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장 차이

종이 한 장 차이
요한복음11장 1절~16절

요한복음11장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9월13일(토) 이라크 반군인 IS가 영국인 구호요원 데이비드 헤인즈(44)를 참수하였고 발표하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이라크 정부와 협력을 약속하는 장면을 보여 주면서, “이 영국인(헤인즈)은 당신의 약속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한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참혹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라는 의문은 계속 될 것이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좋을 때에 하나님을 보기란 더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을 만났지, 좋을 때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은 적다.

오늘 말씀 중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거나, 징계하는 사람들이 병이 들었으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생명이시지 죽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어느 형제를 만났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최근에 3명이나 잃었다고 내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어찌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있는가?”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늘 말씀에도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서 나사로의 여동생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사로의 여동생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빨리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오기를 원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나사로에게 달려 가지 않았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오히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를 향하여 떠나셨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향하여 가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양파껍질을 까도 또 양파 껍질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까도 까도 그 속을 모르는 양파와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으니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요3:16).

의심과 믿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어지고, 예수님을 등지면 의심하게 된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실족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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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아래 흐르는 물

마음 아래 흐르는 물
요한복음10장 22절~39절

요한복음10장32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즘 한국은 ‘소통’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소통이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뜻이나 생각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로 말이 통하려면 어떻게 할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여러 선한 일들을 너희에게 보였는데 그 중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요10:32)”하고 물으신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너(예수님)를 선한 일로 돌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을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한 일을 하셨는데 선한 일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선한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의 동기가 서로 달랐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하시는 동기(이유)는 유대인을 불쌍히 여겼기(사랑) 때문이고, 유대인들이 선한 일을 하는 동기는 ‘나’를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생의 자랑)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의 동기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싶어서(자기를 들어내고 싶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진 잘못된 선한 동기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유대인)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하고 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스스로가 자랑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귀하게 여기고,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신으로 나타내고 계시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선한 일에 대한 잘못된 동기를 바로 잡고자 하셨다.

같은 예수님을 보아도 마음의 동기에 따라 예수님이 달라 보인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마음의 동기에 따라 말씀이 칼날이 되어 마음을 쪼개기도 하고, 마음이 말씀을 삼키기도 한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생각과 뜻이 통하려면 마음에 소원이 같아야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 움직이는 욕구가 다르다면 서로 소통할 수 없다.

마음 아래 흐르는 물은 어떤 물인가? 그 물에 따라 예수님과 소통할 수 있기도 하고, 예수님과 벽을 쌓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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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없는 내일

오늘 없는 내일
요한복음10장 1절~18절

요한복음10장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어제(9월9일) 인천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에 올라탔다. 그 동안 아내하고 잘 지냈던 장모님을 혼자 두고 와야 했고,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든 어머님을 묵묵히 지켜 보아야만 했다. 비행기 티켓과 여권이 있는 사람은 공항 문을 들어가고, 비행기 티켓과 여권이 없는 사람들은 공항 문 밖에 있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문 밖에 있는 사람들과 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별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경계로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구별된다. 구원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은 부단히 노력하고, 영원히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없다. 진씨황제는 ‘불로초’를 찾아서 영원히 살려고 했지만 죽었고, 노인들도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죽는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성경은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말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을 빼앗기지 말아야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도둑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도둑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킬 힘이 없다. 선한 목자가 계셔야 ‘영원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일뿐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선한 목자가 계셔야 ‘영원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끝이 없다는 의미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 지켜지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오늘’을 지키는 일이고, 오늘을 지킨다는 것은 선한 목자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둑들은 오늘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 도둑들은 오늘이 없는 내일이 우리에게 있다고 속삭인다. 오늘을 내일로 미루게 하고, 오늘 하지 못한 것들은 충분히 내일 할 수 있다고 속인다. 거짓말로 오늘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오늘 없는 내일은 없고, 오늘을 지켜야 내일이 온다. 내일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은 오늘을 지켜야 얻을 수 있다.

오늘을 지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시다. 오늘을 지키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님의 문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예수님의 문 안으로 들어와야 ‘오늘’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도둑은 예수님의 문 밖에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속삭인다. 그리고 예수님 문 밖에 서서 오늘을 빼앗기고, 막연하게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속으면서 산다.

