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다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결코 지지 않는 빛

결코 지지 않는 빛
사무엘하 7장 27절, 29절

사무엘하 7장 27절, 29절, “27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9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기도한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귀를 여시고 들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을 이루셨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약속을 붙들었다. 어떤 때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였고, 어떤 때에는 그 약속은 거짓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자, 다윗은 주님을 찬양한다;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7:22).”

랜슬롯 앤드류스(Lancelot Andrews)는 영국에서 역사상 유명한 인물로 추앙이 된다. 앤드류스는 엘리(Ely), 윈체스터(Winchester), 치체스터(Chichester)의 감독을 역임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황실 목사로, 그리고 나중엔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과의 논쟁에서 제임스 1세를 위한 변증가로 활동하였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이루어지자 주님을 결코 지지 않는 빛으로 찬양하였다. 그의 저서 “개인적 경건 생활”에서 그는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따사로운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하늘에서 찾아왔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빛으로 지으신 창조주시요 세상을 밝히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신 분은 바로 주 하나님이십니다. (중략)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신 주님, 우리에게서 그 은사를 거두어 가지 마소서. 주님의 은사를 구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그것이 새롭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우리는 주님을 결코 지지 않는 빛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그 빛을 끝까지 붙잡는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을 빛으로 몰아낸다. 그러면 어두웠던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빛이 비추어지면 어둠은 물러가기 때문이다.

기도의 최고 형태

기도의 최고 형태
시편 8편 4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돌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 할 때 세상을 사랑해서 구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하는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기도한다.

노르위치 줄리안(Julian of Norwich)는 14세기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신비주의자이다. 그녀는 노르위체에서 베네딕트 교단에서 수녀로 생활했으며 성 줄리안 교회 옆에서 살았다. 그녀의 저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서 그녀의 경험을 기술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싶어서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그녀에게 세 가지 계시를 하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 육체의 질병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하여 세 가지를 기도로 구했다. 마침내 기도의 응답이 있어서 그녀가 죽을 병에 걸리게 되었다. 병상에서 누워 있있는 엿새째 날이 되던 때에 사람들은 그녀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도 죽음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를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하여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죽음을 앞에 둔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주님이 인도하였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함으로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그녀에게 흐르는 것 환상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피가 그녀에게 떨어지자, 그녀는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최고 형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최고 형태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는 마음과 태도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상황은 최고의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기도할 때 만나는 두 개의 산

기도할 때 만나는 두 개의 산
시편 39편 12절~13절

시편 39편 12절~13절,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하는데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기도하는데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의 태도를 살펴 보아야 한다. 묵상은 기도의 태도를 살펴보는 잣대이다. 묵상하는 태도를 살피면 기도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묵상할 때 우리는 방법이나 체계를 찾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태도와 조망을 계발해야 한다. 믿음, 열린 마음, 주의 집중, 경외심, 기대감, 간구, 신뢰, 기쁨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도하는 바른 태도가 무엇인가? 겸손과 회개이다. 토마스 머튼은 기도하는 태도는 배워야 하고,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른 기도의 태도를 갖기 위하여 넘어야 할 두 개의 산이 있다. 토마스 머튼은 두 개의 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기도의 방향이 하나님 뜻에 맞추어져 있는지에 대한 배움과 훈련, 다른 하나는 마음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찾고 버리는 노력과 훈련이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의 인격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죄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도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는 훈련과 배움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평생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대화법이 기도이기도 하다.

