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

가장 약한 부분과 강한 부분
에베소서 6장 12절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영성훈련은 당신의 삶에서 모든 것이 채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이다. 당신의 삶의 어느 부분에서 매여 있지 않게 하고, 완전히 몰두하는 일은 더군다나 없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영성훈련은 당신이 계획하지 않았거나 기대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고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말하였다.

초대교회와 교부(Father)들은 영성훈련을 하기 위하여 ‘영적전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4세기 말 자신의 “강연6(Conferences 6)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전쟁은 모두 같은 순서로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공격은 늘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가해지는 공격의 성격에 따라 영적전쟁은 시작이 된다.”

각 사람에게 가해지는 공격의 성향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과 가장 강한 부분에서 영적전쟁은 시작이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가장 약한 부분에서 영적전쟁이 시작이 될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이 ‘인정’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하여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섬김’이 가장 잘하고 섬김이 익숙한 부분이라면, 그 사람에게 섬기는 일만하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영적전쟁을 치루게 한다. 그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섬기는 일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약한 부분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강한 부분도 영적전쟁에서 우리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이고, 우리가 가장 잘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믿음의 행위

믿음의 행위
마가복음 6장 31절

마가복음 6장 31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쉼은 시간을 사는 방법이다. 시간을 사서 얻지 않으면 악을 이기지 못한다(엡5:16 참조). 세상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밤낮이 없이 뛴다. 식사도 거르면서 일을 한다.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가질새도 없이 바쁘다. 사람들은 일에 지쳐 힘들어하고, 육신은 점점 쇠약해진다. 시간을 할애해서 쉬지 않으면 자기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쉼은 자기를 찾는 방법이 된다. 예수님은 밤낮으로 뛰고, 아침도 거르면서 사람들을 돌보는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너무 바빠서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제자들이 쉬어야 하는 이유는 쉼이 제자들을 찾고 살리기 때문이다.

적절한 쉼의 부족은 가족을 파괴하고 영혼을 망친다. 쉬지 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쉼이 없는 하루의 일과는 즐거움이 없다. 쉼이 없으면 아무리 즐거운 일도 지루해진다. 쉼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살필 수 있다.

쉼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6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던 날은 쉬셨다. 쉬는 동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방법을 우리가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쉼은 단순한 육신의 쉼만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쉼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 보이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경주

믿음의 경주
히브리서 12장 1절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경마장에 가면 사람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말을 향하여 열광을 한다. 말이 아무리 열심히 달리고 있더라도 사람들은 응원하는 말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말이 달리는 곳에 그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우리에게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의 신뢰하기 때문에 경주를 계속한다. 사도 바울도 경주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주를 멈춘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주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경주를 멈추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나 물건들을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빛이 빛추면 어둠은 물러난다. 선이 넘치면 악은 사라진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면 믿음의 경주를 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에게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주를 멈추게 된다.

우리가 경주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령님이 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요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들은 의무감으로 경주에 임하게 되는 무거운 마음과 경주에 방해가 되는 외적인 장식들, 예를들면 무거운 신발 혹은 경주에 맞지 않는 옷들이다.

믿음의 경주는 억지로 하지 않고 기쁨 마음으로 한다. 경주는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고 한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경주는 죄를 회개하면서 달려야 한다. 경주를 할 때 계속되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우리에게 기쁨 마음이 있는가? 우리에게 맞는 독특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면서 살고 있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

돌아온 평안

돌아온 평안
시편 116편 7절

시편 116편 7절,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성경은 우리에게 평안함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평안이 어떻게 우리에게 돌아오는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평안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묻는다. 영국의 유명한 변증학자 루이스(C.S Lewis)는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무시할 수 있지만 그 어디에서든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신 채 안 다니시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우리는 평안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묻혀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순간을 찾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의 수사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하나님 임재의 연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쉬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하나님의 습관적이고 조용하고, 비밀스런 대화를 하면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계속 거한다. 이런 일은 종종 내 안에 기쁨과 환희를 불러일으키며, 때로는 외적으로도 그렇다. 그 기쁨은 너무도 커서, 그것을 완화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도를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생활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인식한다면 평안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의식적으로 해야 평안으로 돌아간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평안이 우리 영혼에 깃든다.

