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훈련의 시작

영성훈련의 시작
창세기 22장 14절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려면 갖추어질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믿음의 갈등을 넘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심정을 생각해 보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신 심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슷한 모습 같으나 죽이려하는 근본 동기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때문에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때문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는가?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성숙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받칠 수 있었던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이다(King James 참조: I know that thou(You) fearest God). 두려워한다는 뜻은 글자 그대로 위대한 하나님 앞에 무서워 떤다는 뜻이다.

우리가 귀신을 두려워하면 귀신을 보고 떤다. 귀신을 보고 떠는 이유는 귀신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갈까봐 두려워한다. 우리가 돈을 두려워하면 돈이 없어질까봐 떤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사라질까봐 떤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자 이삭을 잃게되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잃게되는 두려움이 더 컸기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생명이라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나 존재 앞에서 떤다. 만약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나 권력이라면 돈과 권력을 빼앗아 버리는 것들이나 존재 앞에서 떤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게 되는 생각이나 마음 혹은 행동을 피하게 될 것이다. 영성훈련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찬양의 능력

찬양의 능력
예레미야 애가 3장 20절~22절

예레미야 애가 3장 20절~22절, “20절: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절: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가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낙심을 소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높이는 능력을 키워준다. 찬양은 일이 잘 풀리거나 기분이 좋을때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찬양은 가능하다. 죽을 위험이 있는 감옥에서 있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감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이 매인 것이 다 벗겨진지라(행16:26-27).

찬양은 바울을 묶은 환경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오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찬양하였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깊은 신음 속에서 기도하였던 예레미야는 자기를 묶고 있는 환경의 사슬을 풀어 줄 수 있는 능력은 찬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낙심할 일이 많이 있다. 낙심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맥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찬양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 소리를 듣고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찬양이 우리의 극한 상황의 묶임을 풀어 줄 수 있는데 우리가 찬양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찬양의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극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찬양드렸던 다윗을 보라. 다윗은 찬양을 드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왜냐하면 다윗이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극한 상황 속에서 다윗을 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잠잠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태풍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우리에게 태풍의 눈이 주는 고요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이는 태풍이 불 때 태풍 밖에는 모든 환경을 부서트리고 있지만, 태풍의 눈은 가장 잠잠하고, 평안한 자연의 이치와 비슷하다.

하나님 경험하기

하나님 경험하기
스바냐 3장 17절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체스턴(G.K, Chesterton)은 영원한 남자(The everlasting ma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사람이 기도할 수 없게 된다면 입에 재갈 물린 느낌이 들 것이며, 만약 사람이 무릎을 꿇지 못하게 된다면 마치 발에 차꼬가 채인 사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궁극적인 가치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가치를 찾아 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이 돈, 성공, 명예, 신조, 대의 등에서 찾아 자신의 궁극적인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가치를 채우려 한다. 자신을 벗어나 갈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령으로 채우려 한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거룩하시고, 사랑의 영이시다. 거룩한 사랑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질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에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하나님만을 찾아 갈망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한다. 어린 아이가 오직 젖을 찾아 헤매는 것 같이 그러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멍에

나의 멍에
마태복음 11장 30절

마태복음 11장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예수님께로 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온 자들은 모두 쉼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cf: 마11:29).” 예수님에게 다가 온 사람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란 무엇인가? 멍에란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꺽기 모양의 막대를 말한다. 예수님과 나를 함께 묶은 막대기가 멍에이다. 멍에는 예수님과 나를 함께하게 하는 장치이다. 같은 멍에를 메면, 우리가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뒤에 있으면 찢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뒤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뒤에 있게 되고, 욕심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멍에는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열정으로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지게한다.

