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2015년 2월 1일
- 제목: 머리가 하는 일
-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
- 설교: 진영정 목사
Author: Young-Chung Jin
다시-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은 좋은 시 한편으로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약자인가, 강자인가
약자인가, 강자인가
창세기 30장 14절~24절
창세기 30장 22절~23절,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연대 동문을 신학교 교수 회의에서 만났다. 박사 학위를 1997년에 받고, 2008년까지 연구를 활발히 하다가 갑자기 연구를 중단하였다. 그녀는 활발히 연구하였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간 선배들이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학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위를 받고 어떤 일을 하게 되느냐 더 중요하다.”
자매 라헬과 레아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르우벤이 합환채를 발견하여, 어머니 레아에게 주었다. 합환채를 본 라헬은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하였다. 레아가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라헬이 야곱과의 잠자리를 레아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레아는 조건을 수락하고,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고, 야곱과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
레아가 야곱과 함께 한 잠자리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 야곱에게 낳은지라(창30:17).” 레아는 하나님께 아픔을 호소하였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에서 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은 두 여종과 라헬과 밤을 함께 보내었지만, 레아와는 밤을 보내지 않았다. 레아의 소원은 “야곱에게 사랑을 받도록 아들을 달라”는 소원이었다.
레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레아는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고 야곱과 동침하여 ‘잇사갈’을 낳았다. ‘잇사갈’은 값이라는 뜻이다. 레아는 잇사갈을 낳음에 그치지 않고, 여섯째 ‘스불론’을 낳았다. 스불론은 ‘거함’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야곱과 멀리 하였던 레아가 드디어 야곱과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레아의 고통이 끝나갈 때 라헬의 고통은 커져갔다. 라헬은 고통이 커져서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느낄 때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셨다(창30:31). 라헬이 강할 때는 하나님은 라헬을 멀리하셨지만, 라헬이 약해지자 라헬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셨다.
세상은 강한 사람의 편에 선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인간 사회에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약자가 그 세상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계시며, 약자의 울음과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우리가 약자인가 강자인가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려 놓고, 온전하게 손을 들고 항복하면, 하나님은 약한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감정의 내면
감정의 내면
창세기 30장 1절~13절
창세기 30장 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여 언니 레아를 시기하였다. 라헬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책임을 남편 야곱에게 돌렸다. “네가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다”라고 야곱을 협박하였다.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탓을 야곱에게 돌리기에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하고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야곱의 ‘분노’는 자신의 무력감을 겉으로 들어낸 감정이다. 겉으로 들어난 감정에 사람들은 영향을 받는다. 겉으로 들어난 감정으로 사람 사이에 말 소리가 높아지고, 서로 상처를 주게 된다. 겉으로 들어난 감정의 내면을 읽어야 서로의 갈등을 줄일 수 있다. 겉으로 들어난 감정은 ‘분노’로 표현이 될 수 있고, ‘슬픔’으로 표현이 될 수 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난 감정은 내면의 ‘불안’을 표현한 것이다. ‘불안’을 움직이는 생각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줄어든다.
