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2015년 9월 13일
- 제목: 살아 있는 믿음
- 본문: 야고보서 2장 14절~24절
- 설교: 진영정 목사
Author: Young-Chung Jin
삶의 규칙
삶의 규칙
사도행전 2장 42절
사도행전 2장 42절, “그들이 사도로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영성훈련을 하기 위하여 삶의 규칙을 정한다. 영성훈련의 규칙은 “영적인 예배”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초대교회의 삶의 규칙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는 삶의 규칙이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였고, 함께 모였을 때에는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성만찬을 하였고, 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삶의 규칙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영성훈련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한다. 영성훈련은 스스로 삶의 리듬과 지침을 정하는 삶을 살게 한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하면 할수록 노력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영성훈련은 의도적으로 삼위일체의 임재에 초점을 맞추어, 성령이 임재함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게 한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모든 일을 일일이 목록으로 작성하여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정하는 틀에 박힌 삶을 사는 훈련을 말하지 않는다.
삶의 규칙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열망대로 우리가 살게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더 엄격한 사람이,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더 유연한 사람이 된다.
영성훈련을 위한 우리만의 삶의 규칙을 정하자. 그 규칙이 우리에 생명을 주고, 더 큰 자유를 누리게 한다면 옳바른 삶의 규칙이다. 그러나 그 규칙이 우리에게 부담이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 규칙을 우리가 강요하고 있다면 수정해야 할 규칙이다.
생명의 줄
생명의 줄
히브리서 10장 19절~20절
히브리서 10장 19절~20절,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이란 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서 빙둘러치는 장막을 말한다. 예수님을 살아 있는 휘장으로 히브리서는 비유한다. 지성소로 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었는데 예수님이 피뿌린 피로 인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지성소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무엇이가?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를 드렸다.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성소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히10:22) 세 가지이다. 첫째, 믿음의 확신으로 진실한 마음이 되었고, 또한 악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깨끗하여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물로 씻겨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야 안전하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휘장을 걷고 들어가야 한다. 휘장을 걷고 들어간다는 뜻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줄을 잡고 그 줄을 다시 하나님께 던져는 반응을 해야 한다. 우리가 줄을 다시 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줄을 다시 하나님께 던질 때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산모와 태아가 탯줄로 연결되어 산모의 생명을 태아에게 전해주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줄을 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감사의 이유
감사의 이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향하신 뜻대로 사는 삶은 영성을 형성하게 된다. 영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이 ‘감사’이다. 감사는 모든 인생의 조각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 병들어 고통을 받았던 시기, 기쁘고 즐거웠던 시기, 축복의 시간 등, 이 모든 일들은 감사의 실로 연결이 된다.
특히 예수님은 감사를 잘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호산나’하면서 맞이할 때에도 예수님은 늘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감사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이 감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환경과 사람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해석으로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도,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 수도 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일이 완벽하게 풀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영성훈련의 시작
영성훈련의 시작
창세기 22장 14절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려면 갖추어질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믿음의 갈등을 넘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심정을 생각해 보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신 심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슷한 모습 같으나 죽이려하는 근본 동기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때문에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때문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는가?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성숙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받칠 수 있었던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이다(King James 참조: I know that thou(You) fearest God). 두려워한다는 뜻은 글자 그대로 위대한 하나님 앞에 무서워 떤다는 뜻이다.
우리가 귀신을 두려워하면 귀신을 보고 떤다. 귀신을 보고 떠는 이유는 귀신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갈까봐 두려워한다. 우리가 돈을 두려워하면 돈이 없어질까봐 떤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사라질까봐 떤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자 이삭을 잃게되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잃게되는 두려움이 더 컸기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생명이라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나 존재 앞에서 떤다. 만약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나 권력이라면 돈과 권력을 빼앗아 버리는 것들이나 존재 앞에서 떤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게 되는 생각이나 마음 혹은 행동을 피하게 될 것이다. 영성훈련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커피
커피
-윤 보영-
커피에
설탕을 넣고
크림을 넣었는데
맛이 싱겁네요
아 –
그대 생각을 빠트렸네요.
