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서 챙겨야 할 일

바빠서 챙겨야 할 일
요한복음13장 12절~20절

요한복음13장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중년이 지나면서 중년의 위기를 겪는다. 융은 중년의 위기를 겪는 이유가 자기를 찾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즘 중년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자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에 바빠서, 삶에 찌들어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에게 발을 씻어 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서로의 발을 씻기 전에 알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는 것과 보냄을 받은 작 보내는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은 너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말이 아닌가?

그러나 좀더 깊이 묵상을 하면 서로 섬기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보낸 자가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서로에게 평등하도록 주장하지 말고,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평등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평등이란 각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녀들에게 가장 참기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중 하나가 “unfair(불평등)”이라는 단어이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달라는 자녀들의 요구이다. 자녀들이 말하는 평등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단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말하는 섬김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데서 나오는 단어이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포기할 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자기를 포기하였는데 어떻게 자기를 찾을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나를 바라볼 때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기를 찾으려고 거짓된 자기를 진정한 자기라고 착각하면서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참과 거짓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라 보낸 사람이 알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바쁘게 하여 거짓 자아를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한다. 바빠서 챙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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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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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3장1절~11절

요한복음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내가 부목사 생활을 할 때였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내게 “사람은 겪어 봐야 알아”라고 말하였다. 그때는 그 목사님의 말의 의미를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말한 대로 있는 그대로 보여진 그대로의 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산다. 이를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라고 말하고 각자가 맡은 사회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역할에 맞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기업에서 과장인 아버지가 있다면 집에서는 아버지의 특성, 직장에서는 과장의 특성, 교회에서는 성도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개인은 개인이 소속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성격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가져야 할 성격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으로 보여주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글 가운데 들어가서는 안된는 글이 사이에 들어가 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이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할려는 가롯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음을 의미한다.

한결같이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기란 어렵다. 상대방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하여도 인간 관계는 무너진다. 그런데 자기를 배신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배신하려는 사람을 그냥 둘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음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겨줄 때는 발을 씻기신 이유를 몰랐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의미를 깨달았다. 섬김은 종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낮은 자리에서 종을 섬기는 것이다. 주인이 낮은 자리에서 종을 섬기려면 ‘자기’가 살아 있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사람은 페르조나를 당연히 인정하고 있다. 물론 사회에서 살려면 사회에 맞는 역할의 특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면 뒤에 숨겨진 개인은 자신의 아픔을 상대방에게 내어 놓지 못하고, 진솔하게 그들을 대하지 못한다. 이는 페르조나는 ‘자기’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솔하고 솔직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가면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과 진솔한 만남이 시작이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기(?)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면놀이에서 해방되어 나를 찾는 진솔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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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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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장44절~50절

요한복음12장47절~48절,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나에 그를 심판하리라.”

음식점에 가서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이냐?”하고 물으면 음식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선택하라고 물으면 바로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선택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고, 선택이 쉬운 사람이 있다.

오늘 말씀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거절하고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부류의 사람들의 인생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을 거절하여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죄를 지을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유사하게 들린다. 이는 세상에서 행하는 법과 다르다. 세상의 법은 죄를 지을 의도가 있던 없던 심판한다. 죄를 지을 의도가 없는 사람은 ‘과실범’으로 심판하고, 죄를 지을 의도가 있는 사람은 ‘고의범’으로 처리한다. 과실범에게 주는 혜택이 있다면 고의범보다 과실범의 형벌을 낮추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려 한다. 그리고 될 있는 한 적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기 원하신다. 나를 거절한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면 나 같으면 가차없이 심판 할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에게도 영생의 기회를 주시기 원한다.

