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2015년 4월 12일
- 제목: 함께 하기
- 본문: 느헤미야 3장 1절~12절
- 설교: 진영정 목사
Author: Young-Chung Jin
하늘의 소리, 사람의 소리
하늘의 소리, 사람의 소리
마태복음 3장 17절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데 왜 사람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의 사역(공생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의 소리가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라는 소리였다. J.C라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소리”라고 말한다. 그는 이 소리를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에 하늘에서 들었던 소리와 연관시킨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출20:1).”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성경은 두 군데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때’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에 하늘의 소리를 사람들이 들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들은 소리는 율법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들은 소리는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다. 즉 율법과 복음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들린 하늘의 소리는 구원을 알리는 소리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 가장 기뻐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사랑의 소리이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를 환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두 가지 소리가 있다. 하늘의 소리인 말씀과 사람의 소리인 철학과 과학이 있다.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한다. 그러나 사람의 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가 하늘의 소리를 듣는지 혹은 사람의 소리를 듣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거룩해지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사람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구별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소리는 하나님과 더 멀게 하지만,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과 더 가깝게 한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귀를 통해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귀로 그 소리를 구분하려고 하면 그 소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예수, 그의 이름
예수, 그의 이름
마태복음 1장 25절
마태복음 1장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예수의 뜻은 구원자, 구세주라는 뜻이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예수’의 이름이 아닌 거창한 이름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를 들어 ‘구원자’의 이름이 아닌 ‘정복자’, ‘통치자’, ‘위대한’, 혹은 ‘심판자’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우리는 고생 속에 있어야 할 것이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다.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우리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또한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영생이라는 뜻은 ‘영원히 산다’는 뜻도 있지만, ‘편하게 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 안에 평강을 누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평강을 누려야 하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의 마음을 보면 고민, 불안, 두려움이 떠날 날이 없다. 우리가 마음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결핍’과 ‘부족’에서 온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우리 마음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강을 누리려면 예수님 안에 안전해지고, 우리의 필요가 채워져야 한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려면 예수님에게 우리를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를 내어주는 일은 어렵다. 오늘 아침에 예수님에게 우리를 맡겼다가도, 점심에 우리는 맡겼던 짐을 예수님에게 찾아온다. 예수님에게 우리를 맡기지 못하니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온다. 어떻게 우리를 예수님에게 맡길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구원자’의 이름은 빼앗는 이름이 아니라 채우는 이름이고, 불안을 주는 이름이 아니라, 평강을 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화해와 용서
화해와 용서
창세기 50장 15절~26절
창세기 50장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014년 10월 27일(월)에 창세기를 시작하였다. 2015년 4월8일(수), 오늘 그 창세기 여정이 끝난다. 창세기를 시작할 때 제목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창세기의 마지막 제목을 뭐라고 정할까 고민이 되었다.
야곱이 죽자 야곱의 형들은 요셉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형들은 요셉에게 종으로 판 사건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형들이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였다는 기록은 이전에는 없었다. 창세기 45장에 요셉과 그의 형들이 입맞추고 안고 울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형들이 요셉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한 기록은 없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화해의 사전적 정의는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간의 분쟁을 끝낼 것을 약정함으로 성립된 계약을 말하며 재판외 화해와 재판상 화해있다”이다. 사전적 정의로 용서와 화해를 유추 해석한다면 용서로 당사자간의 분쟁을 끝내지는 않는다. 즉 용서를 하여도 서로의 갈등은 남아 있다. 서로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화해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화해하기를 원하였다. 형들은 가해자였고, 요셉은 피해자였다. 형들이 요셉에게 원하는 것은 화해였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하였던 형들에 대한 마음의 앙금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과의 화해를 하였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아버지의 유언때문이었다. 야곱이 형들을 통하여 요셉에게 전한 말은,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이 요셉과 형들의 갈등을 끝낼 수 있었다(창50:17).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보다도 화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요셉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형들이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셨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창50:20).”
창세기는 ‘새로운 시작’으로 시작해서 ‘용서와 화해’로 창세기를 끝낸다. 인간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책이 창세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죄에 대한 심판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서로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화해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원수같은 사람과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남겨진 유산
남겨진 유산
창세기 50장 1절~14절
창세기 50장 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한 야곱이 인생을 마감하였다. 죽기전에 야곱이 요셉에 야곱이 죽거든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야곱의 유언에 따라 요셉은 바로의 궁에 말을 전하여 바로의 허락을 받아달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나를 너그럽게 본다면, 나를 대신하여 바로께 말씀을 전해 주시오. 우리 아버지가 운명하시면서 ‘내가 죽거든, 내가 가나안 땅에다가 준비하여 둔 묘실이 있으니, 거기에 나를 묻어라’ 하시고,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맹세하라고 하셔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였소. 내가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시오(창50:4-5, 표준새번역).”
