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창세기 37장 1절~11절

창세기 37장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사람들은 자면서 3-4번의 꿈을 꾸게 된다. 꿈을 꾸었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꿈을 꾸는 이유가 REM(rapid eye movement)수면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REM수면 상태에 들어가면 근육은 깊은 잠에 빠지지만 뇌와 다른 신체기관들은 활동적이 된다. 이를 역설적 수면이라고 한다. 또한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반영하는 도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허기질 때 밥을 먹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현실에서 어렵고 힘든 상황을 탈출하기 위하여 부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현재 희망이 없은 사람들은 미래에 소망이 가득한 꿈을 꾸기도 한다.

성경에서 꿈꾸는 자로 알려져있는 인물은 요셉이다. 요셉이란 이름의 뜻은 “그는 더할 것임”이라는 뜻이다. 요셉은 그의 이름대로 다른 형제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다. 요셉은 다른 형제보다 더 좋은 옷을 입었다. 요셉은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은 꿈을 꾸었다.

요셉의 꿈을 성경에서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요셉의 꿈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다. 왜냐하면 요셉이 꾼 꿈을 해석하면 부모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이였기 때문이었다. 요셉이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을까? 물론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 답이 뻔한 해석은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뻔한 해석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해석이기 때문에 사람의 시각에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요셉의 입장에서 요셉이 꿈을 꾼 이유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이 그러한 꿈을 꾼 이유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많은 시기와 미움때문이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 받았던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다. 고통 속에 있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셔서, 현실을 이기고, 미래를 설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얻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로 힘든 상황에 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라는 믿음 아닌 그들의 꿈이 각박한 현실 생활에서 쉴 수 있는 작은 나무 그늘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또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요셉이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이유는 요셉을 향한 미래의 사명때문이었다. 요셉이 꿈을 꾸게 않았다면,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는 커녕, 현재 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에 깔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꿈을 꾸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고 꾸는 꿈은 아닐까? 우리가 꾸는 꿈으로 현실을 이기고,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가 꿈을 꾸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꿈을 꾸지 않는다면 각박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웃을 수있는 힘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꿈을 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미래의 사명을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이아나 루먼스-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으로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일은 덜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을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호기심

호기심
창세기 36장 9절~43절

창세기 36장 9절~10절, “9절: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절: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예전에 아이들에게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불의 뜨거움을 아이가 깨닫게 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불을 아이 옆에 보이지 않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여도 어떤 아이는 불에 가까이 가고 싶어한다. 불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닌 에서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에서의 자손들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다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죄에 대한 생각이 둘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죄를 용서하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다른 확신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나’라면 용서 할 수 있는 죄가 있기도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응하면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부르심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보이신 사랑이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죄 아래 있는 에서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고의 메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기 위함이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는 기록은 역대상에도 기록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세우려고 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창세기가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적용해야 될 말씀은 무엇일까? 성경은 사랑과 심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쳐준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려면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어야 한다. 죄에 대한 호기심은 죄를 따라 간 사람들의 결과를 바라보고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게 된다. 죄를 따라간 사람들의 결과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룰 수 없게 된다.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창세기 36장 1절~8절

창세기 36장 7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었다. 도덕성 발달 이론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이론 중에 하나이다. 5세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그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했고, 7세 부터는 Boarding School(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생활하였고, 공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 기대로 인하여 성공한 그는 사람들의 기대로 인하여 자살하게 되었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그가 최고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살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고(물론 그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도덕성 이론을 발표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만든 이론의 함정에 빠져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는 요인이 ‘절망’이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많은 소유’이다. 소유가 많으면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없다. “두 사람이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창36:7).” 에서와 야곱이 함께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진 것이 풍성해지니,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재산때문에 에서와 야곱이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산이 아니라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았다. 야곱이 에서의 생활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으셨다.

영적인 관점이 다른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야곱은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에서는 이 땅에서 이 땅만 바라보고 산다. 바라보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에서와 야곱은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험난하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평탄하고 쉬워 보이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두 길을 구분하여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평탄하고 쉬운 길이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속의 길에는 가시와 큰 돌들이 있어서 하나님 약속이 없는 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약속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약속의 길을 걸을 때 그 길이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는 우리가 받은 아픔과 상처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된다.

