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살펴야 할 일

먼저 살펴야 할 일
마태복음 20장 21절

마태복음 20장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네팔에 진도 7.8의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지진이나 스나미가 오면 세상의 끝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도 지진은 많이 있었어도 어디에 지진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메스컴이 발달이 되어서 지진이 일어난 곳을 바로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지진이 있다고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지진을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13:8). 재난이 시작이 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막13:5)”이다.
주님은 지진이나 기근보다 사람에게 미혹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교회 내에서 미혹하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니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2:7).”

우리는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듣는다. 그때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을 생각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베대의 여인과 두 아들과 같은 욕망이 있다. J.C. 라일은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죄를 미워할 만큼 중분한 지식과 믿음이 있지만, 불행이도 그들은 많은 기독교의 진리에 무지할 따름이다. 무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많은 실수를 범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까닭에 내면적인 사고와 시각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좁은 지식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굳어진 사고와 시각으로 마음이 좁아지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매일 매일 살펴야 한다.

마음의 평강

마음의 평강
요한복음 12장 27절

요한복음 12장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심정을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심정이 괴롭다는 표현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어떤 분은 앞으로 지실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여 설명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 담대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모습과 비교해 보면 적합한 해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두 번째 해석은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지셨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우셨다는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기도한 이유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죄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어쩔줄 모른다. 그러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지셨다면 그분이 감당해야 할 고통과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된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지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믿음으로 우리는 의의 옷을 입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우리가 의의 옷을 입은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서 겪으셨던 괴로움과 고통을 통하여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다른 증거는 우리에게 찾아온 평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평강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해결하였다는 믿음이 적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기대를 포기하면 관계 속에서 오는 죄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된다.

맡김과 보호

맡김과 보호
누가복음 23장 46절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바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후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0장 17절~18절, “17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미에 맞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어렵게하는 수준 낮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들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론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수준 낮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머리로 즐거워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나 이론이 현실로 확증되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행동으로 하나님께 맡기게 되면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자기부인과 십자가

자기부인과 십자가
누가복음 9장 51절

누가복음 9장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들림을 받을 날이 가까이오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계셨다. 예루살렘에 가면 조롱과 멸시, 배반과 모욕, 가시멸류관과 침 뱉음, 십자가에 못박힘과 창에 찔림을 받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고, 존귀함을 받아야 할 마땅한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귀함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곳으로 가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죄인되었을 때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J.C 라일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희생 혹은 자기부인의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분명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기사랑이 예수님 사랑보다 큰 것이 ‘자기부인’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대속의 길’로 인도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날마다 새로운 십자가이다.

죄가 많은 곳에 가면 힘이 든다. 힘이 들고, 때로는 온 몸이 부서지게 되는 장소가 ‘죄가 많은’ 곳이다. 그곳에 생명을 흐르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그곳에서 견디고, 참고, 모욕을 받고, 심령이 상하는 일은 ‘우리의 십자가’이다. 물론 십자가는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이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와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주님이 주신 십자가는 ‘죄인’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지만, 우리가 결정한 십자가는 ‘죄인’이 죽기를 원한다(눅9:54; 19:10)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모욕을 받고, 마음이 상하더라도 죄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의 자리까지 나가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죄인의 자리에 나가는 일이 ‘자기부인’이고, 상한 마음과 모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이다.

더 큰 은혜

더 큰 은혜
요한복음 8장 31절

요한복음 8장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쫓은 사람은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감정에 때문에,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 때문에, 병이 나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을 자신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예수님의 말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비교적 쉽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은 시작이 된다. 무엇을 믿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음을 믿으면 된다.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가 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 위안을 찾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는 우연하게 교회를 방문했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친한 사람에게 이끌려와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신앙을 시작한 동기가 어떠하든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말씀에 호기심이 많아지고, 또한 알 수 없는 기쁨과 설레임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넘쳤던 기쁨이 어느 한 순간에 다가오는 고통으로 기쁨은 굳어진다. 신앙생활에 대한 의욕도 사라진다. 그때를 노려 세상과 사탄은 더 큰 시련을 주기 시작한다. 더 큰 시련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힘들게 한다. 바울은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신앙의 시작도 은혜이지만, 신앙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는 것은 더 큰 은혜이다(예수님의 참제자가 되게 하는 길이다).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뛰는 것도 은혜이지만, 헐떡이면서 산을 오르는 것은 더 큰 은혜이다.

천국 찾기

천국 찾기
마태복음 13장 44절~46절

마태복음 13장 44절,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오늘 말씀은 천국을 찾은 두 사람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다른 한 사람도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역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 다 천국의 가치를 알고, 자기가 가지고 있은 모든 소유를 팔았다는 사실이다.

천국의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진주’를 찾아야 한다. 찾는 사람이 천국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가치를 알게 된 동기는 ‘발견’이다. 발견의 사전적 뜻은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했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찾아냄”이다.

