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낳는 기억

기적 낳는 기억
요한복음 6장 1절~16절

요한복음 6장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면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살다 보면 기적을 보고 싶은 때가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기적은 가장 어려운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황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반적인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일반적인 현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을 기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오늘 말씀은 두 사람의 믿음의 대조를 보여 준다. 빌립의 믿음은 보이는 현상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장정만 오천명)을 먹이시려고 하였다. 그때 빌립은 이 많은 무리에게 양식을 사서 먹일 곳을 찾을 수도 없고, 사서 먹일 곳을 찾는다고 해도 돈이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먹이자고 말했을 때 안드레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가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어 보았다.

안드레는 예전에 엘리사가 이곳에서 했던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게 되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엘리사의 때에 흉년이 들었다. 엘리사의 제자들이 굶어 죽게 되었는 때에 엘리사는 보리떡 이십개와 몇 개의 채소를 가지고 백 명의 제자들을 먹고 남았다(왕하4:43-44). 말씀에 따라 말도 되지 않은 일에 순종하였더니 엘리사는 얼마 되지 않은 음식으로 제자들 백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을 만한 양식을 줄 수 있었다. 안드레는 엘리야가 백명의 제자를 먹인 일을 기억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상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말씀을 기억하였더니 안드레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예수님의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한다면 평범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매일이 기적일 것이다. 살아 숨쉬는 것도 기적이요, 음식이 들어가서 소화가 되는 것도 기적이요, 말씀을 기억하는 것도 기적이다. 기억은 기적을 낳는다. 평범한 일에 기적이 있다.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기억할 때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상적인 상황,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내가 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에 가장 마지막 희망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늘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신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기억할 때 평범한 삶에서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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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선율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은 예전 고등학교 학생들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한다고 ESL 고등학교 선생님이 푸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학생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은 부모가 예전 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진실함이 사라져가고 있는 단면을 보이고 있다.

한국 730보궐 선거에서 두 사람이 이름이 거론이 된다. 나경원, 이정현 의원이다. 특히 이정현 의원은 순천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서갑원 후보를 이겨서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새누리당은 전라도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이정현 의원이 기존의 새누리당의 선입관과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전라도지역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정현 의원이 국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의 성실과 진정성이 순천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진실함이 순천지역의 주민의 마음을 얻은 원동력이었다 생각한다. 자전거로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한 표를 호소하는 이정현 의원의 모습에서 진실의 힘을 몸으로 표현하였다. 한 마디로 몸으로 보인 ‘정직’이 기적을 일으켰다.

가족 상담에서 가족이든 개인이든 가지고 있는 문제를 치료하려면 가족이나 개인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치료할 수 있다. 문제를 치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힘이 정직이다. 정직하게 가지고 있는 문제를 인정하고 정직하게 문제를 상담자에게 말하여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정직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거짓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정직’이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들어내면 불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나를 감추면 감출수록 다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이용할 사람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힘이 ‘정직’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힘은 정직 속에 담겨져 있는 진정성이다. 건달은 자신의 주먹을 믿고 주먹으로 사람을 친다. 건달은 사회의 부정적인 한 시각이 분명하지만 건달이 보이는 ‘악한 정직(?)’이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

진정성은 ‘integrity’로 투명한 마음을 말한다. 음악에서도 작곡자의 마음이 곡에 정직하게 담겨질 때 그 선율이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투명한 선율이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투명한 선율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힘이 된다. 그러한 투명한 선율을 그리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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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음성

들리지 않는 음성
요한복음 5장 30절~47절

요한복음5장 37절~38절, “37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대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지만 곧 손에서 책을 놓게 된다. 책대로 해보아도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보다 더 자녀와 대화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보다 더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 책대로 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오늘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둘째, 성경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첫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두 번째는 성경을 탐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은 부드러운 말일까 아니면 엄한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은 큰 소리일까? 아니면 작은 소리일까? 하고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궁금하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1년, 2년, 3년 지속이 되면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면 우리와 생각하지 못하였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있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셨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의 감각 넘어 있어서 인간이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환경에서, 때로는 설교로, 어떤 때에는 밖에서 직접 들리는 음성(사무엘이 들었던 음성)으로, 어떤 때에는 마음에서 들리는 작은 음성(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소리)으로 우리와 대화를 하신다. 하나님과 대화 중에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도 있지만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나를 지지하는 말은 들리고, 나를 반대하고 거절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요5:43)”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왔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뒤로 숨으시고 아버지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의 모습이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서로 소통하는 모습이다.

나를 나타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여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지 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들려주시는 들리지 않는 음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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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아래 있는 영생

죽음 아래 있는 영생
요한복음 5장 19절~29절

요한복음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장례식장에 가보면 죽은 자를 애도하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유교적인 관습으로는 자녀들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질문을 해 본다.

오늘 말씀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 때’라고 말한다. ‘이 때’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현재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죽으면, 죽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영생의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말씀하신 영생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다는 말이다. 영생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현재 완료형을 쓴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현재에 이루어진 사실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생의 말씀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의 공통점은 ‘지금’ 영생이 내게 주어졌음을 보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고 외친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말해도 믿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망’에 있음을 진실로 강조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다시 살린다는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었음을 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아직 ‘사망’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영생은 어디에 있는가? 영생이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 진나라 진씨황제도 ‘불로초’를 찾아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오늘도 사람들은 영생을 먼 곳에서 찾고 있다. 영생을 먼 곳에서 찾는 이유는 육신의 욕망으로 영생을 찾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한 것을 듣지 않고 다른 소리들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않고 영웅들이 한 일들을 바라 본다. 육신의 욕망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높아지려 한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영생을 가까운 곳에서 찾지 않고 먼 곳에서 찾게 한다. 영생이 먼 곳에 있어야 ‘자기’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면 찾지 못한다. 자기의 힘으로 영생을 찾으려 하지만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님도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5:19)”고 말씀하신다. 영생과 죽음은 바로 옆에 있는데 영생을 찾기 위하여 먼 곳에서 헤매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요, 영생을 가까이서 얻으려 하면 살 것이다.

죽음 아래 영생이 있다. 자기를 높이면 죽지만 자기를 낮추면 생명을 얻는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아래 있고, 죽음에서 자기를 낮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살지만, 죽음에서 자기를 높이면 죽기 때문이다. 죽음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는가? 몸을 낮추는가 아니면 몸을 높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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