난 아직도 방향을 몰라
큰 소리로 다시 날 불러달라고 졸라본다

한 허리 돌아 또 돌아
몇 겹을 돌다보니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길을 일러주는구나

하얀 종이에 징검다리 그려 놓고
별도 그리고
달도 그리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향기로운 꽃을 가꾸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그 다리를 건넌다

내 소매를 잡아끌던
고운 마음 따라
내일은 무엇을 그려
하얀 종이를 채울까

숨 쉬고 내밷기

숨 쉬고 내밷기
요한복음 20장 22절

요한복음 20장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다.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않았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요20:25 참조)”고 하였다. 예수님은 도마를 찾아가서, 도마가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지도록 하였다.

우리가 기도할 때 호흡은 중요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우리 마음이 잠잠해 진다. 숨을 들이마실 때 예수님의 좋은 모습들을 상상하면서 숨을 들이마신다. 우리가 숨을 내뱉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나쁜 모습들을 숨을 통하여 내보낸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평안을 들이마시고, 우리 안에 있는 근심을 내쉰다. 그리스도의 온화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하는 것들을 내쉰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숨을 쉬고 들이마신다.

호흡을 조절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반대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사람의 코에 불어 넣어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셨다(창2:7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숨 쉬고 내밷는 호흡은 생명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는 숨을 쉬고 내밷으면서 마음을 정화하자. 호흡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악한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 그렇다보면 우리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깨어 있으려면

깨어 있으려면
마태복음 26장 38절

마태복음 26장 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으로 깨어 있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하려면 제자들이 깨어 있어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깨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깨어있으려면 예수님을 갈망이 있어야 한다. 시편의 한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깨어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물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 예수님을 갈망하여 깨어 있게 된다. 죽도록 아픈 환경에서 예수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찾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목슴을 끊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유다는 죽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 이유가 갈망이 아니라 가롯유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순절 기간 우리는 깨어서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우리가 깨어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때 시작이 된다. 만약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졸지 못했을 것이다.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이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이유
마가복음 14장 34절

마가복음 14장 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서 마음은 혼(Soul)을 말한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고통을 통제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마음을 죽게 하는 고통을 이기시고 피할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인성으로 모든 고통을 경험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자원하여 우리대신 겪으셨다.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될 고통을 아시고 마음이 죽게 되셨다. 그 단절과 죽음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고통을 겪으셨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사53:3)’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겪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고통을 받고, 근심하고 있다.

우리는 생기지도 않을 일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지? 다음 달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지? 일자리를 잃으면 어떻게 하지? 우리가 근심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통제할 수 없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과 심판을 우리를 대하여 예수님께서 겪으셨는데 여전히 우리는 고통 속에 있다. “그(예수님)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상하고 징계를 받았는데 너희는 지금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지금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반복하여 묵상하여 말씀을 신뢰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넘어가는 십자가

넘어가는 십자가
누가복음 22장 39절

누가복음 22장 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지난 주 수요일부터 ‘재의 수요일’이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40일 여정의 시작이다. 오늘부터 우리도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여정을 따라 가고자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생각, 감정, 의지를 우리도 같이 느껴보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십자가의 잔을 옮겨주기를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가 원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절 상반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을 꺽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고 하였다;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절 하반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시려는 그분의 사랑때문이었다.

우리도 피흘리는 고난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 우리가 피하지 못할 고난은 ‘우리 십자가’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우리 십자가’는 우리가 생명을 지키려고 함으로 자연히 생기는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어 올 때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생명을 버리고자 할 때 얻게 된다. 즉 우리가 생명을 버리고자 할 때 우리가 져야 할 ‘우리 십자가’는 예수님께 넘어가게 된다(막8:35참조).

파도

파도
-김 준영-

아득히 먼
바다 끝 자락에
잔잔한 아픔이 일렁인다

수없이 만났다 흩어지고
헤어져 다시 만나고
어둠을 타고
밝은 빛을 향해
산만큼 자란 네가
오고 있구나

지친 몸 가눌 길 없어
몸부림치며
하늘 향해 울부짖다
바위에 내동댕이쳐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여

진한 물보라
석양 빛에 아리도록 고운 너의 자태가
용서와 사랑으로
화해와 평화로
나의 온몸을 적신다

힘써야 할 일

힘써야 할 일
베드로후서 3장 8절~18절

베드로후서3장 8절~9절,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의 날을 바라보는 신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오기를 사모한다. 왜냐하면 주의 날은 신자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주의 날은 도둑 같이 오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는 날이다(벧후3:10 참조).

주의 날을 바라보는 신자는 주님 앞에 점이나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주님께 발견되기를 힘쓴다(벧후 3:18). 신자가 주님 앞에 흠이 없도록 하려면 힘써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신자들은 악한 자들의 미혹에 끌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악한 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신자 앞에 나와서 신자들을 속이고 유혹하기 때문에, 신자는 힘쓰지 않으면 악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간다.

우리가 악한 자의 미혹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악한 자의 미혹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가 자라는 일이다. 우리가 자라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배까지 내려오게 해야 한다.

마지막 때

마지막 때
베드로후서 3장 1절~7절

베드로후서 3장 4절,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베드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소아시아에 퍼져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때의 생각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후3:1 참조).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세상은 동일하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를 준비하시는데, 아직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마지막 한 명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없다고 하는 말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이제 하늘과 땅과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우리는 마지막 때를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멸망과 심판의 시간이지만, 우리에게 구원이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지막 때를 기억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