어떻게 천국을 발견을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찾아내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천국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천국 발견하려면 먼저 좋은 씨가 마음에 뿌려져야 하고, 좋은 씨가 마음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천국을 발견하기 위하여 좋은 씨가 마음에 뿌려져야 하고,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

좋은 씨를 마음에 뿌려지게 하기 위하여 먼저 좋은 씨와 좋지 않은 씨를 구별해서 들어야 한다. 좋은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고, 거짓된 말씀에는 귀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천국을 발견하기 위하여 마음 밭이 좋아야 한다. 마음 밭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씨가 마음에 뿌려져도 천국을 마음에 간직하기 어렵다. 좋은 마음 밭을 가꾸기 위하여 자기를 귀하게 여기며, 환란과 박해를 견뎌야 하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마음이 눌리지 말아야 한다(마13:19-23).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천국을 발견하기 위하여 좋은 말씀을 듣고, 마음 밭을 잘 관리하여야 한다. 마음 밭을 관리하기 위하여 미움, 서러움, 억울함, 원통함, 열등감 등의 감정을 정리해야 한다. 또한 세상의 철학과 과학대신 성경에 귀를 더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게 된다.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요한복음 11장 33절

요한복음 11장 33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주님은 마리아와 함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좀더 일찍 나사로에게 오셨더라면, 오빠가 살았을 것”이라고 예수님께 말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때에 나사로가 다시 살줄’을 안다고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하고 마르다에게 물었더니,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라고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가 살 것이라고 마르다에게 말했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른 대답을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못 알아들어도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습니다(요11:32)”라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원망에 화를 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이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11:33).”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우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마리아의 연약함과 마리아의 고달픈 삶을 아시고 우셨다. 물론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나사로가 살 것이고, 나사로가 살면 마리아의 눈물은 닦일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에게 ‘부활의 기쁨’이 찾아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겪고 있는 현재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흘리셨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슬픔을 그대로 주님께 토해낼 때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슬픔에 함께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신다.

하나님 가족

하나님 가족
마태복음 12장 50절

마태복음 12장 50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가족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따뜻한 가족이 차가운 가족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안타깝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고, 은혜롭고, 기쁨이 넘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라고 부르셨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가? 육신의 가족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데, 육신의 가족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니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가족을 어떻게 돌보시는가? 아담이 하와를 볼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이라고 말했다. 아담이 하와에게 말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가족을 돌보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신의 그릇된 종교 때문에 진실한 하나님의 가족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핍박하는 사람은 만왕의 왕되신 분의 가족을 핍박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핍박하거나 또는 욕을 한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그분의 가족을 평가하고, 핍박하고, 욕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문화와 사회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내리는 평가 속에는 주관적인 평가와 객관적인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말씀은 진리에 입각한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된다. 그러나 문화와 사회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주관적 평가 기준이다. 그래서 우리가 평가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객관적인 말씀의 기준이 아니라 주관적인 문화와 사회의 기준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있다.

자원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
요한복음 20장 24절

요한복음 20장 24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예수님이 부활하고 제자들을 만나는 첫번째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도마는 축복의 자리에 빠졌다. 도마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제자들이 서로 모여 있었고, 서로 연락하였음에 분명하다. 도마는 제자들과도 함께 하지 않았다.

어떤 자리가 은혜가 있는 자리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은혜의 자리를 찾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몸이 아프거나, 힘이 들어서 기도 모임이나 성경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때도 있다. 때로는 우리는 모임에 가기 싫을 때도 있다. 오늘 말씀은 어떤 모임이라도 빠지면 안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일까?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나는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요20:25)”하고 선언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도망갔고, 도마는 부활한 증거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6)”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은혜에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억지로 참여해도 은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억지로 참여해서 은혜를 쏟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고 찾아야 더 큰 은혜를 맛볼 수 있다.

모인 자들의 은혜

모인 자들의 은혜
마태복음 18장 20절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세상은 많은 사람을 모이는 사람은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가 된다. ‘나는 가수다’ T.V에서 처음 방영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받았다. 가수로 섭외 된 사람들 중에는 실력은 있지만 실력에 비해서 빛을 보지 못하였던 가수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오늘 말씀은 소수로 모인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이다. 공적인 예배뿐 아니라 기도, 찬양, 성경 읽는 모임, 소그룹 모임, 성도 간 적은 수의 교제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왕의 모임이다. 두 사람이 모여도 왕의 모임이고, 열 사람이 모여도 왕의 모임이다.

평소에 목사인 나는 연예인보다 더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인기있는 연예인에게 수 천명의 사람이 연예인을 보러 모여드는데, 나는 수천 명은 커녕 한 두명의 사람도 모여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나를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말에 대하여 주님께 용서를 구하였다.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지에 따라서 영향력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오늘 말씀은 영향력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숫자에 민감한 사람들을 책망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성공은 숫자로 결정한다.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싶어한다. 부자가 되면, 명예를 얻으면, 많은 사람을 이끌면 세상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공은 숫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성공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일까? 우리가 모인 사람의 수준이나 진행방식 때문에 그리스도가 함께 한 모임을 하찮게 여기고, 경멸했는지 우리를 살펴 보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