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을 어떻게 새롭게 하지?

심령을 어떻게 새롭게 하지?
에베소서 4장 23절

에베소서 4장 23절,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신자들에게 명하는 행위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되면 반드시 따라야 할 행동이다. 우리에게 명하신 행동은 두 가지이다. 즉 유혹의 욕심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한다(엡4:22-23).

첫째로 ‘나를 속이는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둘째, ‘심령’을 새롭게 하라고 말한다. 욕망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은 ‘하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즉 ‘욕망’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하는 몫은 ‘하나님’이 해주지 않으시고, ‘신자’가 행하여야 한다. 행하라는 말씀 중에서 ‘욕망’은 이해할 수 있는데 ‘심령’은 이해하기 어렵다. ‘심령’은 King James Version으로 ‘mind’를 말한다. ‘mind’를 심령(心靈)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heart’와 ‘mind’이다. ‘Heart’는 신자가 새롭게 되었을 때 받은 ‘영’의 마음, 즉 성령이 주시는 ‘의지’이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의 말씀에서 마음은 Heart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을 때 성령과 함께 하는 마음의 의지를 말한다. 즉 ‘Heart’의 마음으로 믿어야 구원에 이르지 ‘mind’의 마음으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또 다른 마음이 ‘mind’이다. 로마서 11장 20절에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에서 높은 마음은 ‘high-mind’이다. 이때 마음은 ‘육신에 따른 생각’을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심령’을 새롭게 하라는 말은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라는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호세아서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있어야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한다. 초대교회부터 교회 내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가 들어와 ‘신자’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을 가르쳐 왔다. 사도들은 교회 내에 있는 거짓 가르침이 누룩과 같이 크게 번지게 되니 조심하고, 그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라고 가르쳐왔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진 경고가 오늘날의 현대교회에서는 사랑과 은혜를 너무 강조하여 사랑과 은혜로 거짓을 품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오늘 우리가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심령’, 즉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해야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우리를 속이는 욕망을 버려야 육신의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우리의 흔적

우리의 흔적
누가복음 19장 15절

누가복음 19장 15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주님이 돌아오시면 주님은 종들을 불러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계산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러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계산할 때가 온다. 그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주인이 계산하실 때 첫째는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눅19:16)”라고 말한다. 주인은 “잘했다 칭찬하시면서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고 명한다. 둘째도 주인 앞에 나와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눅19:18)”라고 말한다. 그때 주인은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눅19:19)”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주인에게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19:20-21)”라고 말한다. 이에 주인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한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그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자에게 주라 하니(눅19:22-24).” 그때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들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눅19:25).”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19:26)”하시더라.

마지막 사람이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긴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말로 심판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인을 거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는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분의 모든 것을 다 넘겨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다(cf; 막9:23).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 말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말대로 심판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사용하고,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돈도 명예도, 지위도, 땅도 아니다. 일시적으로 사라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남겨야 한다. 우리가 남길 영원한 우리의 흔적은 무엇인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

돕는 사람이 받는 축복

돕는 사람이 받는 축복
마태복음 25장 46절

마태복음 25장 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전에 길을 가다 보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 팻말을 들고 전도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전도 방법을 두고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있었다. 막무가내 전도이다, 전도는 그렇게 해서는 않된다, 길가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해서 전도되는 사람들이 있겠느냐 등의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막무가내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천국에 대하여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하나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생의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벌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영벌을 받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기(마26:42-43)”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때에 주에게 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않았습니까?(마26:44)”라고 그들은 예수님께 항변하였다.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은 이유는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기(마26:35-36)”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는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마26:37-38)”라고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영벌을 받은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알고,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모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마25:46)”이기 때문이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사심(私心)없이 사람들을 도왔고, 영벌을 받은 사람은 목적(目的)을 가지고 사람들을 도왔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도울 때 무엇을 얻기 위하여 돕는지 아니면 사심 없이 돕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무엇을 얻기 위하여 돕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감사치 않거나 도움을 모른 척할 때 화가난다. 그러나 사심 없이 도운 사람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보상을 하지 않아도 화가나지 않는다.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이 채-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 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 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부드러움이 주는 행복

부드러움이 주는 행복
요한복음 18장 11절

요한복음 18장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시니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과 군대에게 붙잡이기 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지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분의 뜻을 꺽고 하나님의 뜻을 택하셨다;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우리는 우리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굳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장 18절~19절,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졌고, 그들의 명철이 어두워졌으며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자기를 방탕에 내어 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한다(King James 번역).”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부드럽게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방법은 오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쓸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예수님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적극적이라는 말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뜻과 생각을 지키고, 그 뜻과 생각대로 살면 마음은 굳어진다. 굳은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굳은 마음을 더 굳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예수님이 취하신 자세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으로써 그 분의 뜻대로 살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았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가 갖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태도를 결정하고 노력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기 시작하고 우리를 괴롭혔던 불행이 떠나기 시작한다.

