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붙잡을 것

오늘 붙잡을 것
요한복음19장 31절~42절

요한복음19장 36절,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UC San Diego에 딸이 샌디에고에서 금요일 날 집에 와서 토요일 날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로 일찍 돌아간 이유는 아파트를 같이 쓰는 선배 언니가 다니는 교회가 어떤지 방문하기 위하기 위함이었다. 딸이 쓰는 방에 선배 언니 둘과 함께 지내는데, 두 언니들은 새벽마다 일어나서 손 붙잡고 기도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손에 죽으셨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손에 죽으실 이유도 없고,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나님이시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실 수 있다. 온전한 육신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가 느끼는 모든 아픔, 괴로움, 기쁨, 평안 등을 경험하셨고, 우리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아이를 잃어 본 사람이 아이를 잃은 사람과 함께 아픔과 나눌 수 있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아픔을 겪었기에 우리와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또한 온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아픔을 온전하게 해결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사람이자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를 놓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땅에 흘려졌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하늘에 속한다. 그러나 땅의 것을 붙잡으면 땅에 속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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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잊을 일

오늘 잊을 일
요한복음 19장 17절~30절

요한복음19장 30절,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어제 아들에게 한 장의 생일 카드를 받았다. “가끔 내가 아빠 닮은 모습이 놀랍지? 나도 그래. 아들인 걸 어떻게 ㅋㅋㅋ, 매번 조언 해 줘서 고맙고. 흘려서 말해도 나는 가슴 깊이 다 새겨 듣고 있어…(중간 생략)…아빠는 벌써 최고의 아빠니까 내가 더 바랄게 없네.” 아들의 카드가 내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다. 나와 아들이 생일이 같은데 나는 아들의 생일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는데, 아들은 나를 위하여 카드에 100불을 넣어서 책값으로 유용하게 쓰길 원한다는 글과 함께 내게 카드를 주었다. 아들에게 생일편지를 받아보니 “주님 귀한 아들과 딸을 네게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말이 하나님께 절로 나왔다.

세상을 사는데 순례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피난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순례자는 자기가 원해서 떠나는 사람이고, 피난민은 환경에 의해서 밀려나는 사람이다. 순례자는 가진 것을 나누며 살지만, 피난민은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한다. 피난민은 많은 것을 가져도 감사가 없지만, 순례자는 작은 것에도 감사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순례자의 삶을 마치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승리한 믿음의 선배를 바라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본다. 조금 가지면 더 가지려고 하고, 조금 올라가면 더 올라가려고 하고, 조금 내려가면 주님을 원망하고, 시작은 주님을 위한다고 시작을 하였지만 끝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일들이 교회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에 소망을 갖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능력이 되었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다.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면 기쁨보다 후회 일이, 감사보다 회개할 일들이 더 많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시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오늘 우리가 잊을 일은 무엇인가? 아니 오늘 우리가 잊어야 시작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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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택한 반응

오늘 선택한 반응
요한복음 19장 1절~16절

요한복음19장 10절~11절,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친히 고난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해할 권한이 있었다. 주어진 권한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주셨는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묵묵히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피하려고 많은 수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 따라 고난에 대한 반응이 다르듯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나를 해할 권한을 주지 않았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힘을 써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쪽으로 빌라도의 힘과 권한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그의 권한과 힘을 써도 놓아 줄 수 없었을 때 빌라도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빌라도는 혹시 예수님이 정말 왕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각각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말씀 앞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 말씀을 회피하는 사람, 말씀에 저항하는 사람,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 말씀에 따라 살면서 기뻐하는 사람 등 사람의 반응은 각각 다를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은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고 말씀한다. 말씀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히브리서는 말한다. 말씀 앞에 오늘 우리가 선택한 반응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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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킬 것

오늘 지킬 것
요한복음 18장 28절~40절

요한복음18장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 다투는 것 하나가 자존심 싸움이다. Sparkling water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와 나눌 때 아내를 힘들게 한 적이 있다. 나는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오는 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아내는 sparkling water는 자연적으로 나오 물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인 물이 아니라고 하는 근거는 과학적으로 탄산이 물에 녹으려면 자연적인 압력을 넘는 높은 압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가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온다고 하였고, 아내가 주장하는 근거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듣거나 읽었기 때문이다.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내는 내게 20불 내기를 하지고 하였고, 나는 아내의 내기에 거절하였다. 그런데 내가 아내에게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온다는 상상력은 좋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아내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미쳤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내에게 말한 ‘상상력’은 ‘창조성’을 말하였는데…

