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비밀

은밀한 비밀
누가복음 8장 56절

누가복음 8장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회당장인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난 후에 딸의 부모에게 딸이 죽어 살아난 일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야이로와 그의 아내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지켰다. 오늘 말씀 이외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몇 차례 말씀하셨다(막1:44; 9:9; 눅8:56).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예수님의 비밀을 알고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작은 믿음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선한 일을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만, 다른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한 사람을 모르면 선한 일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과 그분의 은밀한 비밀을 나누기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은밀한 비밀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은밀한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은밀한 비밀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주님과 나누는 은밀한 비밀이 바로 주님과 나누는 은밀한 교제이다. 주님은 우리의 동기와 의도를 다 아신다. 우리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이고(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비밀을 다 알고 싶어한다),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주님과 은밀한 비밀을 나누기 원할 때 주님은 주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우리 마음이 향한 곳

우리 마음이 향한 곳
로마서 8장 5절~6절

로마서 8장 5절~6절, “5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의 싸움이 시작이 된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원하지 않는 일을 바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고, 육신의 생각은 죄라고 바울은 말한다(롬7:20 참조).

바울은 고린도전서2장과 3장에서 사람들을 세 종류의 사람으로 나눈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 신령한 자(고전2:15),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3:3)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중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성령을 쫓아 사는 신령한 사람과 육신을 쫓아 사는 육신의 사람들이다.

육신을 쫓아 사는 육신의 사람들은 모든 생활의 영역, 즉 개인, 가정, 교회, 사회에서 육신을 쫓아 살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쫓아 사는 신령한 사람들은 모든 생활 영역을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산다. 육신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미움이 끊어지지 않아서 그들의 마음은 변화가 없지만 신령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화되어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육신의 사람들은 행동으로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는 듯 보여도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육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 뿐이지만, 신령한 사람들은 겉으로 건성 건성 행동하여 신앙이 없는 사람들 같이 보여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은 우리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우리 마음이 향한 곳이 우리의 욕심과 필요를 향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더라도 우리는 육신의 사람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향한 곳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의 헌신이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 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는 기도

마음을 다하는 기도
마태복음 6장 9절

마태복음 6장 9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즉 주기도문은 동네 아저씨에게 부탁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청하는 기도에는 여덟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마6:9).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경의를 표한다(마6:9). 셋째, 우리는 자신과 지구 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인정한다(마6:10). 넷째, 우리는 하나님께(사람이 아닌) 우리의 필요와 부족을 채워달라고 구한다(마6:11). 다섯째,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마6:12).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께(부모나 자녀가 아닌) 우리를 돌봐달라고 간청한다(마6:13). 일곱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심이 가장 큰 소망임을 고백한다(마6:13). 마지막으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음을 고백하고 기도를 마친다(마6:13).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은 마음을 다하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이다. 하루 하루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를 반복하여 마음을 다하여 우리가 고백한다면, 주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주기도문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이다.

단순함의 비밀

단순함의 비밀
마태복음 6장 19절

마태복음 6장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애들 알버그 칼훈(Adele Ahlberg Calhoun)은 ‘영성훈련 핸드북’에서 오늘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경험들은 사실은 다 필요한 것들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세우는 것, 즉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를 제1순위로 지키는 일이다.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면 인생은 훨씬 더 단순해진다.”

이 말은 우리의 목표가 한 가지일 때 우리의 삶이 단순해 진다는 말이다. 우리의 목표가 한 가지라는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포도열매를 맺게 된다.

두 가지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삶이 복잡하다. 예를 들면 삶이 복잡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정신적으로도 만족도 얻고 싶고, 육체적으로도 쾌락도 누리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얻고자 한다고 다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계획할지라도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들 중에 하나이고, 그리스도의 비밀들 중에 하나는 단순함의 비밀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여러 갈래의 길이 아닌 한 길이고, 그 길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살면 삶은 더 복잡해지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면 우리의 삶은 점점 단순해진다. 우리의 삶이 단순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분은 온전한 기쁨과 평강을 우리에게 주신다.

사랑

사랑
-무명 시-

처음엔
들리는 듯 소리없는
빗소리인 줄 알았다
처음엔
불어오는 듯 소리 없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처음엔
하늘거리듯 다가오는
아지랑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그게
사랑이었다

처음엔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물 되어 흐르는
빗줄기인 줄 알았다
처음엔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지나치는
바람인 줄 알았다
처음엔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눈 앞에서만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그게
사랑이었다

흘러 보내야 할 것과 간직할 것

흘러보내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
히브리서 2장 1절

히브리서 2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사람들에게는 버려야 할 것들과 간직해야 할 것들이 있다. 버려야 할 것들을 간직하고, 간직해야 할 것들을 버리게 되면 마음은 쓰레기 통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간직해야 할 것을 간직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게 되면 마음은 귀한 박물관이 된다.

