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문

마음의 문
창세기 41장 1절~13절

창세기 41장 1절,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술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준 요셉은 곧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셉의 생각과 달리 요셉은 감옥에서 곧 풀려나지 못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고 만 2년동안 더 감옥에 있어야 했다. 요셉이 만 2년동안 감옥에 더 있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은 요셉이 2년간 감옥에 더 있는 이유를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창41:1)”이라고 말하면서, 요셉이 감옥에서 2년간 더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로가 꾼 꿈은 앞으로 애굽에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흉년을 온다는 꿈이다.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모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셉을 감옥에서 2년간 더 기다리게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요셉을 인도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시간만 중요하고 요셉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맞추실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요셉을 2년 동안 감옥에 있지 않게도 하실 분이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위의 모든 질문에 답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꾸셔도 인간의 마음은 바꾸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마음을 밖에서 열지 않고, 안에서 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년 간의 감옥 생활은 요셉이 자신의 마음을 여는 있는 시간이었다.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요셉은 자신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요셉의 꿈을 이루게 하는 분은 요셉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가슴으로 요셉이 인정하는데 2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생의 감옥에 있다면,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감옥에서 나와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감옥에서 나오는 방법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능력도 우리가 가지고 없음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무능력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연결하도록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꿈을 이루는 지름길

꿈을 이루는 지름길
창세기 40장 1절~15절

창세기 40장 13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였고, 다른 사람은 떡 굽는 자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루밤에 꿈을 꾸는데 각기 그 내용이 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꿈을 꾸었지만, 두 사람 모두 꿈을 꾸고 난 후에 근심을 하였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근심을 하면서 산다. 근심의 내용을 보면 70% 이상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근심이다. 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로 인한 근심,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근심이 아니라 내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근심, 예를 들면 일어나지 않은 자동차 사고에 대한 근심, 지금 있는 직장에서 앞으로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근심 등이 내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근심이다.

근심하고 있는 근심이 해결 할 수 없는 근심을 알 때 나타나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하나는 포기형, 다른 하나는 맡김형의 반응이다. 포기형은 해결 할 수 없는 근심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더 힘들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반응이 포기형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맡김형 반응은 해결할 수 없는 근심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슴이 후련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반응을 나타낸다.

해결할 수 없는 근심을 직면(confront)할 때, 두 가지 유형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기형은 환경이나 사람이 자신의 통제 안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근심을 바라보고,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답답해 한다. 그러나 맡김형은 사람이나 환경을 통제하기보다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근심을 직면할 때, 자신보다 더 능력이 많은 그 분께 맡기기 때문에 속이 후련해진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 술 맡은 관원은 사흘 뒤에 감옥에서 풀려나 원래의 자리로 회복되는 꿈이라고 해석해 주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사흘 뒤에 감옥에서 목이 달리는 꿈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창세기 40장의 주인공은 요셉이지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 이유를 은연중에 설명하고 있다. 요셉이 감옥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술 맡은 관원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애굽의 왕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종의 신분을 가진 요셉이 왕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이 감옥이었다. 요셉에게 감옥은 ‘화’가 아니라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지름길이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적용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이 감옥처럼 갇혀서 살고 있다면, 그 감옥은 ‘화’가 아니라 ‘복’이다. 감옥 같은 인생이 복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인생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환경과 형통

환경과 형통
창세기 39장 7절~23절

창세기 39장 14절~15절, “14절: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디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생활을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때가 있다. 어느 교회에 사모님이 주일마다 이쁘게 차려 입고 신자들을 맞이하였다. 한 여신자가 사모님을 보고 “사모님 머리가 왜 그래요”말했다. 그래서 급하게 사모님은 화장실에 가서 사모님의 머리를 보았다. 그런데 사모님의 머리는 단정한 머리였다. 화장실에서 사모님은 옷 매무새를 다시 점검하고 나왔다. 다음 주일에도 사모님은 단정한 모습으로 신자들을 맞이 하였다. 그런데 지난 주에 “사모님 머리가 왜 그래요”하고 말했던 그 여신자가 사모님을 보고, “사모님, 사모님 머리에 새 집을 짓었는데 어떻게 나올 수 있어요? 칠칠맞게…” 사모님이 화장실로 뛰어가는 대신 여신자의 머리를 보았다. 그 여신자의 머리가 새집처럼 헝크러져 있었다.

