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 음성

세미한 음성
열왕기상 19장 9절

열왕기상19절 9절,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셨다. 위로를 받고 찾아간 곳이 호렙산의 굴이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호렙산 굴에 있는 이유를 물으셨다. 엘리아가 대답하기를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약속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왕상19:10 표준새번역).”

사람에게 종종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위기이다. 위기의 순간을 우리는 피하고 싶다. 위기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 왜냐하면 위기라는 바깥 소음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법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위기의 언덕 뒤에 있는 찬양대의 찬양과 연주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헨리 나우웬(Henri J.M Nouew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적인 생활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 올리는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사랑의 나라로 들림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고 해서 그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 마음에 있는 잡념들을 흘려 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기도할 때 잡념이 들면 잡념을 막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흘려 보낸다. 둘째로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우리의 욕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욕구를 찾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내가 이 위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이 위기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기대는 하나님의 열망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나의 욕심으로부터 왔는가?”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욕구를 찾게되면 그 욕구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욕구를 내려 놓기 힘들다. 또한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이 욕구를 포기시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세미한 주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8장 47절, 요한복음 16장 14절

요한복음 8장 47절,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한복음 16장 14절, “그가(진리의 성령)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 박사가 젊은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 강연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강의가 마치자 한 목사님이 헨리 박사에게 와서 “난 하나님께 절대로 당신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은 절대로 듣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박사님은 하나님이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말씀하는 하는 하나님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의 말을 멸시합니다.”

헨리 박사는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이 말씀하도록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목사님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헨리 박사와 목사는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목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헨리 박사는 우리에게도 말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당신이 거부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동일하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한 인격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싶어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막고 있거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토기장이의 진흙

토기장이의 진흙
예레미야 18장 4절, 6절

예레미야 18장 4절, 6절, “4절: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을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6절: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스라엘 족속이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희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있는 진흙과 같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종을 토기장이의 진흙에 비유한다. 그리고 진흙이 해야 할 일은 첫째, 토기장이가 생각한 대로 그릇을 만들도록 진흙은 응해야 한다. 둘째, 진흙은 토기장이의 손에 남아 있어야 한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나면 그 그릇은 스스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기장이 손에 그릇은 남아 있어야 한다.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남아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으려면 성경을 믿고,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를 하더라도, 자기의 욕심에 따라 산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은 세상이 말하는 종이 다른 점이 있다. 세상의 종은 주인의 권위에 의해서 억지로 행하여야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종은 주인의 권위가 아니라 자원해서 행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종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시며, 진흙이 하나님이 원하는 그릇으로 우리를 빚으려면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임재의 연습

하나님 임재의 연습
시편 108편 1절

시편 108편 1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할지로다.”

“하나님 임재의 연습”은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1611~1691)의 저서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하여 재판관의 발 아래 있는 가엾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야 했다. 방황, 고민, 감정적 격분등을 넘어야 했는데 이는 그의 힘으로 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선함으로 넘을 수 있었다. 죄인의 모습으로 서 있었던 그는 처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면서 친밀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경건한 삶은 거룩한 두려움에서 시작이 되어 영생의 소망을 소원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완성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믿음이 중요하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과거의 죄가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과거의 죄는 고난의 원천이며 실재가 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믿음만이 과거의 죄를 벗게 한다.

하나님 임재를 연습하게 되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때가 은혜의 순간이다. 그도 그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갑자기 변화되는 경험을 하였다. 절망 중에 있던 그가 갑자기 깊은 내적 평화를 경험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하나님 임재를 일상 생활에서 늘 경험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을 늘 찾으려 하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고, 늘 주방에서 일하였는데 일하는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였다.

하나님 임재의 경험을 하려면 우리가 마음을 정하여야 한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정한다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실 것이다.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가 할 일이 없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그 분의 형상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해달라는 마음을 정하는 일 뿐이다.

가본 적 없는 길

가본 적 없는 길
요한복음 14장 6절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헨리 블랙가비는 캐다나 새스커툰에서 12년 목회를 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자기 농장으로 찾아오라고 그에게 제의했다. 농부는 이렇게 찾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시내를 지나서 한 4백미터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빨간색을 칠한 큰 축사가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길에서 왼쪽으로 도세요. 그 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 정도 더 가시면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약 6킬로미터쯤 가면 큰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는 농부가 말한대로 쪽지에 적어 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곳을 찾아 갔다.

다음 번에 그 농장을 갈 때 농부가 함께 동행했었다. 농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고, 농부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를 인도했다. 이번에는 쪽지가 필요 없었다. 농부가 그의 지도였기 때문이었다. 핸리 블랙가비는 농부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갔다. 농부가 ‘돌아라’하면 돌았고, ‘왼쪽으로 가라’하면 왼쪽으로 갔다. 농부는 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갈 수 있게 했다. 그는 혼자서 그 길을 절대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농부가 그의 지도였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농부와 같이 길을 인도하지 않고, 또한 우리를 강제로 그의 길로 이끄시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가 가본 적이 없는 길을 함께 동행하신다. 그 길은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이기도 하다.

결코 지지 않는 빛

결코 지지 않는 빛
사무엘하 7장 27절, 29절

사무엘하 7장 27절, 29절, “27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9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기도한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귀를 여시고 들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을 이루셨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약속을 붙들었다. 어떤 때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였고, 어떤 때에는 그 약속은 거짓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자, 다윗은 주님을 찬양한다;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7:22).”

