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나 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진영정 목사의 블로그
풀꽃
-나 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깨지는 아픔
마태복음 15장 8절~9절
마태복음 15장 8절~9절, “ 8절: 이 백성들은 입술로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그들은 영성훈련을 한다. 영성훈련에는 기도, 묵상, 예배, 청지기의 삶, 교제, 섬김, 성경공부들이 있다. 이러한 영성훈련을 아무리해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리드도인들을 변화하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분은 그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바울은 사람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사람의 명령과 가르침 혹은 훈련)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2:23).”
예수님도 스스로 영적이 수준이 높다고 말하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질책하신다.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느냐?” 그들은 자기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기의 습관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으로 하나님을 따르려 한다면 그러한 방법은 사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과 습관이 깨어져야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뜻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생각은 점점 굳어가고, 같은 행동과 습관을 고집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성은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 말, 행동, 습관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에 반응한다면 자기가 깨어지게 된다. 우리에게 자기가 깨지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한 발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달라진 모습
마가복음 5장 18절~19절
마가복음 5장 18절~19절, “1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에 들려서 무덤을 헤매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정신이 온전해졌다. 마귀에 사로잡혔던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그의 가정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들에게 알게 하라(막5:19).”
예수님이 그의 청함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그는 귀신들린 사람으로 살았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려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그를 낫게 해주셨는지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와 함께 할 것이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인생도 달라질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는지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그를 놀랍게 여겼다(막5:20).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힘이 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등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들은 더 이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문제들은 해결되고, 우리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가족과 친구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어한다.
지금 구하는 것
마태복음 20장 32절~33절
마태복음 20장 32절~33절,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절: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애들 알버그 칼훈(Adele Ahlberg Calhoun)의 영성훈련 핸드북(Spiritual Discipline Handbook) 서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한 질문들이 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정말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긴 하나요?” “그렇게 성경을 읽는데도 왜 얻는 게 하나도 없죠?” “성경을 읽으면 남편이 언어 폭력을 쓸 때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는 영원한가요?” “내가 기도할 시간도 없이 바쁘다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이 한 질문들의 요점은 정신없이 바쁘고, 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이 삶에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힐링(healing)할 수 있느냐는 질문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야 삶의 상처가 아물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느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계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면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상처 받은 삶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힐링(healing)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지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쉬게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주님의 사랑과 힐링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과 쉼을 얻으려면 우리의 간절한 원함이 있어야한다. 오늘 말씀에서 나온 여리고 성에 있던 두 맹인들이 눈을 뜬 이유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가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눈을 뜨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얻으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우리가 그 분의 힐링을 얻게 된다. 우리가 지금 간절히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 알기
요한복음6장 44절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고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인간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고 계신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찾고 계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우리는 세 단계의 반응을 거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드려야 한다. 셋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까지 기다린다. 즉 믿음, 순종, 인내가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 삶에 하나님 사랑이 넘치게 한다.
옆 자리
-효림-
향기를 따라 왔겠지
나비 한 마리
꽃 위에 앉았다 가고
내 옆 빈 자리에
그대가 앉았다 간 뒤에
자꾸 그대의 마음이
내 안에서 자란다.
부름의 반응
창세기 3장 9절
창세기 3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첫 남자와 첫 여자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에베소서 1장 4절에 그 답이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을 받으려고 창조되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다. 아담은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죄였다.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하나님의 찾으심을 한번 느껴보자. 무엇이 느껴지는가? 자녀를 잃은 부모의 부르짖음이 느껴진다.
주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지금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애타게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애타게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신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과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을 지키는 것은 사랑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관계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찾고 계실 때 우리가 아담처럼 숨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간다면 주님과 만나 그 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려면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부름에 대한 반응이 주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다.
사랑의 여정
마태복음 6장 6절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말해야 한다. 그러면 기도 속에 담겨진 수많은 비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욕망, 의심, 근심, 두려움과 열등감 등은 우리의 기도를 막는다. 기도를 가로막는 것들은 마음의 평정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는 기도를 가로막는 것들을 넘어서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기도의 방해꾼들을 넘는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첫째, 방해꾼을 넘어서는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으로 구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을 넘어서 기도할 수 있다. 둘째,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여야 방해꾼들을 넘어서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이 평정을 유지하려면, 우리가 가진 잡념들이 사라져야 한다. 잡념이 생기면 잡념을 없애려고 애쓰지말고, 잡념이 지나가도록 한다. 잡념이 지나가면 고요한 마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셋째, 우리는 육신적인 기도 혹은 영적이지 않는 기도를 넘어야 한다. 기도는 영적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 영적인 마음은 영의 소리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지 않고, 영적인 소리에 응답하신다. 우리가 영적인 소리를 내어 주님께 말한다면 주님은 대답하신다.
우리가 영적인 마음을 어떻게 주님께 표현하는가?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 마음을 주님께 향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마음을 주님께 표현할 수 있다. 주님께 마음을 향한다는 뜻은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영적인 마음을 주님께 표현하면, 우리는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