말씀대로 살았던 요셉이 한 여인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 요셉이 모시고 있는 시위대장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과 동침하자고 애걸하였다. 요셉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창39:10). 요셉은 그녀가 동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았고, 요셉 자신도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요셉이 아무리 마음을 관리하여도 위기는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일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요셉의 옷을 잡고,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요구하였다. 요셉은 서둘러서 그녀의 곁을 떠나는 바람에 그녀의 손에 잡힌 요셉의 옷을 챙겨나오지 못하였다. 요셉이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마음이 급하여 그녀가 잡고 있는 요셉의 옷을 버려두고 뛰쳐나오는 요셉을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옷을 버려 두고 나왔을까? 옷을 버리고 도망가는 요셉은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고온 옷때문에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요셉은 얼마나 두려워했을까?

육신의 눈으로 보면 시위대장 아내의 유혹은 요셉에게 있어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요셉이 시위대장의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육신의 눈으로 기회를 선택하지 않고, 약속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 약속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는데 요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었다(창39: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서도 형통케 하셨다(창39:23)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물은 어떤 때는 유혹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회로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생의 감옥으로 오기도 한다. 그러나 환경이 우리를 형통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형통케 하신다.

형통한 복

형통한 복
창세기 39장 1절~6절

창세기 39장 2절~3절,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갖가지 일이 뜻대로 됨”이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복만 바라는 기복신앙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람에 욕구에 맞는 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형통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신자가 ‘복 있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으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요셉이 어떻게 형통한자가 되었는가? 요셉이 형통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 시편34편 6절, 10절,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곤고할 때,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으니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힘들 때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으니 형통한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는 형통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한 사람의 모습을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도 형통치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겉에 들어난 험한 돌만 움직여 달라고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겉에 들어난 험한 돌을 치워주고, 돌이 있던 자리에 씨앗을 심으셔서 새싹이 자라도록 하신다. 우리는 우리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찾으니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요셉은 하나님을 생각했다. 요셉은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 갔다. 요셉이 잘못한 일은 없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이스마엘 장사꾼에게 팔았고, 장사꾼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요셉의 인생은 요셉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요셉의 인생은 흘러갔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채색옷을 입었던 요셉이 하루 아침에 종이 되어 좋은 옷을 커녕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찾았다.

요셉이 하나님을 찾으니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 요셉의 형통은 요셉만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라 요셉이 섬기고 있는 주인도 형통하게 하였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형통한 삶을 경험하라고 말씀하신다. 형통한 사람은 화를 복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형통한 사람은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형통한 사람은 형통을 자기만 경험하지 않고, 형통한 복을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흘려 보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공감

공감
창세기 38장 1절~30절

창세기 38장 25절,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요즘 한국에서 ‘공감’을 강조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머리로 가슴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공감은 세대와 세대사이를 잇은 다리이고, 끊어진 관계를 잇는 소통의 기술이기도 하다. 특히 상담가가 내담자의 아픔을 깊이 공감할 때 내담자의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유다의 이야기로 바뀐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유다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야곱의 집에서 요셉을 제외한 다른 형제 중에 성경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인물이 유다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를 초점 맞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자녀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약속의 자녀가 죄를 지은 후에 회개가 없다면, 아무리 약속의 자녀이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대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 넘기는 죄를 지었다. 르우벤은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지었다 (창35:22).

유다는 어떠한가? 성경은 유다와 그의 아들들이 악행을 기록하고 있다.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은 악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셨다. 엘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에 여호아께서 엘을 죽였다. 동생 오난은 형의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오난이 악하여 여호와께서 오난을 죽이셨다. 유다에게 남은 아들은 셀라 뿐이였다.