랜슬롯 앤드류스(Lancelot Andrews)는 영국에서 역사상 유명한 인물로 추앙이 된다. 앤드류스는 엘리(Ely), 윈체스터(Winchester), 치체스터(Chichester)의 감독을 역임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황실 목사로, 그리고 나중엔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과의 논쟁에서 제임스 1세를 위한 변증가로 활동하였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이루어지자 주님을 결코 지지 않는 빛으로 찬양하였다. 그의 저서 “개인적 경건 생활”에서 그는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따사로운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하늘에서 찾아왔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빛으로 지으신 창조주시요 세상을 밝히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신 분은 바로 주 하나님이십니다. (중략)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신 주님, 우리에게서 그 은사를 거두어 가지 마소서. 주님의 은사를 구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그것이 새롭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우리는 주님을 결코 지지 않는 빛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그 빛을 끝까지 붙잡는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을 빛으로 몰아낸다. 그러면 어두웠던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빛이 비추어지면 어둠은 물러가기 때문이다.

기도의 최고 형태

기도의 최고 형태
시편 8편 4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돌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 할 때 세상을 사랑해서 구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하는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기도한다.

노르위치 줄리안(Julian of Norwich)는 14세기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신비주의자이다. 그녀는 노르위체에서 베네딕트 교단에서 수녀로 생활했으며 성 줄리안 교회 옆에서 살았다. 그녀의 저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서 그녀의 경험을 기술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싶어서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그녀에게 세 가지 계시를 하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 육체의 질병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하여 세 가지를 기도로 구했다. 마침내 기도의 응답이 있어서 그녀가 죽을 병에 걸리게 되었다. 병상에서 누워 있있는 엿새째 날이 되던 때에 사람들은 그녀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도 죽음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를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하여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죽음을 앞에 둔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주님이 인도하였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함으로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그녀에게 흐르는 것 환상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피가 그녀에게 떨어지자, 그녀는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최고 형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최고 형태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는 마음과 태도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상황은 최고의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기도할 때 만나는 두 개의 산

기도할 때 만나는 두 개의 산
시편 39편 12절~13절

시편 39편 12절~13절,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하는데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기도하는데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의 태도를 살펴 보아야 한다. 묵상은 기도의 태도를 살펴보는 잣대이다. 묵상하는 태도를 살피면 기도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묵상할 때 우리는 방법이나 체계를 찾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태도와 조망을 계발해야 한다. 믿음, 열린 마음, 주의 집중, 경외심, 기대감, 간구, 신뢰, 기쁨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도하는 바른 태도가 무엇인가? 겸손과 회개이다. 토마스 머튼은 기도하는 태도는 배워야 하고,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른 기도의 태도를 갖기 위하여 넘어야 할 두 개의 산이 있다. 토마스 머튼은 두 개의 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기도의 방향이 하나님 뜻에 맞추어져 있는지에 대한 배움과 훈련, 다른 하나는 마음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찾고 버리는 노력과 훈련이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의 인격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죄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도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는 훈련과 배움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평생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대화법이 기도이기도 하다.

마음의 욕망과 우리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우리가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을 버리기 위하여 자기 확신과 만족을 버리는 배움이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듣는 훈련이고, 또한 인간의 욕망을 버리기 위한 노력이다.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의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의지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따르면 따라오는 현상이 육체의 고난이다. 육체의 고난을 받는 이유는 고난을 받고 난 후에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비수로 찌르는듯한 고통을 참아 내야하고, 많은 생각이 그들을 번민하게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이 쇠약해지고 곤고해져서 풀이 죽더라도, 그래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지나게 되는 이유는 그래야 그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내려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뉘지 않는 의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페넬롱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유순한 의지는 부족하다고 구하거나 싫다고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망설이지 않고 행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의지를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잘되며 아무리 무의미한 오락거리라도 선한 일로 바뀌게 된다.”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는 우리가 더 이상 정욕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악한 마음과 말을 정화하게 한다.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의지는 우리를 냉담하고 야비한 세상의 조롱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부로 인한 불행에서, 친구들의 배반과 변덕스러움에서, 원수의 속임과 함정에서 자유롭게 한다. 더 이상 나뉘지 않은 의지는 우리를 믿음 안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더욱더 만족하게 한다.

사랑의 네 단계

사랑의 네 단계
요한1서 4장 7절~8절

요한1서 4장 7절~8절,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1서 8절 후반부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바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존재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자로써 합당치 않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세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버나드 끌레르보(Bernard of Clairvaux)란 지도자가 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란 글을 썼고, 그의 글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사랑의 1단계는 자기를 위해여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의 2단계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도, 사랑의 3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마지막 사랑의 4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1단계와 2단계는 아직도 자기애(自己愛: 자기를 사랑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1단계와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사랑의 2단계가 1단계보다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2단계에서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2단계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단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3단계와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3단계는 하나님과 자기가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 마지막 사랑의 4단계는 거룩한 연합에 있는 ‘성자’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온전한 연합을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비운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다. 즉 4단계의 사랑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보여드린 사랑과 비슷하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버나드 끌레르보는 사랑의 4단계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4단계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사랑의 3단계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랑의 3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