그 분의 걸작품

그 분의 걸작품
창세기 35장 16절~29절

창세기 35장 18절~19절, “18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9절: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이름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명소에 가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가정이 어떻게 불려지느냐에 따라 가정도 달라진다. 어떤 가정이 되느냐는 그 가정의 가훈을 보면 한다. 아버지가 만든 가족의 가훈 중는 ‘백인(百忍)’이라는 말이 있다. ‘백인’은 백 번 참으라는 말이다. 가훈에 백인이 있으니 자녀들은 참는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성격대로 사셨는데 자녀들에게는 ‘백인’하라고 하니,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게 되었는가? 자녀들이 자기의 성격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으니 자녀들의 삶은 ‘백인’해야 한다. 그래서 가훈을 백인(百忍)빼고, 백자로 시작되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생각이 났다. 백전불태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백번 싸워도위태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백전불태’로 가훈을 바꾸면 가정에 싸울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그녀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라헬은 죽으면서 낳은 아이의 이름은 베냐민이 아니라 베노니였다. 베노니는 라헬이 죽으면서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지어준 이름을 바꾸어서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베노니의 뜻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베노니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면서, 베냐민의 인생이 달라졌다. 베냐민의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찰뻔 했는데, 그의 이름을 바꿈으로 인하여 그가 힘차게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야곱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헬의 시각으로 보면 베냐민은 어미 잃은 슬픈 아이이다. 그러나 야곱의 시각으로 보면 어미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날 오른 손의 아이였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연약하고, 무익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우리는 만왕의 왕의 아들과 딸들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능한 능력을 받아 살아가는 그 분의 걸작품이다.

어머니의 언더라인-박목월

“어머니의 언더라인”

-박목월-

유품(遺品)으로는 그것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嘉俳節)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니의 유품은
그것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마다 헐어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耳順)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 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주위를 둘러싼 담

주위를 둘러싼 담
창세기 35장 1절~15절

창세기 35장 1절, 9절,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9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장소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곳이 벧엘이고,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한 곳이 벧엘이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의도적으로 벧엘을 피하였다. 야곱이 의도적으로 벧엘을 피한 이유가 무엇인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어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디나의 강간 사건과 그로 인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살륙한 사건으로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게 되었다. 야곱이 경험한 가정의 불행은 야곱이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은혜가 되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었다. 야곱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을 때, 야곱은 벧엘로 돌아갔다.

가나안 민족의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벧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나안 민족들에게 야곱과 그의 가족은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이 야곱을 보호하는 안전한 장소가 되었뿐만 아니라, 야곱을 축복하는 축복의 장소가 되었다. 야곱은 가나안의 보복을 피하러 벧엘로 갔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너스로 야곱을 축복하셨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35:9).”

세상과 자기를 내려 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두 가지를 행하여야 했다. 첫 번째는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야만 했다.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창35:3).” 두 번째는 야곱이 의지하는 드보라를 떠나야만 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창35:8).”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의 벧엘은 어디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가 우리의 벧엘이다. 성령이 임재함이 있는 장소가 우리의 벧엘이다. 우리가 벧엘에서 하나님과 함께 때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담도 허물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하나님이 주신 약속
창세기 34장 1절~26절

창세기 34장 2절~3절, “2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절: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아들이 영주권을 잃어버려서 지난 수요일(11일) 영주권에 들어갈 지문과 사진을 찍었다. 영주권 사진과 지문을 찍은 후에 C.J이란 친구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C.J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UCR(유씨 리버사이드)에 박사과정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그 소식을 처음으로 아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제 아들 주변에 노는 친구들은 없다. 다 직장을 잡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들만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힘든 시간이지만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야곱에 세겜에 머물러 있을 때 딸 디나가 그 땅의 추장 아들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다. 딸이 강간을 당한 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을 찾아 왔다. 추장 하몰은 디나를 아들의 아내로 달라고 말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가 세검의 아내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하몰은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조건이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내건 조건이었다.

하몰은 야곱의 아들들의 조건을 좋게 여겼다. 야곱의 아들들과 하몰의 족속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면 하몰의 족속이 되고, 야곱이 가진 모든 재산은 하몰 족속의 소유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 아들들과 하몰의 족속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면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은 야곱의 가족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메시아가 오지 못하는 모든 인류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몰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야곱의 아들들의 조건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 하몰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 움직이지 못할 때,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하몰에 속한 모든 남자를 죽였다(창34:25). 시므온과 레위는 하몰에게 빼앗겼던 동생 디나를 찾아서 야곱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창34:26). 디나의 사건으로 야곱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디나의 사건으로 베델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기억나게 하였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야곱은 베델에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께 약속하였다(창28:22).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 힘들 때는 힘이 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쁠 때는 기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예수님이 떠나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