‘오늘’없는 내일은 없다. 오늘 지켜야 영생을 얻고,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지킬 때 주어지는 내일의 생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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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릴 꿈, 되찾아야 할 꿈

잃어버릴 꿈, 되찾아야 할 꿈
요한복음9장 35절~41절

요한복음9장35절~36절, “35절: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어제(9월8일) 작은 아버지 댁에 찾아갔다. 작은 어머님께서 맛있는 추석 아침상을 차려 주셨다. 작은 어머님은 힘들게 사시는데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작은 어머님의 아들이자 나의 사촌 동생이 의젓하게 잘 자랐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은 외고 출신으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과외라는 것을 할 수 없었고, 부모님들이 넉넉하지 못해서 충분하게 사촌동생을 돕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가졌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심이 깊다. 사촌동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승진도 싫고 가늘고 길게 회사에 오래 남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꿈, 보이지 않는 꿈, 이루기 쉬운 꿈, 이루기 어려운 꿈, 꿈의 종류가 다양하다. 오늘 말씀에서 나온 소경이 꿈이 있었다면 보이지 않던 눈이 보이는 것이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꿈을 이루고 나니, 더 이상의 다른 꿈은 생각할 수 없었다. 꿈을 잃어버린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꿈을 되찾으라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꿈을 찾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이 된다. 예수께서 소경을 만나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꿈을 잃어버린 소경에게 “인자를 믿느냐”하고 예수님이 물으셨더니, 소경은 “인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인자는 바로 나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소경은 “내가 당신을 믿고자 합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 이렇게 꿈을 잃어버린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자 꿈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믿음이 없는 꿈은 모래 위에 세워진 성이다. 믿음 없는 꿈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바리새인들도 믿음 위에 그들의 꿈을 세웠다. 그러나 잃어버릴 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꿈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워진 꿈이었다. 믿음으로 세워진 꿈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일이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달려가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버릴 꿈과 되찾아야 할 꿈을 혼동하고 있다.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한국이 잃어버릴 꿈과 되찾아야 할 꿈을 모르고 있다. 잃어버려야 할 꿈은 잃어버려도 된다. 그러나 되찾아야 할 꿈은 찾아야 한다. 믿음을 찾아야 꿈을 되찾을 수 있다. 잃어버릴 꿈을 잊고, 되찾아야 할 꿈을 되찾으면 젊은이들은 생기가 돌고, 열정이 생기고,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질 것이다.

잃어버릴 꿈은 무엇이고 되찾아야 할 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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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토끼

호랑이와 토끼
요한복음9장13절~34절

요한복음9장16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오늘(9월8일)은 한국의 명절 추석이다. 예전에 추석의 여인들은 음식을 하랴, 마켓에서 장을 보랴, 손님을 맞이하랴 바쁜 날이다. 그러나 요즘 추석은 자녀들만이 학원 다니라 바쁘다. 한국인들이 추석을 최대의 명절 중에 하나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곡식을 풍성하게 맺게 하신 ‘그 누구에게’ 감사하고, 같이 농사 지었던 사람들과 서로 기쁨을 나누려고 하였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사실인지, 만약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사실이라면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었던 다툼 아닌 다툼이다. 다툼 아닌 다툼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눈을 뜬 사실을 알았고, 또한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뿐이라는 것을 율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9:31, 33).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9:16).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이고,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율법이 그들을 살리지 못하고 죽였다. 그들이 율법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라고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되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율법은 바리새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거부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없을까? 누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일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또한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뜻은 죄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지위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마귀를 멸한다는 뜻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 전쟁에 승리하면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뜻은 이 땅에서 영적 승리가 하늘 나라의 영적 승리로 이어지면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영육간으로 회복 것을 의미 한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인 왕을 몰아내고 토끼인 ‘내’가 왕이 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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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본 이정표

거꾸로 본 이정표
요한복음 9장 1절~12절

요한복음9장 2절~3절,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보모니이까,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제(9월5일) 한 형제를 만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마귀에 들렸다, 탕자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괴롭다고 말했다. 그 형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자신이 죽기까지 희생하였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은 지키려 하면 잃게 되고, 버리면 얻게 된다. 목숨을 얻으려 하면 죽게 되고, 목숨을 버리면 살게 된다. 노력하면 물질은 얻을 수 있지만,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옛 어른들은 사람의 마음을 갈대라고 말하기도 하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맑은 물은 보면 알지만 까만 사람의 마음은 보아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사람 관계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죄에 대한 돌이킴(회개)은 내 마음을 깨끗하게 보게 한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유대의 소경이나 절름발이 등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죄로 인한 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습관이나 전통을 완전히 뒤집고 계셨다.