서로에게 준 상처는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한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난 감정의 내면을 읽으면 갈등을 줄이게 된다. 만약 아내가 늦게 오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새벽 4시에 온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 ‘화’를 내었다. 겉으로 들어난 아내의 감정은 ‘분노’이다. ‘분노’를 표현하게 한 아내의 내면의 또 다른 감정은 무엇인가? ‘안도감’이다. 밤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면서 아내는 남편의 안전을 걱정하였다. 마침내 무사히 돌아온 남편을 보자마자 아내가 ‘분노’를 들어낸 이유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자 ‘안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화를 내었던 이유가 ‘안도감’이라는 감정의 내면을 남편이 알았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의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하나님께서 라헬이 자녀를 갖지 못하게 하였다. 라헬이 자녀가 없음으로 남편 야곱과 갈등이 생겼다. 라헬은 자녀를 갖기 위하여 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었다. 빌하가 ‘단’을 낳았다. ‘단’은 억울함을 푸심이라는 뜻이다. 빌하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은 ‘납달리’였다. ‘납달리’는 경쟁에서 이겼다는 뜻이다. 이러한 라헬을 보고 레아도 자기의 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었다.실바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갓’이였다. 갓은 ‘복됨’이라는 뜻이다. 실바도 둘째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아셀’이었다. 아셀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두 자매가 이렇게 서로 경쟁하면서 낳았던 아들을은 이스라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밖에 드러난 감정을 움직이는 내면에 좀더 민감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우리는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휩쓸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바로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드러난 감정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각을 넘어서
우리의 시각을 넘어서
창세기 29장 21절~35절
창세기 29장 30절,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야곱이 라헬을 14년 일한 뒤에 얻은 것이 아니라, 레아와 일 주일의 혼인 기간이 끝나고 라헬을 얻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외삼촌 라반을 위하여 7년을 더 일하였다. 레아는 결혼 한 지 일 주일만에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격이 되었다. 야곱은 레아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 라반이 야곱을 속이기 위하여 딸 레아를 이용한 일과 어머니 리브가가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하여 야곱을 이용한 일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야곱이 레아를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기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창29:31).”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데 자녀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레아가 자녀를 임신하게 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야곱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야곱이 7년 동안 라반을 위하여 일한 사건이며, 7년의 기간이 끝이 났는데 라반에게 속아서 다시 7년 동안 일을 더하게 되는 사건이며, 레아를 아내를 맞이한 사건이며, 라헬이 자녀가 없는 일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야곱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니, 하나님의 전지 전능함과 능력이 무엇인지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그 상황을 달리 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하나님께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 안에 갇혀서 우리의 문제를 보면 고통과 한 숨 뿐일 사건들이, 우리의 시각을 넘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높은 파도를 넘는 지혜와 능력
높은 파도를 넘는 지혜와 능력
창세기 29장 1절~20절
창세기 29장 20절,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어제 웹 사이트를 열어 보았더니 보지 못한 글이 올려져 있었다. 깜짝 놀라 그 글이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 버렸다. 개인 정보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안전한지, 안전을 잃는 것을 불안해 하였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을 찾아갔다. 75년을 넘게 살던 장소를 떠나는 야곱은 불안했다. 불안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안정을 찾았다. 안정을 찾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에 도착하였다. 야곱이 하란에서 목자들을 만났다. 야곱이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고 물었다. 목자들은 라반을 “안다”고 대답했으며, 그 목자들은 라반의 목자들이었다.
야곱이 라반의 목자를 만나게 된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 한 번에 라반을 찾을 수 없었다. 야곱이 고향과 먼 타지에서,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외삼촌 라반을 찾고 있었다. 먼 타지 하란은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가 하란을 떠난지 100년이 지났다. 어머니를 알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리고 한번도 와 본적 없는 장소에서 외삼촌 라반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은 그 사실을 알고 불안해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쉽게 라반을 찾았다. 야곱이 라반을 아느냐고 물어본 목자가 라반의 목자였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라반을 만나 라반과 함께 살면서 20년 동안 고생하게 된다. 야곱이 라반을 만나 고생하게 된 사건을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을 한다. 한 관점은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형에게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았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이었다는 관점이다. 또 다른 관점은 야곱이 비록 사기를 쳐서 형에게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았지만, 야곱이 라반과 함께 한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였다는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은 인과응보론적인 관점이고, 후자의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본 관점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중도의 입장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택하였다. 그러나 택한 야곱을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없었다. 야곱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야곱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야곱이 변하기 위하여 자신을 닮은 라반과 함께 있어야 했다. 라반을 통하여 야곱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깨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 있었기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깨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할 수도, 자신을 비울 수 있다. 자기을 비우고,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모습 자체를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깨닫는다면, 환경의 높은 파도를 넘을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를 닮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라진다.
죄송합니다
누군가 오늘 새벽 제 아이디를 도용해서 영어 글을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님을 밝혀 드립니다.