요즘 한국에 ‘임종체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에 들어가기 전에 유언을 남기기도 하고, 관에 직접 들어가 누워보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엄숙해 지는 사람들도 있고, 서로에게 전해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순수해져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욕심을 내려 놓게 된다. 죽음 앞에서는 건강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야곱은 그의 자녀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물려 주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이 너희의 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를 가나안 땅에 묻어다오’라는 메세지를 야곱은 자녀들에게 남겼다. 그리고 43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고, 40년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적용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임사체험’처럼 우리에게 죽음이 임한다고 가정하자.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할 말은 무엇일까? 묘비에 적혀질 우리의 행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남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가 떠날 때 이 땅에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어야 한다. 믿음의 유산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졌고, 또 그 약속이 자녀들에게도 이루질 것이라는 믿음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떠나는 것이다.
서시- 윤동주
서시
-윤 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어둠에서 회복
- 날짜: 2015년 4월 5일
- 제목: 어둠에서 회복
- 본문: 느헤미야 2장 11절~20절
- 설교: 진영정 목사
우리의 미래
우리의 미래
창세기 49장 1절~18절
창세기 49장 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한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오늘을 성금요일(Good Friday)로 지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이 어떻게 ‘성금요일(Good Friday)’가 되는가? 이 날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가 용서된 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불러 각자에게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언한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이 미래를 어떻게 알았을까? 야곱이 아들들에게 유언할 때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으라”고 말한다. 야곱이 자녀들에게 말한 유언은 인간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이스라엘’임을 암시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을 대언했으니, 그의 말은 야곱의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은 앞으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앞 일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한다. 그래서 점집을 찾기도 하고, 무당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 앞에 있으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금요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산다면 그 말씀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된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
목마르지 않는 생수
창세기 48장 1절~22절
창세기 48장 4절~5절, “4절: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절: 내가 애굽으로 와서 내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요한복음 19장 2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이 마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분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을까? 그리고 그 분의 목마름은 단지 육체적인 갈증에 불과하였을까? 아니면 버려지고 죽어가는 세상을 위한 갈증이었을까?
사람들은 죽을 때 유언을 한다. 그 사람이 살면서 마지막에 남겨야 할 것들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말이 유언이다. 예수님이 남긴 유언 중에 하나는 ‘목이 마르다’는 말씀이다. 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야곱이 요셉이 왔다는 말을 듣고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다(창48:3).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을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이 땅(이스라엘 땅)에 나의 후손을 주어 영원히 소유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땅을 소유할 때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그 땅을 각각 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창48:4-5).”
야곱이 유언으로 요셉에게 두 몫을 준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이 유언으로 목이 마르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야곱이나 예수님 유언을 하신 이유가 사랑에 근거한다. 야곱은 요셉을 사랑해서 그 사랑의 표현으로 다른 형제에게는 한 몫을 주었지만 요셉에게는 두 몫을 주겠다는 유언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마르다고 유언을 하셨다.
주님이 목마르다고 외친 유언 뒤에는 ‘나는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목이 말랐지만, 너희들은 나를 통하여 목마를 일이 없으리라’라는 유언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주님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49장 10절, “그들이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요 더위와 햇볕이 그들을 상하게 하지 못하리라. 이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이가 그들을 인도하리니 샘솟는 물가에까지 안내할 것임이라.”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목마를 때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스라엘인가 야곱인가?
이스라엘인가 야곱인가?
창세기 47장 27절~31절
창세기 47장 29절,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해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제구시 쯤 십자가 위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은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다윗이 하나님께 그의 고통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하소연이 구원의 고백으로 바뀐다. 시편22편 3절-4절,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절: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전한 육체를 가졌으며, 십자가 위에서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육신을 죽음의 무덤 아래 놓이게 하였음을 독자가 알게 해준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내가 죽거든 이스라엘에 내 뼈와 시신을 묻어달라”고 요셉에게 유언하고 있다. 야곱은 자신의 환도뼈 아래 요셉의 손을 넣고, 요셉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야곱이 요셉에게 유언을 할 때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성경은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로 기록하기보다 ‘야곱(발꿈치를 잡다)’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경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기록하지 않고 ‘야곱’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야곱이 이름이 바뀌었어도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야곱’의 모습 그대로 살았기 때문은 아닌가?
야곱의 환도뼈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았던 역사적 증거이다. 자신을 내려놓았던 증거 앞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단절된 고통의 부르짖음과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성경이 기록하는 역사적 현장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자기’을 내려 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온전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스라엘인가 야곱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