우리가 믿음과 열정을 가지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함께 조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성훈련은 운동선수들이 운동을 잘하기 위하여 몸을 단련하는 훈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게 되는 훈련이 영성훈련다. 영성훈련은 우리를 높이거나, 멋있어 보이게 하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환경을 넘어 서기

환경을 넘어 서기
사도행전 2장 42절

사도행전 2장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알려는 열망이 있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가 가까이하려 하자 환경은 어려워졌고, 외부의 박해도 심해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15:17-18). 초대교회가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도움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초대교회가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가? 초대교회가 필요한 도움은 영성훈련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교회가 어려움을 직면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 방법을 가르쳐준다.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훈련 방법은 긍휼훈련(행3장), 증거와 중보 그리고 분리 훈련(행4장), 섬김훈련(행7장),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리는 훈련(행3:1; 10:9), 금식훈련(행14:23), 분별훈련(행15장)이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성인이라고 불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을 위하여 자신을 훈련했음을 알 수 있다. 각 성인들 마다 각자의 훈련 방법이 있다. 처음에 그들에게 영성훈련으로 많은 부담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자유를 느꼈다. 왜냐하면 영성훈련은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을 맛본 성인들은 자기를 구속하고 있던 많은 부분들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에게 영성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환경의 어려움과 유혹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위함이다. 어려운 환경과 고통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환경을 움직여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깊은 사랑과 자유를 주고 싶어 하신다.

깨지는 아픔

깨지는 아픔
마태복음 15장 8절~9절

마태복음 15장 8절~9절, “ 8절: 이 백성들은 입술로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그들은 영성훈련을 한다. 영성훈련에는 기도, 묵상, 예배, 청지기의 삶, 교제, 섬김, 성경공부들이 있다. 이러한 영성훈련을 아무리해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리드도인들을 변화하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분은 그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바울은 사람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사람의 명령과 가르침 혹은 훈련)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2:23).”

예수님도 스스로 영적이 수준이 높다고 말하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질책하신다.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느냐?” 그들은 자기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기의 습관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으로 하나님을 따르려 한다면 그러한 방법은 사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과 습관이 깨어져야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뜻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생각은 점점 굳어가고, 같은 행동과 습관을 고집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성은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 말, 행동, 습관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에 반응한다면 자기가 깨어지게 된다. 우리에게 자기가 깨지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한 발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달라진 모습

달라진 모습
마가복음 5장 18절~19절

마가복음 5장 18절~19절, “1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에 들려서 무덤을 헤매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정신이 온전해졌다. 마귀에 사로잡혔던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그의 가정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들에게 알게 하라(막5:19).”

예수님이 그의 청함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그는 귀신들린 사람으로 살았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려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그를 낫게 해주셨는지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와 함께 할 것이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인생도 달라질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는지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그를 놀랍게 여겼다(막5:20).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힘이 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등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이유들은 더 이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문제들은 해결되고, 우리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가족과 친구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어한다.

지금 구하는 것

지금 구하는 것
마태복음 20장 32절~33절

마태복음 20장 32절~33절,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절: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애들 알버그 칼훈(Adele Ahlberg Calhoun)의 영성훈련 핸드북(Spiritual Discipline Handbook) 서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한 질문들이 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정말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긴 하나요?” “그렇게 성경을 읽는데도 왜 얻는 게 하나도 없죠?” “성경을 읽으면 남편이 언어 폭력을 쓸 때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는 영원한가요?” “내가 기도할 시간도 없이 바쁘다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이 한 질문들의 요점은 정신없이 바쁘고, 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이 삶에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힐링(healing)할 수 있느냐는 질문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야 삶의 상처가 아물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느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계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면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상처 받은 삶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힐링(healing)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지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쉬게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주님의 사랑과 힐링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과 쉼을 얻으려면 우리의 간절한 원함이 있어야한다. 오늘 말씀에서 나온 여리고 성에 있던 두 맹인들이 눈을 뜬 이유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가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눈을 뜨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얻으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우리가 그 분의 힐링을 얻게 된다. 우리가 지금 간절히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 알기

하나님 사랑 알기
요한복음6장 44절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고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인간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고 계신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찾고 계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우리는 세 단계의 반응을 거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드려야 한다. 셋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까지 기다린다. 즉 믿음, 순종, 인내가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 삶에 하나님 사랑이 넘치게 한다.

부름의 반응

부름의 반응
창세기 3장 9절

창세기 3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첫 남자와 첫 여자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에베소서 1장 4절에 그 답이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을 받으려고 창조되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다. 아담은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죄였다.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하나님의 찾으심을 한번 느껴보자. 무엇이 느껴지는가? 자녀를 잃은 부모의 부르짖음이 느껴진다.

주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지금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애타게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애타게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신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과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을 지키는 것은 사랑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관계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찾고 계실 때 우리가 아담처럼 숨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간다면 주님과 만나 그 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려면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부름에 대한 반응이 주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