주님의 진리와 은혜 안에서
진영정 목사 올림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
- 날짜: 2015년 1월 25일
- 제목: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
-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4절~22절
- 설교: 진영정 목사
좋아해, 사랑해
좋아해, 사랑해
창세기 28장 10절~22절
창세기 28장 12절, “꿈에 본즉 사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어머님이 카톡으로 좋아해와 사랑해의 차이를 적은 글을 보내 주셨다.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나로 인해 그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고,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된다. 지구가 멸망해서 탈출하는 우주선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은 내 옆자리에 태우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 자리를 주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건 “~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임에 불구하고,” “좋아해”를 들으면 가슴 설레고, “사랑해”를 들으면 눈문이 난다. 좋아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장점들 때문에,”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단점까지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꽃을 꺽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꽃에 물을 준다…(중략)…좋아하는 건 이 글을 보고 누군가를 떠오르고, 사랑하는 것 이 글을 보고 누군가 눈물이 날만큼 보고 싶다.
야곱이 아버지 에서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간다. 하란이라는 먼 곳으로 가는 여정 속에 고향을 떠나는 야곱, 집 떠나는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것도 야곱이 원해서 집을 떠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났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는 야곱, 특히 그 동안 야곱의 방패가 되어주었던 엄마 리브가를 떠나는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집을 한 번쯤 떠나 본 사람들은 야곱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야곱,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야곱에게 위로가 되시는 분이 계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하나님께서는 젖 먹이는 어머니가 아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사49:15). 젖 먹이는 어머니는 아이를 버릴 수 없다. 젖을 주어야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자연히 아이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젖먹이는 어미도 젖을 주어야 하는 아이를 버린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지고, 모든 사람이 우리를 떠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키시고,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좋아해와 사랑해의 차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해서 사는 사람인지의 차이이다. 우리의 필요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의 그림자
마음의 그림자
창세기 28장 1절~9절
창세기 28장 6절, 8절, “6절: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8절: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청개구리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엄마 개구리가 서쪽으로 가라고 말하면 동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가라면 남쪽으로 가라나는 아기 개구리 이야기다. 엄마가 말하는 반대로 행하는 아기 개구리는 자라서 어른 개구리가 되었다. 어느 날 엄마 개구리가 죽게 되었는데 산에다 묻으려고 말하면 강에다 묻을 것이니, 엄마 개구리는 아들 개구리에게 “강에다 나를 묻어달라”하고 유언을 남겼다. 아들 개구리는 이번에는 엄마 말에 반대로 행동하지 않고, 엄마 말을 따라서 강에다 묻었다. 어른 개구리는 그 후에 비만 오면 엄마가 떠내려갈 것을 염려하여 강 옆에서 “개굴, 개굴”하고 울었다는 청개구리 이야기이다.
에서는 부모들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부모가 바라는 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삭이 야곱에게 가나안 딸들 중에서 아내를 고르라고 말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에서는 이스마엘의 자손의 딸 중에서 하나를 아내로 맞이 하였다. 에서의 내면에 ‘거절’의 상처가 생겼다. 이삭이 에서를 ‘거절’하였기에 야곱만 축복하였다는 생각에서 에서는 아버지를 ‘거절’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를 거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부모와 자녀들 간에 벽이 두터워지고 있다. 또한 조부모와 부모 사이도 깊은 골이 깊다.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금이가고, 골이 깊어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서로에게 서로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면에서 생긴 감정의 풍선이 커져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감정은 분과 불만과 불안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들이 내면에서 쌓이면 폭발하게 된다. 폭발한 감정의 표현이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상처를 입히는 행동이다. 감정이 폭발하고 있다는 내면의 증상이 있다. 생활에 흥미가 없어지고, 밖에 나가려 하지 않고, 입 맛이 없고, 자살 충동이 있어서,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된다.
에서는 야곱과 경쟁을 하였다. 경쟁의 승자는 야곱이었다. 에서는 경쟁에서 패배가 아버지 이삭때문이라고 이삭에게 ‘탓’을 돌리고 있다. 에서는 경쟁에서 진 이유를 야곱에게서 찾고 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미워하였다(창27:41). 에서가 경쟁에서 진 이유가 무엇인가? 이삭이나 야곱때문이 아니라 에서때문이었다. 에서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결과였다. 에서의 강한 남자다움 속에 숨겨진 여린 마음의 그림자가 자신도 보지 않았고, 하나님도 보지 않게 하였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내면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말씀하신다.상대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이유가 우리의 내면에서 숨기고 싶어하는 그림자때문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