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0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진영정 목사의 블로그
시편 120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 하신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도 하신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에 장사를 지내는 일,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일, 부활 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일,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 하셨던 일이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요 3:16 참조) 세상에서 마귀를 멸하시는 계획(요일 3:8 참조)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다 행하시고 난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은 죄에 속한 인류에게 예수님의 DNA를 전해 주는 길을 여신 일이었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 박사가 사라진 공룡을 복제하였다. 고고학자가 사라진 공룡을 어떻게 복제 하였는가 물었더니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모기가 화석이 되었고, 화석이 된 모기에 있던 공룡의 피를 추출하여 공룡을 복제하였다. 공룡의 피 안에 DNA가 있고, 그 DNA는 공룡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와 같다”고 박사는 고고학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DNA를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다 이루신 일’은 우리가 예수님의 DNA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신 일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영적 DNA를 갖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일이다.
예수님의 메아리
마태복음 27장 46절
마태복음 27장 46절, “제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혼자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겪으셨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는 아픔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랑하는 부모와 헤어지는 아픔, 사랑하는 자녀들과 헤어지는 아픔,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는 아픔이다. 헤어지는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은 부모와 자녀가 헤어지는 아픔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크면 클수록 헤어짐의 아픔은 더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아픔을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고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분리될 수 있는가? 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을 겪고 계셨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보이고 계시지만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난과 조롱의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비록 예수님께서 원수의 손에 넘겨졌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건지시리라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메아리이다.
오늘 예수님의 메아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경험하고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된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47절~48절을 보면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셨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하신 말씀, 즉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말을 가지고 마리아는 모든 믿는 형제 자매의 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을 맡길 때에 하시는 말씀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고, 베드로가 “네,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다. 다른 제자가 복음을 세우고 교회들을 세워나갈 때 마리아를 맡은 요한은 마리아만 돌보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메세지가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는 일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메세지이다. 즉 가정이 세워져야 교회는 세워진다는 예수님의 메세지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교회는 가정을 돌보고 사랑하는 데서 교회는 세워진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계시다.
발자국
-김 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거룩을 위한 노력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너희 몸을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교인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거룩이라는 뜻은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소의 발굽이 둘로 나누어진 것처럼 교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거룩해진다.
교인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영적인 면만 추구한다면 거룩해질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늘 말씀에서 거룩의 부분에는 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교인들 중에는 육신의 부분을 무시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육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절제한다. 이러한 절제훈련으로 영적인 뛰어남을 보인 사람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종류의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육적인 면도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인은 영적인 은혜도 받아야 하지만 육신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은혜도 있어야 한다.
우리의 거룩은 육신과 영의 시소 속에 있다. 우리의 육신이 힘이 들고 아파서 육신의 쪽으로 시소가 내려가 있다면 내려간 부분이 우리 거룩의 수준이다. 반대로 영적전쟁으로 영이 지치고 힘들어 영쪽인 부분으로 시소가 내려가 있다면 내려간 부분이 우리 거룩의 수준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은 육과 영이 누르는 힘이 비슷하여 시소가 균형을 이룰 때이다. 우리는 거룩을 위하여 영적전쟁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육신에 대한 돌봄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육신에 대한 돌봄을 Self-care(자신을 돌보는 시간)라고 한다. 우리는 영적전쟁을 통하여 성장해가지만, 동시에 육신을 돌보는 행위가 있어야 거룩해질 수 있다. 즉 영과 육의 시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가 거룩해지고, 거룩한 산제사를 주님께 드리게 된다.
첫 사랑
누가복음 14장 21절
누가복음 14장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예수님이 초청한 천국은 성대한 저녁에 초대 받은 부름이라고 말씀하신다. 주인이 큰 잔치에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와 가족에 대한 이유 때문에 초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주인은 종에게 거리에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큰 잔치에 초청하라고 명한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도 위와 비슷한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교회를 향한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가 잃었던 첫 사랑은 요한계시록 2장 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이 두 말씀은 같은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이 에베소 교회에 없었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를 하였지만 믿음이 없었고, 수고는 하였는데 사랑이 없었고, 인내를 하였지만 소망이 없었다. 아무리 헌신하고, 수고하고, 인내하여도 믿음, 사랑, 소망이 없는 헌신, 수고, 인내는 아무 열매가 없는 수고가 된다.
오늘 날 교회에 열매가 사라지는 이유도 형식적으로 굳은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을 부르짖고, 사람들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한다. 또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도 인내하며 신앙을 지킨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주님을 처음 만날 때 넘쳤던 첫 사랑의 회복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작은 지체인 우리가 ‘첫 사랑’을 회복한다면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가 회복하고, 교회의 회복이 되다면 회복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여전보다 큰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자기 중심성
마태복음 6장 33절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을 구하라는 말인지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모습을 알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구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모습은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말한다. 첫 아담은 자기 중심성에 넘어졌고, 둘째 아담은 자기 중심성을 넘어섰다. 하와가 자기 중심성에 넘어저 선악과를 먹고 그녀의 남편에게 주었지만, 예수님은 40일 금식 후에 사탄에 이끌려 자기중심성에 대한 시험을 보았지만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이 경건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야1:27).”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습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가난
고린도후서 8장 9절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마게도냐의 가난한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헌금을 하였다. 그러나 부자인 고린도교회는 헌금을 하고 있지 않았다. 고린도교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니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마게도냐교인들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가난 가운데 풍성한 헌금하였고,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제자로 부르셨다. 가난한 제자들이 세상을 바꾸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 중에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과 핍박 받는 자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이 모인 초대교회가 로마를 바꾸었다. 한국에도 복음을 듣고 처음 믿었던 분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가난한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의 교회에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고, 한국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한국은 부요해졌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교인들이다. 가난한 교인들이 교회를 바꾸고, 가난한 교회가 세상을 바꾼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초봄
-정 완영-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 빛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 꽃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