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수치심

은혜와 수치심
누가복음 4장 28절

누가복음 4장 28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은 그가 자라신 곳인 나사렛으로 길을 옮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어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cf 사61:1).”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함께 있어도, 말씀이 은혜가 되는 사람이 있고, 말씀이 수치심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었다.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에게 이사야의 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하고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말씀하신 ‘그들은’ 다 예수님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은혜로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눅4:22).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수치심이 되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를 놀랍게 여기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하고 소리쳤다. 나사렛 사람들은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 해보라(눅4:23)”고 예수님께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이 하는 말을 먼저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만 장군’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큰 흉년의 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렙다 과부 혼자였다.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이방인 나만장군 뿐이었다.” 두 사람의 예는 나사렛 사람들을 크게 화나게 했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행위로 의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은혜로 의인이 된다는 예수님의 말은 그들의 생각을 무너뜨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그 이유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말씀이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한다면 그 이유는 말씀이 우리를 반대하여 우리가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죄로부터 온다. 우리가 수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더이상 수치심이 아닌 은혜로 다가온다.

가슴에 담아 둔 말

가슴에 담아 둔 말
요한복음 19장 39절

요한복음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3년전에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요3:3)”라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말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기 위함임을 니고데모에게 말하였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요3:4)”하고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납니까?”하고 물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인자가 들리는 이유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요3:14-15)”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가르치고 후 니고데모를 떠나셨다. 그리고 3년 뒤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십자가에 들리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자 예수님을 찾아온 두 사람이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찾아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했고,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예수님께 가져왔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죽음 앞에 예수님을 떠났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예수님을 떠났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당당하게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향품을 예수님께 뿌리고, 그를 세모포로 둘렀다(요19:20).

제자들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른 태도를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말을 잊고 있었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한 번 말한 말을 가슴에 담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가? 지금 가슴에 담아 둔 말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삶을 결정하다.

경계가 느슨해질 때

경계가 느슨해 질 때
요한복음 13장 38절

요한복음 13장 38절, “예수껫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날밤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다고 예언하셨다. 주님 말대로 베드로는 그 날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주님의 예언은 맞았고, 베드로의 주장은 틀렸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고 영적인 경계를 느슨하게 하였다.

신자들이 영적인 경계를 느슨하게 할 때는 결코 이러한 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때이다. “나는 절대로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영적인 경계를 느슨하게 한다. 그때 사탄은 어김없이 그들을 찾와서 넘어뜨린다.

어떻게 영적 경계를 강화할 수 있는가? 스스로 나약한 존재라고 고백할 때 영적인 경계가 강화된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가 곧 강할 때(고후12:10)”라고 고백을 하였다. 그는 한 가지 법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라고 그는 고백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바울은 그의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없음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였다. 바울이 나약할 때 주님을 의지하니 주님의 강함이 바울의 연약함을 덮었다.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사탄은 그 열매을 맺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열매가 풍성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영적인 경계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영적 경계를 느슨하게 할 때가 언제인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영적인 경계는 우리가 섰다고 생각할 때 느슨해진다.

문을 여는 문지기

문을 여는 문지기
요한복음 10장 3절

요한복음 10장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들은 목자와 강도를 구별해야 한다. 양들은 그들의 음성을 듣고 목자인지 강도인지를 구별한다. 또한 양들은 강도의 목소리를 들으면 도망간다.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5).”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면 양들이 목자와 강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말씀과 다른 모습이다. 양들은 목자가 아닌 강도를 따르며, 목자에게 양들이 아니라 염소들이 따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씀과 다른 모습처럼 보이는 이유는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여는 문지기가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요10:3).” 목자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문지기는 그의 제자들이다. 문지기가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어 놓아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양들이 강도를 따르게 되는 이유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 놓지 않고, 양들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자에게 종종 염소가 따를 수 있다. 왜냐하면 문지기가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문을 열어 놓은 문지기를 찾으신다. 문이란 마음의 문을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문지기, 그리스도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문지기, 그 문지기가 있어야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른다. 그 문지기가 있어야 목자에게 염소가 아닌 양들이 모인다.

나를 키우는 말-이해인

나를 키우는 말
-이 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십자가와 선입관

십자가와 선입관
누가복음 18장 34절

누가복음 18장 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저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눅18:32-33)”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말씀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는데 왜 이방인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밷음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또한 제자들이 죽은 사람이 삼 일만에 살 수 있다는 부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말씀이 그들에게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의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의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예수님이 죽음으로 사망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감추어진 이유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과 핍박’에 대한 선입관이 말씀을 거부하기때문이었다. 말씀을 거부하면 말씀이 감추어지고, 말씀이 감추어진 이유가 우리가 가진 선입관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 중에 하나가 우리가 가진 세상의 선입관을 버리는 일이다. 우리는 세상의 선입관을 하나님이 주신 생각으로 바꾸어 우리의 십자가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버려야 할 선입관은 무엇일까?

사랑과 필요

사랑과 필요
누가복음 10장 41절~42절

누가복음 10장 41절~42절, “41절: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머무르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느라 바빠졌다. 마르다는 일손이 부족하자 동생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합니다. 주께서 내 동생 마리아에게 명하사 나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말해 주세요(눅10:40)”라고 예수님께 부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자기가 좋은 일을 선택하였으니 그냥 두라. 너도 많은 일로 수고하지 말고 한 가지 일만 선택하라(눅10:41)”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많은 일로 근심하고 수고하게 된다. 세상 일들은 사람들을 바쁘게 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세상일 때문에 정신이 없게 된다. 건강, 재물, 땅과 지위, 명예 등은 소중한 일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는 있지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느라 바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바빴다. 마르다는 마르다의 일을 행하였고, 마리아는 마리아가 중요한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르다의 일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의 일을 도와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둘 다 중요한 일이고, 또한 스스로 좋은 일을 선택했으니 각자의 일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하는 일들은 그 일이 영적인 일이든, 육적인 섬김이든 모두 다 중요하다. 우리가 구별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우리의 필요때문인지, 예수님의 사랑때문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필요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일들은 영적인 일이든, 육적인 일이든 모두 세상일이 된다. 그러나 영적인 일이든, 육적인 일이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때문에 하였다면 모두 주를 위한 일이다.

다가가는 그리스도인

다가가는 그리스도인
마가복음 8장 16절

마가복음 8장 16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빵이 없음으로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근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하고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먹을 것을 걱정하였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기본적인 필요가 의식주라고 말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없으면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한다. 인간다운 삶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베풀어줄 때에 몇 바구니의 조각이 있었느냐? 내가 일곱 개의 떡으로 사천 명을 떼어 줄 때에 몇 광주리의 떡 조각이 거두었느냐?”하고 물으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하셨다.

좋은 음식은 몸을 살린다. 마찬가지로 좋은 가르침은 영혼을 살린다.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좋은 빵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빵과 헤롯의 빵을 먹으면 영혼이 병들게 된다.바리새인의 가르침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율법의 지식적 가르침이었다. 헤롯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잘살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예수님 때에 있었던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지금도 존재한다.

J.C 라일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데 유용한 지혜를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잘못된 교리에 빠질 수 있는 새신자에게 완전한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잘못된 교리를 따르는 사람으로 책망하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처럼 영적 분별력이 나중에 서서히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점점 다가가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그리스도인인가를 스스로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면 둘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있던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차 있던지 둘 중에 하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