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할 때 받는 은혜

골로새서 1장 1절~2절
함께 할 때 받는 은혜

오늘부터 웹사이트를 통하여 짬짬이 시간이 날 때 말씀 묵상을 올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하여 골로새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1장 1절에서 2절에서 바울은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할 때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인사의 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함께 일을 할 때 그 가운데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한다는 뜻은 가족과 같이, 형제자매와 같이, 부모자녀와 같은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함께 일할 때 주님에게 받는 은혜가 있는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와 평강의 은혜를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우리 자녀들이 ‘은혜와 평강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끈에 매여 우리가 함께 할 때 우리의 가족, 혹은 우리의 자녀들이 은혜와 평강 속에 있게 됩니다.

강박성 인격장애

현대인들은 무수한 경쟁을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산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을 선호하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들을의 성향 중에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완벽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강박성 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성격이 아주 바르고 책임감이 강하다. 의무감에 충실하며 신뢰를 중시여기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억제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여 잘못을 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인내심이 강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사람들 같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강박성 인격장애의 핵심은 통제이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들이 그들의 통제권 안에 들어와야 한다. 또한 그들의 관심사는 지배와 복종이다. 그들은 칭찬에 인색하고 자신의 지위에 민감하다. 성경에서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일하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주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발 한발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주님보다 앞서 우리가 주님을 인도하고 주님을 이끌려고 하면, 우리 마음이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주님과 멀어진 마음은 마음이 뒤틀리게 되어 있고, 뒤틀린 마음이 강박성인격장애이다.


-윤 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은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진리기독교상담센타 오픈예배

사랑하는 형제 자매 동역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기독교상담센타”의 시작예배를 아래와 같이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로 나가는 자리에 여러분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날짜: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오후4시
장소: Temple Baptist Church(플러튼 영락교회)
주소: 1601 W. Malvern Ave, Fullerton CA 92833

*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에서 재정부분을 맡게 되어서 그동안 글을 일주일에 2번만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동역자님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잘못된 믿음(7): 바른 선택을 하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잘못된 믿음(7): 바른 선택을 하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시편 1편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로 선택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섬기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에게는 주님에 뜻에 따를 능력이 없다. 또한 우리의 능력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선택한다면 영적인 성숙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한 선택은 강박적 행위로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강박적 행위’란 하나님 뜻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면 불편한 생각이 자꾸 떠올라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바른 선택은 우리의 능력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의지로 하여야 한다.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님께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바른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바른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주님의 능력으로 선택하여야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

잘못된 믿음(6):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잘못된 믿음(6):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면 청중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죄보다는 사랑을 주제로 설교를 많이 한다.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민감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지는 일과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지고 사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영화 밀양은 ‘용서’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밀양에서 여주인공(신애)는 아들을 유괴하여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감옥에 간다. 여주인공은 아들을 잃은 고통 속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단한다. 여주인공은 유괴범을 만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유괴범은 자기도 기독교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죄를 용서하였다고 여주인공에게 말하였다. 밀양에서 잘못된 용서의 시각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여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지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 우리가 죄에 민감해진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은 죄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죄책감에 묶여서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죄가 생각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을 위한 기도

오늘을 위한 기도
-이 해인-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있음으로
살아있는 또 한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할까요?

제 작은 머리 속에 들어찬
수천 갈래의 생각들도
저의 작은 가슴 속에
풀잎처럼 돋아나는 느낌들도
오늘은 더욱 새롭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도
함께 살아 가는 이들도
오늘은 더욱 가깝게 살아 옵니다

지금껏 제가 만나 왔던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통해
만남의 소중함을 알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시간의 옷감들을
자투리까지 아껴 쓰는
알뜰한 재단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 밖에는 없는 것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 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사랑의 거울” 앞에
저를 다시 비추어 보게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느라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오늘을 묶어 두지 않게 하소서

몹시 바쁜 때 일수록
잠깐이라도 비켜서서
하늘을 보게하시고
고독의 층계를 높이 올라
내면이 더욱 자유롭고 풍요로운
흰 옷의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다 기억하되
제가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망증을 허락하소서

오늘 하루의 숲 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가는
꿋꿋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는
어느 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직이 외우는 저의 기도가
하얀 치자꽃 향기로
오늘의 저의 잠을 덮게 하소서

잘못된 믿음(5):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잘못된 믿음(5):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로마서 7장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헨리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8번째 주제가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종종 듣는다. “성경 공부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기도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교회 부서에서 섬겨야 한다. 나를 미워하는 이웃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등등의 그리스도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말한다.

‘해야 하는 것’은 책임, 의무, 강제 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책임이나 의무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인을 속박하거나 얽매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책임이 아닌 자유로운 선택, 의무가 아닌 사랑이 넘쳐 흘러 나가는 자연스러운 섬김의 일이 되어야 한는 말씀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을 때에는 진노 아래 있고, 유죄 선고를 받은 상태이고, 사랑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어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되고, 죄의 묶임에서 해방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유익을 누리며 살게 된다.

잘못된 믿음(4):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

잘못된 믿음(4):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

골로새서 2장 9절~10절, “9절: 그 안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헨리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7번째 주제가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을 필요하지 않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나’와 ‘하나님’의 신드롬에 대하여 헨리크라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전투 속에서 하나님은 조종사이고 나는 부조종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과와 함께 하시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있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주신 이유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창2:18 참조)”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이 영지주의적인 믿음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믿음은 영적인 것은 모두 선하고, 육적인 것이나 물질은 모두 악하다는 믿음이다. 성경은 영지주의적인 믿음을 이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신조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계하신 말씀은 혼자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혼자 있는 것이 육체에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자라고,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우리의 영성이 자랄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성이 있어야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영성도 있어야 한다.

잘못된 믿음(3): 과거는 잊어버려라

잘못된 믿음(3): 과거는 잊어 버려라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롬10:10). 구원이 되면 새생명을 얻는다. 새생명을 얻으면 옛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성경은 말한다. 과거의 일이 성도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성도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과거의 일, 과거의 악몽, 과거의 고통들이 잊을 수 있는가? 잊지 못한다. 새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과거의 사건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과거에 일어났지만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슬픔을 충분히 느껴서 아픔을 떠나 보내야 한다. 과거에 고통을 주었던 원수가 있다면 그들의 죄를 용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원수를 씹어 먹을지언정 용서가 되지 않으면 원수에게 우리의 감정을 주 안에서 토해내어야 한다. 그러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에베소서 5장 11절, 13절,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