반추(Reflection)

반추(Reflection)
여호수아 1장 8절

여호수아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한다. 묵상을 할 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반추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반추를 개가 뼈를 놓지 않고 계속해서 핥아 먹는 것으로 비유한다. 반추란 소나 염소가 삼킨 음식을 다시 꺼내어 씹는 되새김질함을 말한다. 소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과 혀를 움직여 무엇을 계속해서 씹고 있다. 이와 같이 말씀을 계속해서 되새김질을 하면 반추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반추를 하는가? 말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반추를 한다. 오늘 말씀으로 예를 들면 “우리에게 율법책이란 무엇인가?” “율법책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율법책을 언제 들어야 하는가?”라고 ‘율법책’에 대한 육하원칙 질문(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으로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반추 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율법책뿐만 아니라 ‘입,’ ‘주야,’ ‘행함’ 등의 주제를 가지고 위와 같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반추할 수 있다.

우리를 반추를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을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을 때는 우리가 욕심, 미움, 시기, 질투, 거짓 등으로 가득 차 있을 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의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 우리가 육신의 마음으로 반추를 하면 반추를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멀어지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반추를 하면 반추를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가까워진다.

우리의 영원한 모습

우리의 영원한 모습
고린도후서 4장 18절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오늘 말씀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한 영광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함께한 그의 동역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은 보이는 않는 영원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고난을 이기려면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가? 물론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무릎을 꿇을 때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하여Adele Ahlberg Calhoun는“영성훈련 핸드북”에서 기록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쉬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하나님께 표현하라. 예수님 품에 기대거나,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아래 있거나, 예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성경의 사람들을 상상해보고, 그들과 같이 예수님을 찾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라. 둘째, 두 발은 바닥에 놓고 두손은 무릎에 얹은 채로 편안하게 앉아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긴장을 풀라. 의식적으로 우리를 예수님 임재 가운데 두라. 셋째, 우리가 겪고 있는 근심과 염려, 고난을 예수님께 올려 드린다는 표현으로 우리의 손바닥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려 놓으라.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받고 들으라.

고난을 넘어가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여야 한다. 육신의 눈이 세상을 보게 하듯이, 영의 눈은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게 한다. 절박한 심정이 감겨 있던 영의 눈을 뜨게 한다. 영의 눈이 뜨이면 우리가 당하는 육신의 고난은 보이지 않고, 고난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영원한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찾는 교회

하나님이 찾는 교회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그리스도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몰랐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여도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다. 가롯유다도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다녔지만, 예수님은 가롯유다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쫓았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모른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쫓은 그들의 동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열심으로 예수님을 쫓았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을 나타내거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주신 지위, 능력과 권능으로 그들은 예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그들이 예수님 대신 차지하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교회를 찾고 있다.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교회는 에베소서 5장 9절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교회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는 성도가 모인 교회이다.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교회를 하나님도 찾고 계시다.

책임의 한계

책임의 한계
누가복음 9장 5절

누가복음 9장 5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을 때 어떤 행동하고,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미련없이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그들로부터 떠날 때는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까지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한 일이 아무런 결과가 없을 때 우리가 헛된 일을 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세상에 씨를 뿌렸는데 씨가 나지 않고, 열매가 맺지 않을 수 있다. 뿌린 씨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뿌린 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뿌린 씨가 열매가 없다고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할 책임은 있다. 그러나 순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순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이 져야 할 책임을 우리가 지고 살아갈 때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분까지 책임지려는 마음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다.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더 많은 책임을 우리가 우리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을 때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을 때
-용 혜원-

오 주님!
부족하고 나약할 때만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원합니다
늘 서툰 몸짓이지만 주님의 인도하심과
기쁨과 즐거움 속에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삶에 용기가 넘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가슴속으로부터 행복한 웃음이 터져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웃는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 화목을 주고
평안을 주고, 축복을 주고, 자신감을 줍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신 기회를 마음껏 활용하여
멋진 승부에서 이겨
환호를 지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그동안의 실패와 다시 마주쳐도
두려움 없이 똑바로 응시하여 넘어뜨리고
주님께 감사 기도 드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