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역사

말과 역사
창세기 1장 27절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결혼할 때 많이 듣는 곡이 결혼행진곡이다. 신부가 처음 입장할 때 곡은 바그너의 <로엔그린>이라는 곡인데 이 곡의 결말은 부부가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난다. 백조의 기사인 에로스는 로엔그린을 위험에서 구출한 뒤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에로스는 로엔그린과 결혼을 하면서 절대 자기의 출신과 이름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로엔그린은 에로스의 정체를 알려고 하였고, 로엔그린이 에로스의 정체를 알게 되자 그는 아내를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결혼행진곡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요즘 이혼을 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결혼행진곡의 곡을 듣고 부부가 결혼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신랑과 신부가 결혼행진곡을 듣고 결혼을 하였다면 이는 이혼을 선포하면서 결혼한 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가라사대라는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의 말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 있다. 우리가 노래하는 가사에도, 우리가 말하는 말에도, 우리가 한숨 쉬는 숨소리에도 그 가사, 말, 숨소리대로 이루어지는 말의 능력이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이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역사를 오늘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약속

주님의 약속
요한복음 16장 24절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받을 때 이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이 약속의 비밀을 깨달았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이 기쁨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바울은 고백하였다. 이 말은 바울이 고난의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더니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그의 간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면 받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늘을 기쁨으로 살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주님 백성들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어 기도의 응답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살게 한다는 주님의 약속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살 수 있다.

가정의 복

가정의 복
창세기 2장 24절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가정의 시작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함으로 시작이 된다. 부모를 떠난다는 뜻은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독립한다는 뜻을 말한다. 독립할 가정의 자녀가 부모와 정서적으로 묶여 있거나, 경제적인 도움을 부모에게 받거나, 혹은 자녀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였다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독립된 가정의 자녀가 부모를 올바로 섬기고 공경할 수 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시작한다는 뜻은 독립된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정을 시작하는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녀가 독립된 가정을 이루었다는 뜻은 부모와 자녀가 사이에 경계선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서로의 경계선이 분명할 때 자녀는 부모를 마음을 다해 섬길 수 있다.

한국에 흔한 고부간의 갈등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선을 허물고 들어갈 때 발생하는 문제다. 경계선을 허무는 이유는 부모와 자녀가 감정적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는 자녀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부간에 갈등이 있다.

주님은 독립된 가정에게 복을 주신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주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말하신다. 주님은 남편이나 아내 한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으신다.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정의 복은 남편이나 아내가 등을 돌릴 때 받는 복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할 때 받는 주님의 약속이다.

겸손한 기도

겸손한 기도
요한복음 11장 3절

요한복음 11장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기도는 겸손함이 포함되어 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고 나사로의 상황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그들의 필요를 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처분을 기다렸다.

우리가 욥이 경험한 시련에 처한다면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려야 한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올려 놓지 않고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가 문제를 올려 드린다는 뜻은 우리의 요구를 말하는 것이고, 문제를 내려 놓는다는 뜻은 우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겸손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의 상황과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은 겸손에서 나온다. 우리가 겸손히 기도한다는 뜻은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그대로 알려 드림을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요구가 아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주님께 그대로 알려드림으로 주님이 우리의 상황을 주님의 뜻에 맞게 해결하는 주체가 되게 하는 기도가 겸손한 기도이다.

기도의 열매와 능력

기도의 능력과 열매
누가복음 23장 34절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메달렸을 때 하셨던 기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님 옆에 있던 두 강도 중에 한 강도가 회개하여 천국으로 인도 되었다. 십자가의 사건 이후에 6개월 동안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기도의 능력과 열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기도로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어났는지를 묵상한다면, 예수님 기도의 흔적을 통하여 기도의 능력과 열매를 알 수 있다. 예수님 옆에 있던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예수님은 정령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다(막15:39). 예수님을 배신하였던 베드로가 회개하였고, 회개한 그의 설교로 3천명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행2:41).

기도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의 열매는 항상 있다. 우리는 생명책이 열리고, 성경의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나기까지 기도의 능력과 열매를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항상 들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면 기도의 열매는 항상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을 항상 들으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 때문이다(요11:42).

겨울비

겨울비
-김 종길-

겨울비 후둑이는 저녁 어스름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맞대는
옛 동기생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동기생들의 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지금 십여 명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한 두 사람은 연락이 닿지 않고
한두 사람은 병석에 갇혀 있어
모처럼 모인다 해도 반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나 가장 허물없는 사이가 그들이다
지금은 백발에 주름잡힌 얼굴들이지만
모이면 모두 육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
버릇없는 중학생들이 되어 즐겁기만 하다.

망년회란 한 해를 잊자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를 잊자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두 가지를 다 잊자는 건가
겨울비 후둑이는 저녁 어스름
늙은 동기생들을 만나러 집을 나선다.

기도의 사인

기도의 사인
누가복음 21장 41절

누가복음 21장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생각하지 못할 엄청난 고통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느끼셨다. 예수님의 느끼신 고통의 크기는 그의 기도 속에 녹아 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1:42).”

구약과 신약 모두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동일하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시로다(시50:15)”라고 시편은 기록한다. 고통 속에서 기도하면 고통은 영광으로 바뀐다고 말씀하신다. 신약은 고통이 찾아오면 기도하라는 사인이라고 말한다; “너희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고통을 넘는 법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할 때 얍복강에서 야곱은 기도하여 힘을 얻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를 갑자기 잃었을 때 기도하여 욥은 하나님을 보았다. 고통은 화가 아니라 복이다. 그러나 고통을 넘어야 복이 된다.

우리가 고통을 넘으려면 고통을 넘을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통을 넘는 능력을 얻는다. 우리가 고통을 넘으면 우리의 고통은 우리에게 복을 주는 통로가 되는 동시에 고통은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사인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없을 때 기도하여 힘을 얻으라는 사인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

주님의 자비

주님의 자비
누가복음 18장 13절

누가복음 18장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J.C Ryle(John Charles Ryle)의 ‘예수 묵상 365’에서 세리의 기도가 탁월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세리의 기도는 진심으로 외치는 기도였다. 둘째,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기도였다.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 대하여 말하였다. 셋째, 겸손한 기도였다. 세리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넷째, 희미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언약에 기초한 기도였다. 마지막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였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세리와 같이 하나님을 바로 쳐다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가슴을 치며 우리의 고통을 몸 짓으로 하나님께 전할 때가 있다. 죄는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죄에 짓눌리면 세상이 우리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세상으로 부터 오는 짓눌림, 억울함이 마음에 고통이 되어 우리가 주저 앉아 있을 때도 있다. 그 때 우리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