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무리

세 무리
창세기 47장 13절~26절

창세기 47장 13절, 20절, “13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에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20절: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다. 고난 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을 말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십자가의 고통도 크지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통이 더 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고난주간의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최고의 고난을 겪었던 때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한 때라고 말한다.

이집트과 가나안 땅이 비가 오지 않아서 흉년이 들었다. 한 해 비가 오지 않더라도 세상이 떠들석 한데, 비가 1년, 2년, 3년째 오지 않고 있다. 처음 1-2년은 사람들은 가진 돈을 가지고 요셉에게서 곡식을 샀다. 3년 째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을 팔아 곡식을 샀다. 4년째가 되자 그들이 가진 것은 몸과 토지뿐이었다. 그들은 바로의 종이 되어서 흉년을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7년 흉년은 대재앙과 같다. 대재앙을 넘어가는 세 무리가 있었다. 세 무리 모두 요셉이 있었기에 대재앙을 넘어갔다. 그래서 구약의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재앙을 넘어가는 세 무리는, 바로의 종들, 바로의 제사장, 즉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들, 나머지 한 무리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다. 요셉이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세상의 재앙은 모든 무리가 넘어갈 수 있을런지 몰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한 무리만 넘어갈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세상에서의 대재앙을 피하는 세 무리 중에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물어본다. 두 무리는 세상의 대재앙은 피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 한 무리만이 세상의 대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된다.

오아시스와 신기루

오아시스와 신기루
창세기 47장 1절~12절

창세기 47장 9절~10절, “9절: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를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야곱은 백삼십 년을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고 바로에게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니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야곱이 이 같이 고백한 이유가 무엇일까? 야곱은 사막 가운데서 신기루를 보고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사막에 신기루를 바라보고 물을 찾으려고 갔더니, 그곳엔 물은 없고 모래 뿐인 신기루를 찾아 헤매었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요셉의 꿈이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졌음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야곱이 만났기 때문이다. 요셉의 꿈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이루셨다. 요셉의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야곱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품으신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니 야곱이 살아온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늘 나라의 시민임을 기억하면서 살 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게 된다.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게되면,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사막의 신기루를 찾아 헤메이지 않고 물이 있는 오아시스로 인도 받게 된다.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창세기 46장 1절~27절

창세기 46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나이가 들면 익숙한 장소를 떠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 70세가 넘은 부부가 익숙하게 살던 서울에 위치한 홍제동을 떠나 아들이 있는 이천으로 옮겼다. 이들 부부는 아들 옆에서 편하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익숙한 환경과 친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편함보다 불편함이 더 많았다. 또한 이들 부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들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적응력도 떨어진다.

야곱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예전의 야곱은 자기의 생각이나 욕망대로 움직였지만, 백 삼십세가 된 야곱은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야곱은 이미 낯선 곳에서 사는 고통을 알고 있었다. 젊었을 때도 고통스러웠던 타향 살이를 백 삼십세의 노인이 되어서 다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야곱은 심히 두려웠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창46:2-4,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 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말씀은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 하나님이다”이다. 아직까지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고, 야곱 아버지의 하나님이셨다. 야곱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이 이집트에 있는 동안,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야곱 아버지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부모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너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아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혼자 남아 있을 때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남아 있을 때 ‘너가 알던 하나님’을 경험하여, ‘나의 하나님’이 된다.

마음의 소원

마음의 소원
창세기 45장 16절~28절

창세기 45장 27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사람들이 듣고 싶은 소식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듣고 싶은 소식이 다르다. 마음에서 원하고, 소원하는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소원의 대상이 가족이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오늘 야곱은 자기가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을 들었다. 죽었던 요셉이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집트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자, 아버지 요셉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해졌다. 야곱은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야곱이 중얼거린 말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으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하는 말이었다(창45:26-28, 표준새번역 참조).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우리가 듣고 싶은 소식은 무엇인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 앞에 듣고 싶은 소식을 조용히 올려드리고, 그 분의 처분을 두렵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러면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듣고, 행하신다.

찾아야 할 것

찾아야 할 것
창세기 45장 1절~15절

창세기 45장 7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한국 T.V에서 “빛나거나 미치거나”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이야기로 고려 정종이 왕욱의 도움으로 왕식렴을 쫓아낸다는 큰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왕식렴은 정종과 함께 고려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을 왕으로 세웠다. 만약 드라마에서 정종 뒤를 이어 왕욱이 왕이 된다면 왕욱은 고려 광종이고, 광종은 호족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고려의 왕권을 확립한 임금이었다.

광종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려의 도읍을 서경에 세우자는 왕식렴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종은 반대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려의 도읍을 개경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왕식렴이 주장대로 고려의 도읍을 서경으로 정하였다면 고려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려는 중국과 경쟁을 하면서 고구려가 잃었던 땅을 다시 차지 하였을런지도 모른다. 고려의 역사 중에서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아쉬워하는 사건 중에 하나가 왕식렴의 서경천도 계획이다.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았을 때, 그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사건이 무엇이냐 물으면 그들은 한 목소리로 요셉을 판 사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의 인사에 그저 놀라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나타났으니, 그들은 요셉을 보고 얼마나 두려웠을까?

요셉이 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이집트의 종으로 팔리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종에서 이집트의 총리로 올려 놓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면, 요셉은 평생 이집트의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모든 상황을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황을 바꾸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환경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서 간직해야 한다.

위기의 산

위기의 산
창세기 44장 14절~34절

창세기 44장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셨사오니.”

한국이 일본에 36년간 무력으로 점령 당한 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러한 일본의 정책에 기독교가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백성들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종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가 기독교였다. 3.1운동에 서명한 33인의 지도자 중에 천도교 지도자가 15인, 기독교 지도자가 16인 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기독교가 신사참배의 높은 위기 앞에 주저 앉아 버렸다.

요셉의 형들에게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누군가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었다. 이 일로 인하여 베냐민은 이집트에 잡힐 위기에 놓였고, 형들은 어떠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만 찾으려 할때, 유다가 이집트의 총리 앞에 당당하게 말했다: “종들은, 막내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갈 수도 없고, 아버지 얼굴을 뵐 수도 없습니다(창44:26).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창44:33)”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집트 총리 앞에 드렸다. 유다가 베냐민의 생명과 바꾸려는 마음을 어떻게 가졌을까? 유다가 자녀를 잃어버렸던 아버지였고, 동시에 자녀를 잃게되는 아버지 야곱의 고통과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야곱이 자녀를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유다 자신이 이집트의 종으로 사는게 유다에게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자녀를 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면,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연민을 갖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쉬운 말인데 실제적으로 적용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위기의 산을 쉽게 넘는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면, 우리가 위기를 넘어가려고 하기보다는 위기의 산보다 더 높은 물(성령)이 차올라서 자연스럽게 위기의 산을 넘도록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