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믿음(7): 바른 선택을 하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잘못된 믿음(7): 바른 선택을 하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시편 1편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로 선택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섬기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에게는 주님에 뜻에 따를 능력이 없다. 또한 우리의 능력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선택한다면 영적인 성숙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한 선택은 강박적 행위로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강박적 행위’란 하나님 뜻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면 불편한 생각이 자꾸 떠올라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바른 선택은 우리의 능력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의지로 하여야 한다.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님께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바른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바른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주님의 능력으로 선택하여야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

잘못된 믿음(6):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잘못된 믿음(6):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면 청중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죄보다는 사랑을 주제로 설교를 많이 한다.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민감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지는 일과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지고 사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영화 밀양은 ‘용서’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밀양에서 여주인공(신애)는 아들을 유괴하여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감옥에 간다. 여주인공은 아들을 잃은 고통 속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단한다. 여주인공은 유괴범을 만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유괴범은 자기도 기독교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죄를 용서하였다고 여주인공에게 말하였다. 밀양에서 잘못된 용서의 시각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여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지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 우리가 죄에 민감해진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은 죄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죄책감에 묶여서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죄가 생각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잘못된 믿음(5):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잘못된 믿음(5):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로마서 7장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헨리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8번째 주제가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종종 듣는다. “성경 공부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기도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교회 부서에서 섬겨야 한다. 나를 미워하는 이웃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등등의 그리스도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말한다.

‘해야 하는 것’은 책임, 의무, 강제 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책임이나 의무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인을 속박하거나 얽매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책임이 아닌 자유로운 선택, 의무가 아닌 사랑이 넘쳐 흘러 나가는 자연스러운 섬김의 일이 되어야 한는 말씀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을 때에는 진노 아래 있고, 유죄 선고를 받은 상태이고, 사랑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어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되고, 죄의 묶임에서 해방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유익을 누리며 살게 된다.

잘못된 믿음(4):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

잘못된 믿음(4):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

골로새서 2장 9절~10절, “9절: 그 안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헨리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7번째 주제가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을 필요하지 않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나’와 ‘하나님’의 신드롬에 대하여 헨리크라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전투 속에서 하나님은 조종사이고 나는 부조종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과와 함께 하시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있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주신 이유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창2:18 참조)”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이 영지주의적인 믿음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믿음은 영적인 것은 모두 선하고, 육적인 것이나 물질은 모두 악하다는 믿음이다. 성경은 영지주의적인 믿음을 이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신조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계하신 말씀은 혼자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혼자 있는 것이 육체에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자라고,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우리의 영성이 자랄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성이 있어야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영성도 있어야 한다.

잘못된 믿음(3): 과거는 잊어버려라

잘못된 믿음(3): 과거는 잊어 버려라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롬10:10). 구원이 되면 새생명을 얻는다. 새생명을 얻으면 옛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성경은 말한다. 과거의 일이 성도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성도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과거의 일, 과거의 악몽, 과거의 고통들이 잊을 수 있는가? 잊지 못한다. 새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과거의 사건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과거에 일어났지만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슬픔을 충분히 느껴서 아픔을 떠나 보내야 한다. 과거에 고통을 주었던 원수가 있다면 그들의 죄를 용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원수를 씹어 먹을지언정 용서가 되지 않으면 원수에게 우리의 감정을 주 안에서 토해내어야 한다. 그러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에베소서 5장 11절, 13절,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잘못된 믿음(2): 회복되면 끝이다

잘못된 믿음(2): 회복되면 끝이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헨리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5번째 주제가 “회복되면 끝이다”이다. 도움을 찾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주로 한다고 말한다; “아직도 치료가 안 끝났어? 언제 좋아질거야? 좋아지는 게 아니라 더 나빠지고 있는 것 아냐?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기한을 정해 두어야 하는 거 아냐? 목표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 사람들이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말들을 하는 중심에 “회복되면 끝이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고장난 부분을 빼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음이 회복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회복되면 끝이다’라는 잘못된 믿음은 회복과 영적 성숙을 분리시키게 되고, 회복 된 사람과 회복되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게 한다. 그러나 ‘회복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우리의 회복은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싸움이다. 만약 우리가 회복에 끝이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 정신적 어려움을 갖거나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회복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면 어떠한 사람이든 회복되는 과정에 있는 은혜의 여정으로 믿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건 적은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건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믿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1):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잘못된 믿음(1):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빌립보서 2장 12장,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헨리 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4번째 주제가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이다. 구원에 있어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뜻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자이다. 구원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말한다.

헨리 크라우드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영과 마음을 성숙시키는데 매우 소극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치유와 성숙에 대하여 “손을 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자”라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치게 만들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님 앞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우리의 역할이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주님께 고백함으로 우리는 주님의 필요를 청한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필요를 우리가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영적인 성숙의 부분이다. 영적인 성숙은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다하고 힘쓸 때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영성과 행동

영성과 행동

에베소서 5장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믿는 잘못된 믿음 중에 행동만 바꾸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믿음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착각이다. 예수님시대에 말씀을 실천하려는 열심이 가장 컸던 종교지도자들 중에 바리새인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 의하여 칭찬을 받았지만 예수님에게 칭찬 받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눅12:1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눅11:42).

거룩한 행동을 하는 모든 분들이 성령의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는 행동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고 행동만 변화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는 성령이 임재하여 마음이 변화되어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성령님과 함께 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행동이 바뀐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다(때로는 마음이 바뀌었는데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마음이 바뀌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보이기 위한 행동,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 억지로 하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 행동만 그럴뜻하게 보이면 우리는 마음에 거짓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 거짓이 쌓이면 예수님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이 된다. 우리는 선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선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죄와 영성

죄와 영성

욥기 4장 7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가 죄가 있으니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지금 빨리 회개하라”고 말하는 말이다. 헨리 크라우드와 존 타운센트의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에서 크리스찬이 믿고 있는 잘못된 믿음 중에 하나가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성경은 죄로 인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하여 온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제자들이 소경인 자를 보고, 예수님에게 저 소경이 소경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였다.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지 않거나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도 고통을 받고 죄를 범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된다.

필요와 이기심

필요와 이기심

빌립보서 2장 7절~8절,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 말씀은 십자가의 설교를 할 때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다. 십자가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성경에서 자기 부인이란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라는 말이지 자기의 필요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자기 부인이 우리의 필요를 버리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주기도문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가 있다. 만일 ‘일용할 양식’이 우리의 이기심으로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를 주님은 가르쳐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약한 존재이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면 무너지는 약한 존재이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까지 부인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필요와 이기심을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자기부인이라는 명목으로 거부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못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