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죽음

자아와 믿음
요한복음 11장 6절

요한복음 11장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들이 MCAT(의과대학원 학력고사)시험이나 대학교 학점이 다 좋아도 의과대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비의과대학원(의과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한 대학원)에 들어갔다. 조카가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SAT(대학교 학력고사)성적이 월등히 좋았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둘 다 원하는 대학교나 대학원에 들어갔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셨다. 그들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예수님께 전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르다나와 마리아 자매를 사랑하신다. 그들의 오빠 나사로도 사랑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듣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나사로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는 날까지 이틀을 기다리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전갈을 들은 이틀 후 예수님은 나사로가 있는 유대로 출발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찾았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 되었다.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나사로가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의 풍속은 죽은 사람을 사흘간 땅에 묻지 않고 지켜본다. 예전에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이 아주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를 무덤에 묻는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바로 출발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린 이유는 “이는 너희를 믿게 하기 하려 함(요11:15)”이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나사로와 같이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우리 자아(self)의 죽음을 말한다.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을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을 행하신다.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믿음은 우리를 살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때로는 기적)을 보게 한다.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
누가복음 18장 27절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할 수 있느니라.”

교인을 변하게 하고, 달라지게 하는 분은 누굴까? 생각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다. 그러나 교회 리더들은 가끔 자기의 능력으로 교인이 변한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소그룹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소그룹 리더는 자신의 역량이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눅18:24-25)”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듣는 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하면서 또한 한 편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다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있다. 이런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준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맡겨준 부분에 대하여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긴 부분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은 무엇인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이라기 보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이다. 즉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땅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어떤 일의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창3:17 참조). 하나님의 하시는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맡겨준 부분 이외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가까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하실 일들에 대하여 기쁨과 감사로 기다리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세리와 의사

세리와 의사
누가복음 5장 27절

누가복음 5장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어떤 교회에 심술궂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하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심술궂다고 비난한 사람은 전에는 더 심술궂은 사람이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리를 부르셨다.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 세금을 걷는 사람인데 예수님 시대에는 가장 악하고 나쁜 사람으로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리는 선량한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나 과부나 외국인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악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른 이유를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가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고 옥한흠 목사 아들이 ‘아버지 옥한흠’이라는 책에서, 2007년 ‘평양 부흥 100주년’기념 집회의 아버지를 회고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 주시옵소서!…중략…그러나 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주여 주여 설교하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목자들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되면 우리의 죄가 더 크게 보이게 된다. 믿을수록 우리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크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의인인 이유는 그리스도때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죄가 더 크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리는 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리에게 의사는 예수님이다. 그러나 세리가 더 이상 세리가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그 세리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영광과 좌절

영광과 좌절
마가복음 9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난다(막8:31)”고 예수님께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닌지 2년이 지나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한 6일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지 2년 후에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친 이유는 무엇인가? 2년이 지나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마16:16).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죽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한 6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좌절한 제자들에게 죽음 뒤에 나타나날 예비된 영광을 세 제자들이 보여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변화산에 오르셨다.

우리는 십자가와 그에 따른 고통때문에 때로는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보다 대적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의 등에 비수를 꽂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사랑하였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소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좌절한 우리에게 소망을 찾게 하기 위한 말씀이 오늘의 말씀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좌절이 아닌 우리에게 나타날 주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신다.

사랑과 용서

사랑과 용서
누가복음 7장 43절

누가복음 7장 43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한국의 영화 중에 ‘밀양’이 있다. ‘밀양’은 기독교인들에게 ‘용서’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었다.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나고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하였다. 주인공이 유괴범이 있는 감옥에 가서 유괴범에게 복음을 전하고 용서하려고 하였더니 유괴범은 이미 복음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유괴범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도, 용서를 받을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또한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를 하기 위하여 두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할 사람을 자기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용서 할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만약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도, 용서를 구할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으려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용서를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7:41-42)”하고 물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한다(눅7:43)”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말하셨다(눅7:43).