예수님은 죄의 손가락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로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죄는 인간을 죽게 하고, 인간을 병들게 하였다. 죄는 기쁨보다 슬픔을 화평보다 다툼을 가져온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기쁨이나 화평은 없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뱀의 말을 따른 결과였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가 죄이다. 죄는 알면서 따라야 할 것을 따르지 않고, 알면서 의도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마음의 결과이다.

죄는 마음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죄는 다른 사람의 죄는 깨끗하게 보이게 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흐리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흐린 눈을 씻고, 지금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죄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요9:3).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도 ‘나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죽어가고, 나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산다. 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어제 만난 형제는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할 ‘소경’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부르는 사인이고, 하나님께서 그 형제와 직접 만나고 싶다는 하나님 사랑의 사인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정표를 거꾸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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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과 세상

거미줄과 세상
요한복음 8장 31절~51절

요한복음8장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월요일(9월1일) 사천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갔었다. 예전에 아버님 산소까지 길이 있었는데 길이 없어지고, 대신 집이 들어섰다. 그래서 집을 돌아 험한 산길을 거쳐 아버님 산소에 갈 수 가 있었다. 여동생은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포도주를 무덤 위에 뿌리고, 산소 앞에서 바다를 보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아버님 같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산소 앞에서 여러 생각이 스치는지 말이 없었다.

무덤 앞에 묘비가 있었는데 묘비 위 앞 뒤로 두 마리 거미가 자리 잡았다. 나는 손으로 잡지 못하고, 구두를 벗고, 구두로 거미를 내리쳤다. 그리고 여동생이 무덤 앞에 놓아 둘 꽃을 쌓았던 비닐로 거미와 거미줄을 닦아 냈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거미와 거미줄이 스쳐 지나간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서 곤충을 거미줄로 유혹하여 걸려든 곤충을 먹고 산다. 거미는 거미줄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려드는 곤충이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거미가 바라보는 거미줄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과 비슷하다.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 뿐인 세상이고, 하나 뿐인 인생이라고 믿으면서 산다. 사람들은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혀 산다.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히면, 거미줄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몸을 흔들어 나가려면 나갈수록 세상의 거미줄은 점점 몸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힌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의 거미줄에 잡힌 사람들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거미줄 속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몸이 엉기게 되고, 점점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 지쳐 거미줄 속에서 죽게 된다. 세상의 거미줄은 거미줄에 잡힌 사람들이 계속해서 몸부림치도록 격려한다; “너는 경쟁에서 이겨야 해, 경쟁에서 이겨야 세상의 거미줄에서 살아날 수 있어.” 그러나 세상의 거미줄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점점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포기하게 하여 죽게 하는 마력이 있다. 세상의 거미줄에 걸린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와 논리 속에서 점점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들은 거미줄 속에서 굶어 죽게 된다.

유대인 역시 세상의 거미줄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거미줄에 붙잡힌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살 길을 보여 주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거미줄에 걸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듣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였다. 유대인은 예수님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대인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였다. “네가 아브라함보다 크냐? 네가 아직 오십이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하고, 유대인은 예수님께 말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하였다. 유대인을 둘러 쌓고 있는 세상의 거미줄이 유대인의 눈과 귀를 닫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거미는 거미줄만 보인다. 거미줄 밖에 세상은 모른다. 거미는 거미줄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거미는 거미줄 밖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거미는 거미줄에 갇힐 곤충만 기다리고 있다.

세상의 거미줄도 거미줄에 잡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거미줄에 붙들리면 스스로 끊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세상의 거미줄에 갇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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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 다른 삶

