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2015년 6월 21일
- 제목: 세 가지 변화
- 본문: 느헤미야 10장 29절~39절
- 설교: 진영정 목사
Author: Young-Chung Jin
초심
초심(初心)
요한복음 6장 15절
요한복음 6장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초심’이란 처음 마음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뜻이다. 어떤 재상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가난할 때의 옷을 장독에 묻어 두어서 마음이 흔들릴때 마다 묻어둔 옷을 보았다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시험준비를 할 때에도 처음 시험 볼 때 가진 마음을 시험을 치룰 때까지 유지한다면 시험에 합격 할 수 있다. 우리도 구원 받을 때의 ‘첫사랑’을 끝까지 간직한다면 신앙에 많은 열매가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렸다고 주님의 책망을 듣는다(계2:4). 에베소 교회에는 행위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않고, 자칭 사도라고 한 사람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을 드러내었다. 에베소 교회가 아무리 다른 모든 것들을 잘하였어도, 첫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에베소 교회의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말한다(계2:5).
오늘 말씀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을 무리들이 억지로 붙들어 그들의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아시고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셨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그들이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다.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일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초심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 아마도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지 않고 무리 가운데 계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초심을 흔들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초심을 지키기 위하여 무리를 떠나셨다. 무리를 떠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아마도 혼자서 성부 하나님과 교제하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도 구원 받을 때의 초심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의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구원 받을 때에는 대부분 힘든 삶을 살고 있었지만, 구원 받고 나서는 평강과 기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 중에 첫사랑을 지키는 것이 슬픔 중에 첫사랑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초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서 주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위하여 때로 힘든 일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예수님이 찾는 사람
예수님이 찾는 사람
요한복음 4장 6절
요한복음 4장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셔서 우물 옆에 앉으신 장면이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과 앗시리아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려때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혼혈로 태어난 자녀들이 갈 곳이 없어서 남사당패에 들어가서 그들의 후손이 조선사회에서 무시를 당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천시여겼던 사마리아로 가셨다. 사마리아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여인을 만나러 가셨다. 예수님이 만난 여인은 사마리아에서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여인이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육체적인 피로를 견디시고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피곤을 느끼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과정을 겪으셨다. 어린 아이로 오셔서 소년으로 성장하셨고,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과 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때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지만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으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면 세상사람의 부러움을 살지는 몰라도 예수님이 그들의 옆에 계실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두 렌즈
두 렌즈
누가복음 22장 70절
누가복음 22장 70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자기를 돌아볼 때 갖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이 땅에서 나의 존재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려운 삶을 만나더라도 그는 즐거워하고 보람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의 삶이 행복해 보여도 그는 늘 불안해하고 삶이 공허하여 배고픈 늑대처럼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이스라엘 장로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다”라고 대답하였다. J.C 라일은 번역 과정에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이 대답은 번역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었다. ‘주님은 네가 옳게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장로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로 예수님을 알 뿐이었지 가슴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가슴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물들여져 있어 편견으로 가득차 있었고, 세상 욕심 때문에 그들의 판단은 뒤틀려 있었다. 편견과 판단은 그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흐리게 하였다. 또한 그들이 가진 편견과 판단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써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영적인 지도자’였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무법자’가 되었다.
