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용서

사랑과 용서
누가복음 7장 43절

누가복음 7장 43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한국의 영화 중에 ‘밀양’이 있다. ‘밀양’은 기독교인들에게 ‘용서’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었다.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나고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하였다. 주인공이 유괴범이 있는 감옥에 가서 유괴범에게 복음을 전하고 용서하려고 하였더니 유괴범은 이미 복음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유괴범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도, 용서를 받을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또한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를 하기 위하여 두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할 사람을 자기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용서 할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만약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도, 용서를 구할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으려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용서를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7:41-42)”하고 물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한다(눅7:43)”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말하셨다(눅7:43).

예수님께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옥합을 깬 여인이 예수님과 항상 있던 시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이 말씀은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더 많은 죄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죄가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죄에 대하여 깊이 통탄하고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깨달느냐, 죄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돌이켰냐에 대한 말씀이다. 작은 죄를 지었어도 그 죄에 대한 아픔이 깊고 깨달음이 크다면 더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큰 죄를 지었어도 그 죄에 대한 아픔과 깨달음이 적다면 적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다.

믿음과 죄

믿음과 죄
요한복음 6장 29절

요한복음 6장 29절, “예수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어떤 일을 이루었느냐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사람이 이룬 업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많은 일을 이룬 사람은 훌륭한 사람, 적은 일을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 또는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죄인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람을 분류한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8)”하고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6:29).”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할 때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낸 이인지 알도록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다(요6:30).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였다.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고, 만나를 먹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만나를 먹고 하루를 살았지만, 너희에게 지금 하늘의 떡을 주는데 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주여 생명의 떡을 항상 우리에게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떡을 너희가 받을 수 없다”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였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보다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성경을 보고도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보다 믿음이 먼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믿음이 먼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믿음은 선물이다. 선물은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다. 우리가 내면의 죄를 깨달을 때 주님은 마음을 움직이신다. 그때 주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살리는 믿음

살리는 믿음
누가복음 8장 45절

누가복음 8장 4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 미나이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병이 즉시 나았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 옷자락을 잡았을 때, 예수님께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혈루병을 앓은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알면서도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알면서 물은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한 여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으셨다. 떨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4:48)”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인이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예수님 뒤에서 옷자락을 만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는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몸에서 매일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어떤 여인이 유출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15:19).”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지 못하고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마음 속으로 병을 낳게 해달라고 구한 것을 예수님께서 ‘딸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의인인 이유는 ‘우리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든, 우리가 어떠한 상태이든 주님 앞에 나가서 구하는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용 해원-

오 주님!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쉴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합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때에
사랑을 좀더 많이 타서 마셔야겠습니다
모두들 어찌나 바쁘게 살아가는지
정신이 나간 사람들 같습니다
때론 아픔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단내 나도록 뛰고 또 뛰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잠시라도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밀리고 밀려서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분명한 목적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소서
희망을 찾아 희망을 만들고 희망을 이루게 해주소서

오 주님
한 잔의 커피가 메마른 삶을 촉촉이 적셔주듯이
우리들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먼지 나고 푸석푸석한 삶에
휴식이란 참으로 고마운 시간입니다
힘들고 분주한 삶에 쉼표를 찍어주는 시간입니다
우리들 삶이 욕심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 잔 가득할 때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빈 잔의 여유와 아름다움도 있듯이
날마다 나눔 속에 우리의 마음을 비우게 하소서

보이는 믿음, 숨겨진 믿음

보이는 믿음, 숨겨진 믿음
누가복음 8장 25절

누가복음 8장 25절,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에 따라 배에 올라 호수 건너 편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잠이 드셨을 때에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니’, 이에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려,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죽음 앞에 제자들은 믿음을 찾지 못했다. 광풍이 일고, 물이 배에 들어오는 순간 제자들은 죽음 앞에 서있었다. 제자들은 두려웠다. 두려움은 제자들의 믿음을 눈깜짝할 사이에 빼앗았다. 가장 믿음이 있어야 할 때에 제자들은 믿음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제자들을 꾸짖기보다는 그들의 시선이 바람과 물결에서 예수님께로 향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고 헌신된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온전한 믿음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일하게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은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어쩔줄 몰라하면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신자에게, 신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믿음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생긴다.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말씀이 던진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을 찾아 볼 때 우리는 숨겨진 믿음을 다시 보게 된다.

회복과 부패

회복과 부패
누가복음 6장 10절

누가복음 6장 10절,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더니 거기에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말씀하시고, 군중들에게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 물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하고, 그가 손을 내밀었더니 그의 손이 회복이 되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어떻게 회복이 되었는가? 첫째, 말씀을 들을 때 회복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회복은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다.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회복이 있다. 둘째, 불가능한 말씀에 순종할 때 회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실 때 손 마른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주저없이 그 말씀에 순종하면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세상에서 부패를 거스르는 회복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행하시는 기적 중 하나이다.

기도와 낙심

기도와 낙심
누가복음 18장 7절

누가복음 18장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제자들은 항상 기도가 어렵고, 기도를 하더라도 쉽게 낙심할 수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다. 신자는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하게 된다. 또한 신자가 항상 기도하더라도 낙심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들은 택한자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기도를 항상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낙심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있으니 그들은 택한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만이 기도를 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고, 택한 사람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살전13:4).

둘째, 기도하는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응답이 없으면 마음에 원망이 쌓인다. 이때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이다.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억울한 심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신다.

마지막으로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기도가 속히 응답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들의 간구이다. 또한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인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자 하시는 의지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낙심의 뜻은 ‘바라는 일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이 상한다’는 뜻이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것은 ‘기도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도하는데 낙심’하기 때문이다.

말씀과 신기루

말씀과 신기루
마가복음 11장 24절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면 구하는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기도는 어떤 방식이든 응답이 있다. 기도하고 구하면 받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때로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가 응답받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기도가 응답되려면 의심이 없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기도하면서 드는 마음은 “지금 내가 기도하는 기도가 이루어질까?”하는 의심이다. 의심은 생각으로 스쳐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이 생각으로 집을 지으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의심이 들면 주님이 누구이신지 묵상하자. 기도가 응답된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곧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요한복음1장 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말씀이고, 그분의 말씀으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둘째, 응답되는 기도는 용서한 자의 기도이다.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 용서하지 못하면 기도가 막힌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는자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받지 못한 기도는 막힌 기도이다. 막힌 기도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힌 기도는 하늘 보좌까지 그 기도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하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 마음이 악한 악인들, 그들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기도하고 구하면 용서가 된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막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신기루’가 아니라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기도가 말씀인 이유는 주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