평안이 올 때까지

평안이 올 때까지
요한복음 14장 27절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작년에 이 말씀을 붙잡고 1년을 살았다. 사역과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았다. 년말에 1년을 돌이켜 볼 때 산 같은 문제가 기적같이 해결이 되었고, 평강이 없을 나에게 평안은 넘쳤다. 내가 평안해 졌을 때 평강이 있으려면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음에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평안은 찾아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늘 말씀을 하셨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너희에게 근심이 나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려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고 쫓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삶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려면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의 왕이 되어야 우리에게 평강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근심이 많고, 두려운 환경 속에 있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 문제는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우리가 평안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평안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말씀을 분석하고 비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씀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평안을 주심’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안이 없음을 예수님께 고백하고 평안을 믿을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의심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온다.

그늘 아래서

그늘 아래서
요한복음 10장 14절

요한복음 10장 1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선하다’라는 말은 악한 목자가 있다는 말이다. 악한 목자는 목자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하여 일한다. 또한 악한 목자는 양의 상태를 살피지 않지만, 선한 목자는 양의 세세한 부분까지 살핀다.

양이 선한 목자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목자를 모른는 양도 있다. 선한 목자를 악한 목자로 착각하는 양도 있고, 악한 목자를 선한 목자로 알는 양도 있다. 선한 목자인지 악한 목자인지 어떻게 구별하는가? 선한 목자는 신자를 잘 알지만, 악한 목자는 그들에 대하여 아는 척한다. 악한 목자는 신자를 버리지만, 선한 목자는 목숨을 내어 놓고 그들을 지킨다. 악한 목자는 신자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선한 목자는 그들에게 유익하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있는 유대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6)”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믿지 않았다고 말씀한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물건이나 사람들, 혹은 악한 존재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뜻이다. 의지한다는 뜻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집에 물에 잠기나, 모든 것이 물에 떠내려 먹을 양식이 없어도 예수님을 의지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늘이기 때문이다. 그늘은 바람을 막고, 쉬게 하고, 새로운 활력을 준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늘 아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가 그늘 밖에 있다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늘 아래 있다면 더 큰 그늘을 기대해 보자.

등을 비추는 빛

등을 비추는 빛
요한복음 8장 12절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떤 상담가가 내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 뜻을 깊이 생각하는 구절은 아니네요”하고 대답하면서,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이고, 죽음 뒤에 부활이 있는 그 길을 설명한 것 같아요”하고 그 구절의 길에 대한 나의 해석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저는 길이란 ‘way, path’고, 즉 길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길 위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요. 그저 길(道)이죠. 저도 상담가로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저 그들과 길 위에 함께 할 뿐입니다”라고 상담가는 ‘길’에 대한 해석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빛이 필요하고 어둡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철학과 문학이 세상을 밝혀 주지 않는다. 과학과 예술이 세상을 밝혀주지 못한다. J.C 라일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헛된 빛에 관심을 갖는다. 이성과 철학, 진리와 자유, 양심과 교회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있다고 소리를 높여 외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의 말은 세상을 밝혀 준다고 모든 수단, 가치관,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빛은 생명이다. 빛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이 땅 위의 모든 식물은 빛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동물도 빛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이 땅 위에 모든 영혼에 생명이 없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영혼은 살 수 있다. 그리고 빛이 비추면 어둠은 사라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빛이 비추고 있는데도 아직도 어둠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볼 때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이유는 빛을 바라보고 서 있지 않고, 빛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이유는 빛을 바라보면 눈이 부시고 눈이 따깝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과 등을 지고 길을 가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서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등지고 서있는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빛이 우리의 등을 비추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길을 보지 못하고, 길을 찾아 헤메고 있다.

귀천

귀천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