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하는 증거

예수님와 함께 하는 증거
요한복음 15장 4절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늘에 상급이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일까?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간 사람의 상급이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 사람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포도나무에 있는 가지처럼 붙어 있으라 말씀하신다. 포도나도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열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에서 나타나는 거룩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지도, 큰 일을 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 큰 일을 한 사람이 상급이 크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큰 일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노력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힌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나타나는 증거가 열매이다.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증거이다. 큰 일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증거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이고 ‘자기 포기’의 열매이다.

부모

부모
-이 재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자식을 믿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자식을 믿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식이 주저 없이 믿을 만한 부모가 먼저 되는 것이다.

자존심과 기적

자존심과 기적
마가복음 8장 25절

마가복음 8장 25절,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가서 모든 것을 밝히 보이는지라.”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가시니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이 맹인에게 안수하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그를 안수하였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고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다시 안수하였고, 맹인이 주목하여 보니 모든 것이 밝히 보였다(막8:22-25).

사람들은 예수님이 맹인에게 안수하기를 원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맹인을 고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믿지 않은 사람들을 피하여 마을 밖으로 맹인과 함께 나가셨다. 마을 밖에서 예수님이 맹인에게 하신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을 뱉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을 뱉은 이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침이 약효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셨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맹인을 치료하고 계시다는 것을 맹인이 믿게 하기 위하여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셨다고 말한다. 두 가지 이유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을 뱉은 이유는 예수님이 맹인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기 위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인 눈을 감고 있을 때가 있다. 그때 감긴 영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육신에 침을 뱉으실 때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육신에 침을 뱉으면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육신의 자존심은 우리의 영이 눈을 뜨지 못하게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자존심을 죽이고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기적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 육신에 침을 뱉어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이유는 감겨있던 우리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예수님이 앞으로 우리에게 행하실 기적을 영의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자존심을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내려 놓으면 그때 우리에게 기적과 같은 일들을 영의 눈으로 보고, 영의 눈으로 기적과 같은 일들을 우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영의 눈으로 보았던 일들이 이루어진다.

자아와 죽음

자아와 믿음
요한복음 11장 6절

요한복음 11장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들이 MCAT(의과대학원 학력고사)시험이나 대학교 학점이 다 좋아도 의과대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비의과대학원(의과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한 대학원)에 들어갔다. 조카가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SAT(대학교 학력고사)성적이 월등히 좋았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둘 다 원하는 대학교나 대학원에 들어갔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셨다. 그들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예수님께 전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르다나와 마리아 자매를 사랑하신다. 그들의 오빠 나사로도 사랑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듣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나사로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는 날까지 이틀을 기다리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전갈을 들은 이틀 후 예수님은 나사로가 있는 유대로 출발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찾았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 되었다.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나사로가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의 풍속은 죽은 사람을 사흘간 땅에 묻지 않고 지켜본다. 예전에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이 아주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를 무덤에 묻는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바로 출발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린 이유는 “이는 너희를 믿게 하기 하려 함(요11:15)”이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나사로와 같이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우리 자아(self)의 죽음을 말한다.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을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을 행하신다.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믿음은 우리를 살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때로는 기적)을 보게 한다.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
누가복음 18장 27절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할 수 있느니라.”

교인을 변하게 하고, 달라지게 하는 분은 누굴까? 생각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다. 그러나 교회 리더들은 가끔 자기의 능력으로 교인이 변한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소그룹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소그룹 리더는 자신의 역량이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눅18:24-25)”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듣는 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하면서 또한 한 편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다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있다. 이런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준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맡겨준 부분에 대하여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긴 부분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은 무엇인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이라기 보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이다. 즉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땅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어떤 일의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창3:17 참조). 하나님의 하시는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 이외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가까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하실 일들에 대하여 기쁨과 감사로 기다리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세리와 의사

세리와 의사
누가복음 5장 27절

누가복음 5장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어떤 교회에 심술궂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하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심술궂다고 비난한 사람은 전에는 더 심술궂은 사람이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리를 부르셨다.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 세금을 걷는 사람인데 예수님 시대에는 가장 악하고 나쁜 사람으로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리는 선량한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나 과부나 외국인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악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른 이유를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가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고 옥한흠 목사 아들이 ‘아버지 옥한흠’이라는 책에서, 2007년 ‘평양 부흥 100주년’기념 집회의 아버지를 회고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 주시옵소서!…중략…그러나 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주여 주여 설교하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목자들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되면 우리의 죄가 더 크게 보이게 된다. 믿을수록 우리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크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의인인 이유는 그리스도때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죄가 더 크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리는 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리에게 의사는 예수님이다. 그러나 세리가 더 이상 세리가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그 세리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영광과 좌절

영광과 좌절
마가복음 9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난다(막8:31)”고 예수님께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닌지 2년이 지나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한 6일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지 2년 후에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친 이유는 무엇인가? 2년이 지나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마16:16).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죽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한 6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좌절한 제자들에게 죽음 뒤에 나타나날 예비된 영광을 세 제자들이 보여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변화산에 오르셨다.

우리는 십자가와 그에 따른 고통때문에 때로는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보다 대적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의 등에 비수를 꽂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사랑하였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소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좌절한 우리에게 소망을 찾게 하기 위한 말씀이 오늘의 말씀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좌절이 아닌 우리에게 나타날 주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