예수님께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옥합을 깬 여인이 예수님과 항상 있던 시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이 말씀은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더 많은 죄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죄가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죄에 대하여 깊이 통탄하고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깨달느냐, 죄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돌이켰냐에 대한 말씀이다. 작은 죄를 지었어도 그 죄에 대한 아픔이 깊고 깨달음이 크다면 더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큰 죄를 지었어도 그 죄에 대한 아픔과 깨달음이 적다면 적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다.

믿음과 죄

믿음과 죄
요한복음 6장 29절

요한복음 6장 29절, “예수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어떤 일을 이루었느냐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사람이 이룬 업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많은 일을 이룬 사람은 훌륭한 사람, 적은 일을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 또는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죄인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람을 분류한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8)”하고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6:29).”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할 때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낸 이인지 알도록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다(요6:30).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였다.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고, 만나를 먹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만나를 먹고 하루를 살았지만, 너희에게 지금 하늘의 떡을 주는데 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주여 생명의 떡을 항상 우리에게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떡을 너희가 받을 수 없다”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였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보다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성경을 보고도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보다 믿음이 먼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믿음이 먼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믿음은 선물이다. 선물은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다. 우리가 내면의 죄를 깨달을 때 주님은 마음을 움직이신다. 그때 주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살리는 믿음

살리는 믿음
누가복음 8장 45절

누가복음 8장 4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 미나이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병이 즉시 나았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 옷자락을 잡았을 때, 예수님께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혈루병을 앓은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알면서도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알면서 물은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한 여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으셨다. 떨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4:48)”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인이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예수님 뒤에서 옷자락을 만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는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몸에서 매일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어떤 여인이 유출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15:19).”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지 못하고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마음 속으로 병을 낳게 해달라고 구한 것을 예수님께서 ‘딸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의인인 이유는 ‘우리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든, 우리가 어떠한 상태이든 주님 앞에 나가서 구하는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보이는 믿음, 숨겨진 믿음

보이는 믿음, 숨겨진 믿음
누가복음 8장 25절

누가복음 8장 25절,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에 따라 배에 올라 호수 건너 편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잠이 드셨을 때에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니’, 이에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려,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죽음 앞에 제자들은 믿음을 찾지 못했다. 광풍이 일고, 물이 배에 들어오는 순간 제자들은 죽음 앞에 서있었다. 제자들은 두려웠다. 두려움은 제자들의 믿음을 눈깜짝할 사이에 빼앗았다. 가장 믿음이 있어야 할 때에 제자들은 믿음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제자들을 꾸짖기보다는 그들의 시선이 바람과 물결에서 예수님께로 향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고 헌신된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온전한 믿음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일하게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은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어쩔줄 몰라하면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신자에게, 신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믿음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생긴다.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말씀이 던진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을 찾아 볼 때 우리는 숨겨진 믿음을 다시 보게 된다.

회복과 부패

회복과 부패
누가복음 6장 10절

누가복음 6장 10절,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더니 거기에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말씀하시고, 군중들에게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 물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하고, 그가 손을 내밀었더니 그의 손이 회복이 되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어떻게 회복이 되었는가? 첫째, 말씀을 들을 때 회복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회복은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다.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회복이 있다. 둘째, 불가능한 말씀에 순종할 때 회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실 때 손 마른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주저없이 그 말씀에 순종하면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세상에서 부패를 거스르는 회복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행하시는 기적 중 하나이다.

기도와 낙심

기도와 낙심
누가복음 18장 7절

누가복음 18장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제자들은 항상 기도가 어렵고, 기도를 하더라도 쉽게 낙심할 수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다. 신자는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하게 된다. 또한 신자가 항상 기도하더라도 낙심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들은 택한자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기도를 항상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낙심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있으니 그들은 택한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만이 기도를 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고, 택한 사람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살전13:4).

둘째, 기도하는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응답이 없으면 마음에 원망이 쌓인다. 이때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이다.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억울한 심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신다.

마지막으로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기도가 속히 응답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들의 간구이다. 또한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인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자 하시는 의지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낙심의 뜻은 ‘바라는 일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이 상한다’는 뜻이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것은 ‘기도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도하는데 낙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