유다의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성경이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 유다가 두 아들이 죽음으로 아버지 야곱의 슬픔을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야곱이 요셉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떠났다. 물론 유다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다가 두 아들을 잃고 나서,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공감하고 야곱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또한 유다 자신도 아버지 야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다가 아버지가 행한 죄에 대하여 스스로 공감하게 되었다. 유다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다도 야곱과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다가 어떻게 야곱과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다는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야 하지만, 셀라가 죽을 것을 염려하여 유다는 의도적으로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다말은 형 엘의 자손을 이어야했다. 그래서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친정 가까이에 왔을 때,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유다와 동침을 하였다. 유다가 동침한 여인이 창녀가 아니라 다말인 사실을 알때,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 야곱과 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창38:26).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하여 주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공감은 가정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정에서 서로 공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을 시작하신다.

터널과 동굴

터널과 동굴
창세기 37장 25절~36절

창세기 37장 35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는 마음이 허전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떠날 때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차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잃을 때 슬퍼한다. 부모가 자녀를 영원히 떠날 때 자녀가 흘리는 눈물은 ‘그리움’을 슬픔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곁을 영원히 떠날 때 부모가 흘리는 눈물은 자녀의 죽음을 부모가 대신하지 못한 ‘절망’을 눈물로 표현한다. 같은 눈물이더라도 다른 감정을 표현한다.

오늘 말씀은 야곱이 요셉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고 말한다. 야곱이 요셉을 잃었을 때의 슬픔은 어떠했을까?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견디기 힘든 아픔이 전해져 온다. 더 이상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야곱이 듣고 야곱도 스올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땅 끝이라도 요셉과 함께 하겠다는 아버지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푸시킨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고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며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느니”라고 삶을 표현했다. 현재의 삶에서 슬프고 견뎌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으면 푸시킨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성경도 야곱과 요셉의 삶이 앞으로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형제들에게 팔린 동생의 분노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두 가지 다른 감정을 대비하여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요셉과 야곱의 삶이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그들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현재 슬픔과 분노를 가진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준다. 슬픔과 분노는 우리를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현재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면 우리의 미래는 터널 밖으로 나온다.

복과 화

복과 화
창세기 37장 12절~24절

창세기 37장 18절~19절, “18절: 요셉이 그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절: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살다가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치기도 한다. 불행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불행이 아니라 불행을 다루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불행을 잘 다루면 ‘전화위복’이 된다 .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뜻은 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을 다루지 못하면 불행은 불행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불행이 커져서 더 큰 불행으로 변하게 된다.

요셉의 형들이 세검으로 양을 치러 갔다. 요셉의 형들이 세검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야곱에 대한 반항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세검으로 갔다. 세검에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추억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면 야곱이 요셉의 형들을 걱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간 곳이 세검이기 때문이다. 세검은 야곱의 아들들, 즉 시므온과 레위가 세검 추장의 아들이 동생 디나를 강간하여, 강간에 대한 복수로 세검 사람들을 죽인 곳이 세검이다. 세검사람들이 요셉의 형들에게 복수는 하지 않을까 야곱은 걱정하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불행을 잘 다루지 못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을 인정하지 않고, 불행을 피하여 세검으로 갔다. 그러나 불행을 피하여 갔던 그들의 길에는 더 큰 불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단에서 양을 치던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요셉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을 때 그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마음을 합하였다. 그러나 맏형 르우벤이 요셉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여, 그들은 요셉을 죽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 속에 넣기로 하였다. 그들은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요셉을 구덩이에 넣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근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넣은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이 아니라 더 큰 불행이었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불행을 만날 때 불행을 피하거나 거부하면 더 큰 불행이 우리를 찾아 올 수 있다. 불행을 다루지 못하면 화가 된다. 그러나 불행을 잘 다루면 복이 된다. 불행을 다루는 법은 불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행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불행을 다룰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의 불행이 화가 아니라 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