찬양의 능력
찬양의 능력
예레미야 애가 3장 20절~22절
예레미야 애가 3장 20절~22절, “20절: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절: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가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낙심을 소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높이는 능력을 키워준다. 찬양은 일이 잘 풀리거나 기분이 좋을때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찬양은 가능하다. 죽을 위험이 있는 감옥에서 있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감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이 매인 것이 다 벗겨진지라(행16:26-27).
찬양은 바울을 묶은 환경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오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찬양하였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깊은 신음 속에서 기도하였던 예레미야는 자기를 묶고 있는 환경의 사슬을 풀어 줄 수 있는 능력은 찬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낙심할 일이 많이 있다. 낙심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맥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찬양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 소리를 듣고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찬양이 우리의 극한 상황의 묶임을 풀어 줄 수 있는데 우리가 찬양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찬양의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극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찬양드렸던 다윗을 보라. 다윗은 찬양을 드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왜냐하면 다윗이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극한 상황 속에서 다윗을 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잠잠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태풍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우리에게 태풍의 눈이 주는 고요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이는 태풍이 불 때 태풍 밖에는 모든 환경을 부서트리고 있지만, 태풍의 눈은 가장 잠잠하고, 평안한 자연의 이치와 비슷하다.
하나님 경험하기
하나님 경험하기
스바냐 3장 17절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체스턴(G.K, Chesterton)은 영원한 남자(The everlasting ma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사람이 기도할 수 없게 된다면 입에 재갈 물린 느낌이 들 것이며, 만약 사람이 무릎을 꿇지 못하게 된다면 마치 발에 차꼬가 채인 사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궁극적인 가치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가치를 찾아 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이 돈, 성공, 명예, 신조, 대의 등에서 찾아 자신의 궁극적인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가치를 채우려 한다. 자신을 벗어나 갈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령으로 채우려 한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거룩하시고, 사랑의 영이시다. 거룩한 사랑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질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에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하나님만을 찾아 갈망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한다. 어린 아이가 오직 젖을 찾아 헤매는 것 같이 그러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멍에
나의 멍에
마태복음 11장 30절
마태복음 11장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예수님께로 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온 자들은 모두 쉼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cf: 마11:29).” 예수님에게 다가 온 사람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란 무엇인가? 멍에란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꺽기 모양의 막대를 말한다. 예수님과 나를 함께 묶은 막대기가 멍에이다. 멍에는 예수님과 나를 함께하게 하는 장치이다. 같은 멍에를 메면, 우리가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뒤에 있으면 찢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뒤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뒤에 있게 되고, 욕심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멍에는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열정으로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지게한다.
우리가 믿음과 열정을 가지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함께 조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성훈련은 운동선수들이 운동을 잘하기 위하여 몸을 단련하는 훈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게 되는 훈련이 영성훈련다. 영성훈련은 우리를 높이거나, 멋있어 보이게 하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환경을 넘어 서기
환경을 넘어 서기
사도행전 2장 42절
사도행전 2장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알려는 열망이 있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가 가까이하려 하자 환경은 어려워졌고, 외부의 박해도 심해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15:17-18). 초대교회가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도움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초대교회가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가? 초대교회가 필요한 도움은 영성훈련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교회가 어려움을 직면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 방법을 가르쳐준다.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훈련 방법은 긍휼훈련(행3장), 증거와 중보 그리고 분리 훈련(행4장), 섬김훈련(행7장),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리는 훈련(행3:1; 10:9), 금식훈련(행14:23), 분별훈련(행15장)이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성인이라고 불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을 위하여 자신을 훈련했음을 알 수 있다. 각 성인들 마다 각자의 훈련 방법이 있다. 처음에 그들에게 영성훈련으로 많은 부담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자유를 느꼈다. 왜냐하면 영성훈련은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을 맛본 성인들은 자기를 구속하고 있던 많은 부분들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에게 영성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환경의 어려움과 유혹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위함이다. 어려운 환경과 고통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환경을 움직여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깊은 사랑과 자유를 주고 싶어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