진리와 은혜의 균형을 갖춘 예수님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만 강조하여 옳고 그름만 따진다. 옳고 그름에 은혜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은혜만 강조하여 어떠한 죄도 넘어간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못하다. 두 종류의 사람 모두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진리, 진리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은혜에 편에 있는가? 아니면 진리의 편에 있는가? 은혜와 진리 사이에서 끊임없는 시소놀이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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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큐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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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장 37절~43절

요한복음12장 40절,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과 감각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는 깨닫기 어렵다. 예를 들면 신호등에서 가장 위에 있는 색깔은 무엇인가? 매일 신호등을 보지만 정작 신호등 맨 위에 있는 색깔이 어떤 색깔인지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 눈 앞에 나타나셨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주는데 어떠한 사람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나면 믿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나도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시고 들려주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복음12장 41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려고 혹은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셔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면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사람의 내면은 두렵워 떨게 된다. 모든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두려워 떤다. 마치 왕 앞에 서면 백성들이 두려워 떠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두렵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쫓아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부인하면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억압된 두려움은 다른 욕망을 쫓거나 사물이나 사람을 의지하게 한다.

오늘 말씀 중에서도 관리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많지만 그들이 드러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렇게 말하면 그들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출교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그들에게 존재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아직 사람의 영광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도 사람의 영광을 버리지 못하면 여전히 두려움이 존재하게 된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경외)하면 사람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영광은 순간이다. 사랑의 큐피트가 어디에 꽂히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이 사라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이 들어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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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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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20절~36절

요한복음12장34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사람들이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살기가 그 만큼 힘이 들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지금의 어려움과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로마의 시민이면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로마 시민의 종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로마는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지만, 로마시민과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의 양적인 삶의 차이는 있다. 양적인 삶이란 물질이 풍부한 삶을 말한다. 물질이 풍부하면 삶이 편안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이 정신적인 행복이나 영적인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을 첫번째 가치로 두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요12:16)”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소”하고 기도하니, “내가 이미 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너를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는 사실을 기도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온전한 인간의 인성으로 사셨던 것을 독자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인성으로 사신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릴 것이고, 그가 땅에서 들릴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다. 그 어떤 존재나 창조물이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없다. 그 분 스스로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던져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 땅에서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첫번째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행하여 할 가치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리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하늘로 들려져야 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이 흐르는 전율로 우리 마음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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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폭포수

떨러지는 폭포수
요한복음 12장 20절~36절

요한복음12장34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사람들이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살기가 그 만큼 힘이 들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지금의 어려움과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로마의 시민이면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로마 시민의 종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로마는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지만, 로마시민과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의 양적인 삶의 차이는 있다. 양적인 삶이란 물질이 풍부한 삶을 말한다. 물질이 풍부하면 삶이 편안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이 정신적인 행복이나 영적인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을 첫번째 가치로 두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요12:16)”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소”하고 기도하니, “내가 이미 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너를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는 사실을 기도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온전한 인간의 인성으로 사셨던 것을 독자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인성으로 사신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릴 것이고, 그가 땅에서 들릴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다. 그 어떤 존재나 창조물이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없다. 그 분 스스로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던져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 땅에서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첫번째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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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때

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때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요한복음12장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하고 한탄하는 소리와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그때 나의 대답은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이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새옹지마’의 뜻은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변화가 무쌍하여 복과 화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일들을 보고 복과 화를 판단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눈으로 복과 화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새옹지마는 눈으로 보이는 일들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판단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제자들도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다리가 아파서, 혹은 예수님이 조금 쉬고 싶어서 나귀를 타셨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나귀 타신 사건은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사건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건으로 제자들은 재해석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된 것이다. 믿음의 눈을 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기 위하였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왕이신 메시아셨어’라고 성경이 기록한 사실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때 나귀를 탄 예수님이 왕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나귀 탄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셨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지금 잘 되었다고 좋아할 것 없다. 그렇다고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어깨를 축 내릴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믿으면 지금 눈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내 눈으로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과거의 아픔과 눈물이 기쁨과 환호로 바뀌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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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꼬리, 뱀 머리

용 꼬리, 뱀 머리
요한복음12장 1절~11절

요한복음12장 8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일상생활에 바쁘다 보면 때로는 현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자리를 돌고 또 돌다가 지쳐버릴 때가 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문뜩 떠오르는 질문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의문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았을까?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가롯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까? 오늘 말씀에 나오지 않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이 된 후에 왕 다음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툰 것이나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툰 기록(막9:34; 10:37)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동기도 가롯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에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비싼 향수(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 발 아래 붓고, 여인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 백데나리온(근로자 300일치 급료)이었다. 아마도 마리아의 전 재산을 예수님께 드렸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가롯 유다는 마리아를 비난하였다;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었으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쉽게 돈을 이렇게 허비하느냐?”