목회를 하면서 과거의 아픈 사건, 추억, 기억들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도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의 기억 속에 살고 있었다. 그분들의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까지 연결이 되어 그분들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반대로 성도들 중에는 붙잡아야 할 것들을 버리는 분들도 보았다. 오늘 말씀은 들은 말씀이 흘러내려가지 않도록 하라고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이 의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말씀은 마음에 담기지 않고 흘러갈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 옛 상처나 고통들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과거의 아픈 상처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우리가 과거의 아픈 사건, 추억, 기억들을 흘러보내야 마음이 치유가 된다. 마음이 치유가 되려면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우리가 아픈 상처를 경험하게 된 이유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이 되어야 상처를 흘려보낼 수 있다. 우리가 아픈 상처를 흘려보내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간직하게 된다.

새 날의 의미

새 날의 의미
골로새서 3장 16절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신도의 공동생활’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하루는 다르게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구약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여 다시 해가 지는 저녁으로 끝을 낸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은 해 뜨는 새벽에서 시작하여 동트는 새벽이 올 때에 하루를 끝낸다. 하루가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부활의 때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밤에 오셔서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는 빛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운명하셨을 때 세상은 밤이 되었다. 세상이 온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어두운 세상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빛은 승리자가의 빛이다. 종교 개혁 때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해가 솟아 오르는 이른 아침, 나의 구주 그리스도가 일어나시어, 죄의 밤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시니, 주는 우리에게 빛과 기쁨과 생명이 되어 다시 오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는 의로운 태양으로 떠오르게 된다(말4:2 참조). 우리도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 우리는 힘차게 솟아오르는 의로운 태양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다리는 새 날은 죽음과 마귀와 죄에서 이기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새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새 날이 되면, 우리는 생명과 즐거움이 넘치는 새 날을 맞이하게 된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쉼
로마서 12장 2절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쉼이 필요하다. 쉼이 없으면 새로워지지 않는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돌보기는 결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가진 유일한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도록 내게 주어진 선물을 잘 돌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혹사할 때가 있다. 일에 집중하다 보니, 책을 집중하다 보니, 사람들과 재미 있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피곤하게 할 때가 있다. 또한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육체를 혹사할 때도 있다. 다른 사람을 돌보다 보니, 교회 일에 헌신하다 보니 우리 자신을 돌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는 이기적인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운동, 쉼,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일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지 이기적인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일이고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려고 6일동안은 창조의 일을 하시고, 7일째는 하나님께서도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쉼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쉼을 얻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일과 그냥 하는 일을 구분하여야 한다. 어떤 일은 완벽하게 일을 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있다. 어떤 일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하면서 중간에 멈춰야 하는 일이 있다. 만약에 최선을 다하는 일들이 우리 몸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몸을 힘들게 한다면 그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을 상해가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 마음의 동기가 영적인 필요가 아닌 육적인 필요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상하기 전에 쉬어야 한다. 주님 안에 쉼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영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꽃

사랑의 불꽃
누가복음 11장 34절

누가복음 11장 34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리처드 롤(Richard Rolle)은 사랑의 불꽃(The fire of Lov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탄은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 잡고 있다. 자비롭고 성결하고 겸손한 사람들, 게다가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들에게 자기 죄를 고백한 죄인들을 사탄은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상처가 이런 거룩한 냄새에 의해 가려지는 일은 자주 있다.”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일들이 많이 있다. 바쁘게 일하면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무리한 강요를 다른 사람에게 하면 강요를 하는 마음에 자유가 없어진다.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불꽃이 있으면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고 자유를 준다. 사랑의 불꽃이 살아 있으면 강요나 강압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게 인도한다.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면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고, 삶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우리에게 사랑의 불꽃이 있으면 사랑의 불꽃은 우리 눈을 밝혀서 눈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을 살피게 한다. 우리 눈은 어두운 곳을 찾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춘다. 사랑의 불꽃은 우리를 살펴,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움을 찾아서 그 곳에 빛을 비추게 한다.

질투

질투
-김 상미-

옆 집 작은 꽃밭의 채송화를 보세요
저리도 쬐그만 웃음들로 가득 찬
저리도 자유로운 흔들림
맑은 전율들

내 속에 있는 기쁨도
내 속에 있는 슬픔도

태양 아래 그냥 내버려두면

저렇듯 소박한 한 덩어리 작품이 될까요?
저렇듯 싱그러운 생 자체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