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히브리서 1장 1절

히브리서 1장 1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다. 천사를 통하여(창19장), 환상을 통하여(창25장), 꿈을 통하여(창28:10-19),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출28:30), 비유를 통하여(렘18:1-10), 세미한 소리를 통하여(왕상19:12), 기적과 표적을 통하여(출8:20-25), 또는 여러가지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는 말한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대개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예를 들어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었으나 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확실히 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그분이 하나님이신지 확실히 알아야 했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된다. 모세가 만약 다음과 말을 했다면 어떻게 들릴까? “불붙는 떨기나무는 내게 독특한 경험이었어. 그 경험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나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을텐데…” 모세는 위와 같은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고, 불붙는 떨기나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자라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일이다.

병이 낫는 기적이란?

병이 낫는 기적이란?
마가복음 1장 31절

마가복음1장 31절,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이 병든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즉시 열병이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 큰 기적이 뒤따른다. 그녀는 열병이 나은 후 바로 사람들에게 수종을 들었다. 사람이 열이 많으면 기력을 소진하게 된다. 아무리 열병에서 나았다하더라도 열병에 앓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수종을 들만큼 기력을 회복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열병이 나은 후 다른 사람의 수종을 들만큼 기력도 회복하였다.

이렇게 병을 고치는 기적의 말씀은 병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모든 사람이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병에서 나을 믿음이 없거나 병에서 회복될만큼 믿음이 자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병에서 낫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적보다 이성을 더 앞세우고 있다. 병이 낫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성은 병이 낫는 기적을 막고 있다.

기적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한 원리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질서들이 많이 있다. 특히 기적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질서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적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타나지 않고 특수한 상황에만 나타난다고 이성적으로 설교하시는 분도 계시다.

이성적인 설교가 병을 낫게하지 못한다. 이성은 병이 낫는 기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성은 기도로 병이 낫는 사람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또한 이성은 병을 낫게 하는 믿음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창조의 능력을 설명하기에는 이성이 생각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성을 믿으면 이성이 기대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가 주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으면 기대하던 창조적인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기적을 기대하면 병도 낫게된다. 왜냐하면 병이 낫는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주인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

마태복음 6장 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재물을 버리게 되고, 재물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은 따라오지만, 재물을 섬기면 하나님은 따라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재물을 주기보다 영원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재물을 쫓다보면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이 없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시간은 없다.

우리가 재물을 쫓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는 놓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현재를 통하여 영원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 과거의 삶이 현재를 좌우하고, 현재의 삶이 우리 미래를 좌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현재와 동시에 영원도 보장이 된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주님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주님이 우리를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와 함께 영원한 미래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재물을 섬기면 재물이 우리를 소유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은 없다.

산 제사

산 제사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을 드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몸으로 산 제사로 드리는 방법이 무엇인가? ‘몸으로 드리는 제사’란 우리가 몸에 주의를 기울이고, 몸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함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성경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느낀다. 애들 알버그 칼훈(Adele Ahlberg Calhoun)은 영성훈련 핸드북(Spiritual Disciplines Handbook)에서 “예수님 먼저(Jesus first), 이웃은 그 다음(Others second), 자신은 맨 나중(Yourself last)이라는 말을 합성하여 만든 JOY라는 단어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인간의 무가치성이라는 왜곡된 신학으로 변형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우리의 몸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몸에 나쁜 것들은 피해야 한다. 알코올, 카페인 중독, 음식 중독, 일에 대한 강박증 등은 몸에 나쁘다. 우리는 몸에 나쁜 것들을 피하고, 몸이 감지하는 적신호들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우리에게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려면 성령님이 우리 몸에 거하셔야 한다. 우리 몸에 어떻게 성령님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4:13참조).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고 있는지 우리는 몸을 살펴야 한다. 우리가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지 혹은 원수로 여기는지,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짐스러워 하는지, 부모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원망하는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우리 육신의 마음상태를 살피면 성령이 우리 몸에 계신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최 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 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갈라디아서 6장 1절

갈라디아서 6장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처럼 우리도 죄인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죄인들과 사귐으로 그들이 용서받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 보다는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사귐 안에서 회개하고, 그들의 불신실한 모습을 자책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없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면 용서가 넘치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여 줄게 있다면 우리가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말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하게 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솔직해지고 자유롭게 되면 우리는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모습이 예전에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체는 말씀에 순종하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또한 불순종하는 마음에서 멀어지자고 서로에게 진솔한 충고할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말씀을 듣는 이유

말씀을 듣는 이유
신명기 32장 46절

신명기 32장 46절,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을 들으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일은 헛된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풍요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32:4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하여 말씀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마5:2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를 구속하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사랑을 맛보게 된다. 만약 이 말씀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배우자와 관계에 금이 가게 된다. 우리와 배우자 간의 사랑이 사라지고, 신뢰가 깨어진다. 또한 이 말씀을 어기게 되면 우리는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말씀은 우리를 최선으로 인도한다. 말씀은 우리가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선택
누가복음 16장 15절

누가복음 16장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 엄하게 꾸짖고 계셨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거룩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으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부귀, 명예, 지위와 쾌락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부, 명예, 지위와 쾌락을 원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자가 된다”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예수님의 경고를 들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와 명예, 지위와 쾌락이 그들을 우물 안에 개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물에 갇혀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리가 선택하는 일들에 대한 동기를 다시 점검하게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
누가복음 4장 22절

누가복음 4장 22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설교를 한 후에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언제 놀라는가? 예기치 않던 일들이 일어날 때 놀랍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완벽하게 풀어내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워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예수님을 깎아 내렸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부유한자들이었다. 마음이 부유하면 말씀을 들어도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시기와 질투는 ‘교만’의 다른 모습이고, 마음이 부유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나사렛) 여기서도 행하라(눅4:23)”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일을 요구했지, 가난한 마음으로 놀라운 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는다. 겸손하게 말씀을 받을 때 우리에게 성령이 임재하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하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내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 교만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교만은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교만은 말씀의 부분만 받거나 말씀을 특이하게 해석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은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태도를 신중하게 돌이켜 보자. 말씀을 애타게 그리고 온전하게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애타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 동주-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후회 없이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