이렇게 말한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가만 두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롯 유다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충고이다.

용의 꼬리가 되지 말고 뱀의 머리가 되라고 사람들은 충고한다. 용의 꼬리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결정하지 않지만, 뱀의 머리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결정해야 한다. 믿는 자로써 뱀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할 것과 나중에 포기해도 되는 것을 구별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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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동기, 선한 결과

악한 동기, 선한 결과
요한복음11장 45절~57절

요한복음11장 50절~52절, “50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절: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어수선하다. 곳곳에서 지진과 스나미, 전쟁과 기근이 멈추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만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들어내기를 좋아한다. 험악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심히 염려가 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을 그대로 두면 예수님을 믿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자는 말이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동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존경하여 두려워 떠는 것은 예배를 위한 두려움이지만, 지금 가야바가 느끼는 두려움은 육신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가야바의 지위를 지키지 못하면 육신의 욕구도 무너진다는 예견되는 결핍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육신을 지키려하는 가야바의 두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있다. 악한 동기도 하나님이 계시면 선한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회가 싸우고, 교회가 욕을 먹고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예측하지 못할 하나님의 선한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선한 동기를 가져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동기를 가진 악인을 통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기 보다는 성급하게 우리가 먼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대신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불신앙에서 나오는 행동이고, 불신앙은 육신을 앞세우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행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의 역할을 육신이 대신하는 교만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악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선한 일로 바꿀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이 염려가 되지만 소망이 있는 이유는 험한 세상 속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실 선한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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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 곁에 있는 자

떠나는 자, 곁에 있는 자
요한복음11장17절-44절

요한복음11장25절~26절,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한국에 있을 때 아내와 함께 어느 커피숍에 들어갔다. 나는 아이스 그린라테, 아내는 아이스 카페 라테를 주문하였다. 아내가 주문한 아이스 카페 라테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전에 부산에서 아이스 티가 나오지 않고 핫티가 나와서 아이스티를 주문했다고 하니 주인이 영수증을 보라고 한 것이 기억이나서 내가 영수증을 확인해야 하는데 확인하지 않아서 죄송하다고 말하였더니, 종업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이스카페라테로 바꾸어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이스카페 라테라고 분명히 주문했는데 주문을 받는 사람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받았고,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종업원은 아이스 아마레카노를 아이스 카페라테로 바꾸어 주었다.

오늘도 미국에서 한국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컴퓨터 밧데리가 다 되어서 밧데리를 사러 컴퓨터 수리점에 갔다. 밧데리 가격을 물어보니 컴퓨터 수리점에 계시는 직원이 40~50불이라고 말했다. 20불을 예치하고 밧데리를 주문하였다. 정확한 컴퓨터 모델을 알려달라고 해서 집에 와서 직원과 통화하고, 직원에게 정확한 밧데리 가격을 물었다. 그는 정확하게 50불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게에서 40불에서 50불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직원은 45불에서 50불 사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고 말하면서 밧데리는 3일 후에 오느냐고 물었다. 그때 수리 직원은 자기는 3일 후 온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3일에서 5일 걸린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수리 직원이 3일 후에 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또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침 없이 말한다. 특히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종업원은 자기를 변명하고, 손님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운다. 이런 이야기를 내 아내에게 하였더니, 내 아내는 세상이 각박해서 그렇다고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주’인 것은 믿지만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라고 믿지는 못하였다. 신앙 깊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마리아가 들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에서 울면서 “오빠 나사로가 살았을 때 예수님이 왔으면 살았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였다.

아무도 나사로가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여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과 뜻이 자기를 채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한발 더 나가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지 못하였다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아무도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죽은 나사로는 다시 사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도 예수님 곁에 있다면 살아 있는 말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 곁에 있어야 기적을 본다.

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는 자인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도 예수님 곁에 있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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