마음의 욕망과 우리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우리가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을 버리기 위하여 자기 확신과 만족을 버리는 배움이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듣는 훈련이고, 또한 인간의 욕망을 버리기 위한 노력이다.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의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의지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따르면 따라오는 현상이 육체의 고난이다. 육체의 고난을 받는 이유는 고난을 받고 난 후에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비수로 찌르는듯한 고통을 참아 내야하고, 많은 생각이 그들을 번민하게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이 쇠약해지고 곤고해져서 풀이 죽더라도, 그래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지나게 되는 이유는 그래야 그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내려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뉘지 않는 의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페넬롱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유순한 의지는 부족하다고 구하거나 싫다고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망설이지 않고 행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의지를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잘되며 아무리 무의미한 오락거리라도 선한 일로 바뀌게 된다.”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는 우리가 더 이상 정욕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악한 마음과 말을 정화하게 한다.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는 우리를 냉담하고 야비한 세상의 조롱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부로 인한 불행에서, 친구들의 배반과 변덕스러움에서, 원수의 속임과 함정에서 자유롭게 한다. 더 이상 나뉘지 않은 의지는 우리를 믿음 안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더욱더 만족하게 한다.

사랑의 네 단계

사랑의 네 단계
요한1서 4장 7절~8절

요한1서 4장 7절~8절,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1서 8절 후반부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바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존재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자로써 합당치 않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세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버나드 끌레르보(Bernard of Clairvaux)란 지도자가 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란 글을 썼고, 그의 글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사랑의 1단계는 자기를 위해여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의 2단계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도, 사랑의 3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마지막 사랑의 4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1단계와 2단계는 아직도 자기애(自己愛: 자기를 사랑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1단계와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사랑의 2단계가 1단계보다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2단계에서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2단계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단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3단계와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3단계는 하나님과 자기가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 마지막 사랑의 4단계는 거룩한 연합에 있는 ‘성자’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온전한 연합을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비운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다. 즉 4단계의 사랑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보여드린 사랑과 비슷하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버나드 끌레르보는 사랑의 4단계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4단계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사랑의 3단계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랑의 3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

어두운 밤
시편 42편 1절

시편42편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영적인 순례를 하다보면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된다. ‘어두운 밤’이란 신자가 경건 생활에서 경험했던 모든 기쁨을 다 잃어 버리는 때를 말한다. 신자가 어두운 밤을 지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차원 높은 영적 성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어두운 밤’을 지나서 신자도 모르게 자란 은밀한 교만, 감정 중심의 삶 그리고 잘못된 연약함을 뽑기 위함이다.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지난다. 지나친 영적 활동과 열심은 자신도 모르게 ‘은밀한 교만’을 쌓아가게 된다. 신앙적 활동과 열심으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착각이 ‘은밀한 교만’을 만든다. ‘교만’은 신앙적 활동과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다. 신앙적 열심과 노력이 그들을 더 경건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마귀는 경건을 향한 열정에 불을 붙이고, 불이 붙을수록 그들은 더 교만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심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존중을 받기 위해서 영적활동이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알아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또한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참지 못한다.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잘못을 없고, 상대방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혹 자신의 잘못을 알더라도 숨기고 고백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감정을 중시하는 신앙태도를 바꾸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지난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신자들은 경건 생활에서 얻는 감정에 집착하게 된다. 주님이 임재할 때 느끼는 뜨거움,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흘리는 눈물 등에서 느끼는 감정에 집착하고, 그러한 감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외적인 경험이나 내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감정으로 느낄 수 없는 초월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으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연약함를 정화시키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지난다. 기도를 깊이 하는 사람들도 죄의 유혹을 경험하게 되고, 그들은 육신의 유혹을 막을 힘이 없다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연약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강하다. 우리를 연약하게 하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영적인 일을 할 때 육신이 얻는 쾌락이 우리를 연약하게 한다. 쾌락에 중독되면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둘째로 마귀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든다. 마지막 원인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연약하게 만든다. 연약하다는 생각은 더 연약하게 만들고, 불순한 존재나 악이 우리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면 과도한 두려움이 생긴다. 과도한 두려움은 우리를 계속해서 연약한 존재로 남아 있게 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함으로 바꾸지 않으면 악한 세력은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한다. 연약함을 잠재우게 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의 포도나무 가지에 남아 있어야 한다.

어두운 밤은 은밀한 교만,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 연약함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정화시켜 준다. 우리가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육체는 침묵하게 되고, 마귀는 잠잠해지며, 과도한 두려움은 가라 앉게 된다.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 “성 요한, 어둔 밤,” p6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