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기도

마음의 기도
마가복음 6장 30절

마가복음 6장 30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사도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인다. 우리는 행한 것, 말한 것, 들은 것들을 주님께 말하여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보고는 매일 매일 반복되어야 한다. 주님께 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이 매일 매일 주님께 고함에 있다. 주님께 고함이 성공의 열쇠이다. 누군가 성공이 무엇인가 물은 적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복을 누리고, 복을 누리면 자연히 성공은 따라온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따라오는 부산물이 성공이다. 매일 주님께 고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다. 사람은 사람마다 존재의 목적이 다르고, 자신의 존재 목적대로 살면 성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공은 사람마다 다르며, 사람마다 자기의 색깔을 나타낼 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마다 동일한 색깔을 띠라고 강요한다. 세상의 성공은 한 색깔이고, 다른 색깔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실패자로 취급한다. 여러 색 중에서 한 색을 가져야 하니 그 색을 가지려하는 경쟁자도 많다. 그렇게 되면 그 색을 취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실패자가 된다.

주님 앞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잘 가르치는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은 아니다. 주님 앞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개인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걸작품을 만드는 힘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매일 주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이고, 기도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표현이다. 에스겔 선지자의 기도는 마른 뼈에 생기를 넣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단순이 입으로 신뢰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신뢰하는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나를 키우는 말-이해인

나를 키우는 말
-이 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 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영과 욕망

영과 욕망
마태복음 26장 41절

마태복음 26장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시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었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책하기 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을 이해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J.C. 라일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라고 엄하게 꾸짖으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예수님이 제자를 꾸짖는 마음보다 예수님이 제자를 이해하는 마음이 더 전달된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을 가지고, 두 가지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난 새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육신을 따르는 옛 마음이다. 바울도 두 가지 법으로 두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롬7:21-23).”

우리는 안에는 두가지 상반된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다: 영과 육의 싸움이고, 선과 악의 싸움이다. 예수님도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악의 유혹을 받으며, 악의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Watch and pray, that ye(you) enter not into temptation: the spirit indeed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Matt. 26:41, King James 번역).”

우리가 영의 마음을 따르기 위하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의 마음을 따르기 위하여 성령께서 인도해 주셔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지배하는 욕망이 하나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버려져야 한다.

먼저 살펴야 할 일

먼저 살펴야 할 일
마태복음 20장 21절

마태복음 20장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네팔에 진도 7.8의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지진이나 스나미가 오면 세상의 끝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도 지진은 많이 있었어도 어디에 지진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메스컴이 발달이 되어서 지진이 일어난 곳을 바로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지진이 있다고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지진을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13:8). 재난이 시작이 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막13:5)”이다.
주님은 지진이나 기근보다 사람에게 미혹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교회 내에서 미혹하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니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2:7).”

우리는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듣는다. 그때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을 생각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베대의 여인과 두 아들과 같은 욕망이 있다. J.C. 라일은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죄를 미워할 만큼 중분한 지식과 믿음이 있지만, 불행이도 그들은 많은 기독교의 진리에 무지할 따름이다. 무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많은 실수를 범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까닭에 내면적인 사고와 시각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좁은 지식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굳어진 사고와 시각으로 마음이 좁아지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매일 매일 살펴야 한다.

마음의 평강

마음의 평강
요한복음 12장 27절

요한복음 12장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심정을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심정이 괴롭다는 표현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어떤 분은 앞으로 지실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여 설명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 담대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모습과 비교해 보면 적합한 해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두 번째 해석은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지셨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우셨다는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기도한 이유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죄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어쩔줄 모른다. 그러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지셨다면 그분이 감당해야 할 고통과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된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지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믿음으로 우리는 의의 옷을 입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우리가 의의 옷을 입은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서 겪으셨던 괴로움과 고통을 통하여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다른 증거는 우리에게 찾아온 평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평강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해결하였다는 믿음이 적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기대를 포기하면 관계 속에서 오는 죄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된다.

맡김과 보호

맡김과 보호
누가복음 23장 46절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바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후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0장 17절~18절, “17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미에 맞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어렵게하는 수준 낮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들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론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수준 낮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머리로 즐거워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나 이론이 현실로 확증되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행동으로 하나님께 맡기게 되면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내가 가끔 조용히 찾아가게 되는 그대여-Walt Whitman

내가 가끔 조용히 찾아가게 되는 그대여
-Walt Whitman-

그대와 함께 있고자,
내가 가끔 조용히 그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그대여,
내가 그대 옆을 지나가거나,
가까이 앉았거나,
함께 같은 방안에 있을 때,
그대는 모르리라.

그대 때문에.
내 마음 속에 흔들리는 미묘한 감동적인 불꽃을.

자기부인과 십자가

자기부인과 십자가
누가복음 9장 51절

누가복음 9장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들림을 받을 날이 가까이오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계셨다. 예루살렘에 가면 조롱과 멸시, 배반과 모욕, 가시멸류관과 침 뱉음, 십자가에 못박힘과 창에 찔림을 받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고, 존귀함을 받아야 할 마땅한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귀함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곳으로 가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죄인되었을 때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J.C 라일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희생 혹은 자기부인의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분명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기사랑이 예수님 사랑보다 큰 것이 ‘자기부인’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대속의 길’로 인도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날마다 새로운 십자가이다.

죄가 많은 곳에 가면 힘이 든다. 힘이 들고, 때로는 온 몸이 부서지게 되는 장소가 ‘죄가 많은’ 곳이다. 그곳에 생명을 흐르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그곳에서 견디고, 참고, 모욕을 받고, 심령이 상하는 일은 ‘우리의 십자가’이다. 물론 십자가는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이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와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주님이 주신 십자가는 ‘죄인’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지만,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는 ‘죄인’이 죽기를 원한다(눅9:54; 19:10)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모욕을 받고, 마음이 상하더라도 죄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의 자리까지 나가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죄인의 자리에 나가는 일이 ‘자기부인’이고, 상한 마음과 모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