같은 길, 다른 삶
요한복음 8장 20절~30절

요한복음 8장 20절,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길’을 그리게 하는 미술 치료가 있다. 사람마다 길을 그리라고 하면 서로 다른 길을 그린다. 그들이 그린 길은 그들의 내면을 표현한다. 오솔길, 언덕길, 큰 길, 작은 길, 교차로가 있는 길, 교차로가 없는 길, 나무가 있는 길, 꽃이 많은 길 등 여러 모양의 길을 그린다. 각기 그린 ‘길’을 내담자에게 설명하게 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내면의 세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 “내가 간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가면 너희들이 나를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대비가 되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에 오신 이유가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고(요3:17)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다른 말씀을 하신다; “너희들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다.”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진리인가?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인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너희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도 예수님을 믿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시험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고난을 주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각자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하나님이 참 모습일까?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나타나신다. 무서운 하나님이면 무서운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난의 하나님은 고난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요즘은 ‘사랑의 하나님’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바르게 인도하는 사랑이 있다. 사랑에는 ‘당근과 채찍’이 있다. 즉 사랑은 무조건적인 헌신과 바르게 인도하는 징계가 포함이 되어 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계3:19).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자신의 하나님’은 무조건 자신을 용서해야 되지만, 다른 사람은 무조건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는 마음의 경향성이 있다. 이러한 마음의 경향성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의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에 들보를 보라(마7:4)고 말씀하신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의 경향성은 나의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불하는 대가는 ‘나의 기쁨’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값을 지불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지 ‘내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 보면 된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나의 기쁨’을 쫓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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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잡초

꽃과 잡초
요한복음8장 12절~20절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2011년 MBC 창사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5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사회상을 그려내려고 했지만, 그 드라마는 밝은 부분보다는 어두운 부분을 더 많이 그려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빛이 비추면 그림자가 지게 된다. 사물 스스로가 빛이 되어야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그림자는 사물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이다.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게 되면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자라고 있던 부분들이 보인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자라고 있던 잡초들은 다른 반응을 한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잡초들은 세 가지 반응을 한다. 빛을 피하거나, 빛을 저항하거나, 빛 속에 사라진다. 첫째, 바리새인들, 서기관, 제사장들은 빛이 비추자 빛을 향하여 강하게 저항하였다. 빛이 세상에 비추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빛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다. 빛을 향하여 어둠이라고 말하고, 빛이 세상에 비추지 못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군중들은 빛이 비추자 빛을 피하려고 하였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제사장,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빛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군중들은 어둠 속에 자란 잡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빛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빛을 지켜 보았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빛이 비추자 모든 것을 버리고 빛을 따랐다. 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빛과 함께 하였다. 빛이 제자들에게 비추자, 제자들이 모르던 잡초들의 속성이 들어났다. 빛이 세상의 왕이 되시면 왕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가 싸웠다, 한 제자는 잡초의 욕심이 더 커져서 빛을 세상에 넘겼다. 다른 한 제자는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자 잡초의 두려움이 커져서 빛을 부인하게 되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빛이 사라지자 잡초가 익숙한 세상 속으로 몸을 숨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사라진다. 어둠이 사라지면 어둠 속에 자라던 잡초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이 자라기 시작한다. 잡초가 죽고, 꽃이 자라려면 빛 속에 있는지 어둠 속에 있는지 스스로 진단하여야 한다.

빛과 어둠의 속성을 살피면 잡초인지 꽃인지 알 수 있다. 빛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빛은 육체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빛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빛은 참되다. 빛은 혼자 계시지 않고 보내신 분과 함께 하신다. 그러나 어둠은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둠은 육체에 따라 판단한다. 모든 사람을 어둠의 잣대로 판단한다. 어둠은 빛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늘 혼자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신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빛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다니게 된다. 빛을 따르는지 어둠을 따르는지는 “내게 빛의 속성이 있는지 어둠의 속성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면 안다. 그러면 내가 잡초인지 아름다운 꽃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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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성경, 살리는 성경

죽이는 성경, 살리는 성경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요한복음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부자가 되었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들의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하나 뿐인 자녀는 자기만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5세정도의 아이를 둔 부모가 이혼하는 비율이 예전보다 더 높아져서 지금 5세의 아이의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고 있다. 노인들은 자녀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삶의 초점을 즐기고 먹는 것에 두고 있다. 예전의 가정은 서로 헌신하는 가정이었는데 지금의 가정은 서로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유대의 율법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있었다. 특히 율법을 지켜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면 로마법을 어긴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면 유대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판결을 하던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법에 따라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다. 아마도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였던 사람들의 죄를 땅에다 쓰셨을 것이다. 그러자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였던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마지막에는 간음한 여인 한 사람만 예수님 옆에 남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너를 고발한 사람들이 있느냐?”하고 물으니, 간음한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무기가 되지만, 요리사가 칼을 사용하면 맛있는 음식이 된다. 도구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성경은 살리는 말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는 말씀이 된다. 성경을 자기에게 적용하면 살리는 성경이 되지만, 성경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죽이는 성경이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어떤 성경일까? 죽이는 성경일까 아니면 살리는 성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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