개인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자존심이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존심 아래 있던 개인의 수치심이 올라와서 자기(self)를 허물기 때문이다. 자기가 수치심에 짓눌려서 힘든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받고 계시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빌라도에게 대답하신다. 왕과 진리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반대로 질문을 하면 왕이 거짓말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써 진리를 말하는 왕에 왕이심을 강조하신 말씀이라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세상이 예수님의 것이라면 예수님의 종들이 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세상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세상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나를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려고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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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택할 것

오늘 선택 할 것
요한복음18장 12절~27절

요한복음 18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루살렘을 여행하지 못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여행하다 보면 시온산 남쪽 중턱에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다고 한다. 통곡 교회 꼭대기를 닭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갈 때, 베드로는 문 밖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베드로 통곡교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교회 꼭대기에 닭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체포되기 전에 예언하셨다. 예수님의 예언에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자기는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담은 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거짓임이 밝혀졌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그것도 한 번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갈수록 부인의 강도가 강하여 졌다. 베드로는 한 번은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장면 가운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의 고난에는 어떠한 사람도 동참할 수 없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누구도 죽음을 선택해서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십자가의 길만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자기를 보호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다.

요즘 마지막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지진과 기근, 전쟁과 전염병, 특히 하늘의 징조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불안한 상황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우리는 떨 수 있다. 예수님 옆에 있으면 그 분의 당당함이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세상 옆에 있으면 세상의 불안과 공포가 우리에게 전해 질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쫓을지 아니면 어둠과 불안에서 건지실 예수님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을 선택하여 따르고 있는가? 불안인가? 당당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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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찾을 것

오늘 찾을 것
요한복음 18장1절~11절

요한복음18장 4절,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싸우는 싸움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다. 어제는 노트북의 자판이 움직이지 않아서 힘든 하루였다. 노트북 자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내가 웹사이트에 설교를 올리다가 바이러스가 노트북에 침투해서 자판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줄 알았다. 그리고 어제 올린 설교가 은혜가 있으니 설교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컴퓨터 수리 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설교가 은혜가 있으려나 보다’라는 생각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트북의 자판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아침에 물티슈로 노트북 자판을 닦고, 마른 종이로 닦았는데, 그 일을 하는 도중에 노트북 자판에 물이 들어가서 자판이 고장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아버지께 하는 고백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하신 말씀을 이루어지게하려합니다(요18:9)”이다. 내게 온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고백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살 때에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시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찾았고,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찾았고, 베드로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베려고 예수님 옆에 있었다. 저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가 달랐다. 자기가 원하는 마음의 동기를 이루려고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돈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인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헤어진 가족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하고 예수님께서 묻고 계시지만, 그 질문은 ‘너희는 예수님을 찾는 진정한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가?’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라는 질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가? 오늘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다시 “오늘 누구(무엇을)를 찾고 있느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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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머무를 곳

오늘 머무를 곳
요한복음17장 21절~26절

요한복음17장 21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계정부에 대하여 들어보았는가? 세계정부는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사람들을 통치하려는 기구를 말한다. 세계정부는 성경에서 시작된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되어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서 말하는 세계정부와는 내용이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세계정부는 개개인을 종으로 묶어 두어 개인을 통치하고 통제하여 한 통치자의 끝없는 욕심을 이루기 위한 정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개개인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어서 개인이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나라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게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나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도 하나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하나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지만, 세상이 원하는 하나는 속임수로 하나되게 한다.

그리스도인인과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거짓에 따라 산다면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 다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경쟁을 해야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산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신다(요17:24). 그러나 세상은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서로에게 주어진 것을 빼앗으면서 살라고 한다.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관을 따르는 이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 세상 안에 있으면 끊임없이 경쟁하고, 다투어 나누어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서로가 서로 안(한 몸)에 있어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오늘 우리가 머무를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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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남길 것

오늘 남길 것
요한복음17장 1절~20절

요한복음17장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돈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은 돈을 남길 것이고,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명예를 남길 것이고, 믿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믿음을 남길 것이다. 떠날 때 남긴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는 단서가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바란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을 지켜주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이유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이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이니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달라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였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이 남긴 것이 이어지도록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제자들과 남긴 것은 영생과 기쁨이다. 그러나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고, 제자들이 미움을 받아서 악에 빠질 것을 예수님은 염려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영광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을 예수님은 염려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제자들에게는 영생과 기쁨을 남기고 싶어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남기신 영생과 기쁨으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또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린 영생과 기쁨이 이어지기를 원하였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늘 남긴 인생의 발자국이 주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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