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안식일
출애굽기 20장 10절

출애굽기 20장 10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은 다른 날들과 다른 날이라고 선포하신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지만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그 날에 안식하셨다고 창세기 1장에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세기 2장 3절은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고 여호와의 안식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일’이란 복이 있는 거룩한 날이고, 모든 창조가 마친 날이고, 안식하는 날이다.

마태복음 12장 8절에게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라고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다.

안식일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하던 일을 멈추는 날이다. 하던 일을 멈추면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쉬지 않으면 지치고, 힘들게 되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되고 거룩한 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안식일을 주셨기 때문이다. 위 모든 특권들은 안식일에 우리가 우리를 위한 일들을 멈출 때 주어지게 된다.

가난한 마음

가난한 마음
누가복음 4장 18절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에 가셔서 읽으신 말씀이 오늘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61장 1절의 말씀이다. 이사야서의 말씀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면서 성령이 임재하는 이유를 설명하셨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신 이유는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셨고, 그분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성취할 ‘메시아’임을 나사렛 사람들에게 알리셨다. 예수님이 이사야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나사렛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들을 로마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열방의 임금이 되어 그들은 열방을 다스리는 임금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들어 풍성한 마음을 갖게 하고, 영을 보지 못한 장님들이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게하며,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메시아”라는 메시야의 참모습을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가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면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도 풍성함을 누릴 수도 없다. 가난한 마음이란 육신적인 고통과 아픔에서 온다. 우리가 육신적인 고통을 통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메시아를 간절히 찾는 마음이 있어야 메시아를 만나서, 우리가 풍성해진다.

삶의 규칙

삶의 규칙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매주일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한다. 예배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다. 매주일 예배에서 받은 은혜로 다시 세상에 나가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산다. 예배는 한 주일동안 말씀으로 산 그리스도인의 증인들이 다시 모여서 하나님 안에서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적 예배란 ‘거룩한 산제사’를 의미한다. 거룩한 산제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당당하게 지성소에 들어가 사는 삶을 거룩한 산제사라고 말씀하신다. 즉 거룩한 산 제사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죄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죄에서 자유로워진 몸에 성령께서 임재한 몸이 되면, 그 몸이 성전이 되고, 몸이 성전이 된 그들의 삶은 거룩한 산제사가 된다.

거룩한 산제사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규칙이 필요하다. 그 규칙들은 우리가 무심코 빠질 수 있는 미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삶의 규칙이란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나누는 일이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열망을 지키는 규칙이다. 다시말하면 삶의 규칙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루는 규칙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부엌이나 직장에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삶 속에서 우리에게 험한 일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잘못을 용서받는다. 이러한 일들이 삶의 규칙이 반복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빌립보서 2장 5절~8절

빌립보서 2장 5절~8절,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음이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요즘은 자기 광고(P.R)시대이기 때문에 자기를 들어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모습을 크게 과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도,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여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내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으로 되신 마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이다.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죄인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낮추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따르라고 강요하게 된다.

다윗의 노래

다윗의 노래
-시편 41편-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최소한 삼십 배

최소한 삼십 배
마가복음 4장 20절

마가복음 4장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결실을 맺기 위하여 좋은 씨가 좋은 땅에 뿌려져야 한다. 좋은 씨란 교회의 전통이나 사람들이 만든 교리가 아닌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좋은 땅이란 진리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사는 신자들을 말한다. 즉 마음과 생활이 같은 투명한 신자들을 말한다.

세상은 거짓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래서 속마음과 행동을 다르게 행동하여야 세상에서 살아 남는다고 세상은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속마음과 행동이 같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서 같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땅에서는 삼십 배의 결실을 어떤 땅에서는 육십 배의 결실을 어떤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결실의 형태를 맺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땅이라도 땅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따라 다른 결실을 맺게 된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마음이 좋은 땅이라면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소망을 우리가 갖게 한다.

교회가는 이유

교회를 가는 이유
요한복음 3장 3절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한 첫 번째 말씀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이였다. 이 말을 들을 때 니고데모는 늙었기 때문에, 늙은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날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0장에 말씀에 의하면 우리 마음은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해졌고, 우리의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겨졌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물로 몸이 거듭난다면, 성령으로 영이 거듭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가 영혼육이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영혼육이 새로워지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어쩔수 없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보상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다.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오직 평안과 내적 안정을 이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를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요에 의해서, 보상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하여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교회를 가는지, 우리가 교회를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자.

은혜와 책임

은혜와 책임
요한복음 20장 1절

요한복음 20장 1절,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 옮겨진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에서 7계명을 상습적으로 어긴 여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귀신을 쫓아낸 여인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여인이기도 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 때 사탄에 붙잡힌 삶을 살았다. 예수님을 만나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여인이었다. 구원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사탄에 붙잡힌 삶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장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였고, 빚진 마음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예수님께 빚진자라는 마음이 있으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믿음과 받은 은혜를 냉정하게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참여하지도, 베풀지도, 사람에게 전하지도, 고통을 받으려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와 그에 따른 책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J.C 라엘은 대답한다.

우리가 은혜를 알려면 우리 죄악의 깊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책임을 지려면 빚진자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한만큼 은혜를 기억하게 된다. 우리가 연약한만큼 빚진자의 심정이 된다. 은혜를 기억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빚진자의 심정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우리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

서로 사랑
요한복음 13장 34절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가롯 유다가 떠나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곧 제자를 떠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신 후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서로 사랑하라를 ‘새 계명’이라고 말한 이유는 다른 명령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으며, 가장 수준 높은 삶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예수님을 팔아 버린 거짓 제자(가롯 유다)가 떠난 후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무엇을 뜻하는가? 거짓 제자와 참 제자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교회에서도 거짓과 진짜 성도가 섞여 있다. 우리는 거짓 성도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열매를 보면 거짓인지 알 수 있다. 참 성도는 거짓 성도들을 권면하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 성도는 거짓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대에 오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긍휼과 공의가 함께 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긍휼만 강조해서 은혜만으로 거짓을 덮는다면 더 이상 교회는 주님의 몸이 아니라 세상의 몸이 되어간다. 반대로 공의만 강조한다면 교회는 싸움터가 될 것이다. 물론 책망이나 권면은 비판이나 교만이 아닌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비판이나 교만이 동기가 되어 권면을 한다면 교회는 서로에게 창을 겨누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의 동기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긍휼과 공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