앞에 던진 화두로 돌아가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잘못된 편견은 자기가 자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잘못된 판단은 자신이 경험한 삶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이 자란 가정과 경험이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만드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죄로 물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에 가득찬 죄의 렌즈를 통하여 자기를 판단하고, 경험하기 때문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면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 마음으로 깨달아져야 한다. 그러면 마음에 계신 예수님이 예수님의 렌즈를 통하여 자기를 바라보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면 우리 마음에 가득찬 죄의 렌즈로 우리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사랑의 렌즈를 통하여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시민과 노예
시민과 노예
누가복음 2장 21절
누가복음 2장 21절,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이름대로 산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이는 불리고 듣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매일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듣고 사는가? 세상은 인간이 말한대로 이루어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뜻은 ‘구세주’로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다른 이름을 선택하실 수 있으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심판관’이나 ‘재판관’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더라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이름대로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아 이 땅에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다. 영국의 복음주의자 J.C 라일은 구세주라는 이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만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라! 그분을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주님을 나의 친구이시며 사망 가운데 있을 때 새 생명을 주시고 갇혔을 때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 자리를 옮기었고, 사탄의 권세에서 짓눌려있던 노예가 구세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늘 시민으로 살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람, 돈과 세상의 권세에 눌려 살지 않아도 된다. 오늘 말씀은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유인인 ‘하늘 시민’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행복
행복
-나 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책임과 특권
- 날짜: 2015년 6월 14일
- 제목: 책임과 특권
- 본문: 느헤미야 9장 11절~27절
- 설교: 진영정 목사
분노와 마귀
분노와 마귀
마가복음 5장 8절
마가복음 5장 8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요즘 한국을 바라보면 사회가 분노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이 나서 사람을 죽이고, 분이 나서 물건을 부수고, 분이 나서 보복 운전을 한다. 이렇게 사회에 분노가 넘치는 이유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절망’ 때문이다 .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서 아무도 돕지 않는다. 혼자 있는 느낌이다. 열심히 살면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보상은 커녕 생활은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절망은 분노를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무기력은 ‘절망’은 낳고, 절망은 ‘분노’를 차오르게 한다.
오늘 말씀은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 살고 있는 귀신 들린 한 남자의 말씀이다. 귀신 들린 남자는 무덤에서 살면서 산에서나 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살고 있었다.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피를 흘리면서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않고, 쇠사슬로 그를 묶어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쇠사슬이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통제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를 통제하셨는가? 그를 통제하고 있는 귀신을 그에게로부터 나오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하여,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이 나가자 귀신 들린 남자는 온전해 졌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였던 귀신 들린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우리가 언제 마귀의 통제를 받는가? 우리가 자기자신만을 생각할 때 마귀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우리를 통제하려는 마귀를 쫓아내어야 한다. 우리가 마귀의 통제에 아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버리지 못할 때 마귀의 통제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욕심에 따라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진노의 자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통제하려고 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6).”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분노는 우리의 욕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이다. 감정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로 인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 않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분노를 통제하는 방법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리면 분노를 통제하게 되고, 분노를 통제하면 우리는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4:7).”
과신과 의심
과신과 의심
요한복음 20장 22절~23절
요한복음 22절~23절,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중보기도에 대한 말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에 중보기도의 단어를 사용하기를 반대한다. 디모데전서 2장 1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에서 ‘도고’가 중보기도를 말하기 때문에 중보기도에 대한 단어를 쓰기를 찬성한다.
“너희가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제자들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예수님께 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제자들이 받았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설교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씀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사람의 호감을 사는 말의 기술로 설교한다고 해서 죄가 사하여지지 않는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는 사하여진다. J.C 라일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고 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로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특권을 빼앗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구원의 진리를 숨기는 일이며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감당치 못할 자리에 앉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초가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를 과신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해서 주님을 의심해서는 않된다. 우리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에 있을 때 능치 못함이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성령과 선택
성령과 선택
요한복음 16장 13절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은혜가 있는 집회만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받은 은혜를 하루 이상 지키지 못한다. 이 삼일 지나면 집회에서 받은 은혜가 그리워서 그들은 은혜 넘치는 집회를 다시 찾게 된다. 은혜가 있는 집회에 가면 은혜가 넘치는 듯 싶더니 조금 지나면 은혜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집회를 찾아다닌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요16:7).”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내가 떠나면 앞으로는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난 후에 성령과 함께 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 사람을 쫓고 특정 사람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한다. 사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 선생과 진리의 선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거짓 선생과 진리의 선생을 구분하는가? 거짓 선생은 자기의 제자를 만든다. 그러나 진리의 선생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든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님이 주라고 부른 모임이 교회라면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부르면서 특정 사람을 쫓고 있다면 그 교회를 인도하는 분은 거짓 선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높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어떤 선택하기 전에 성령님께 묻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지, 받고 있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선택하기 전에 성령께 묻고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