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창세기 46장 1절~27절

창세기 46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나이가 들면 익숙한 장소를 떠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 70세가 넘은 부부가 익숙하게 살던 서울에 위치한 홍제동을 떠나 아들이 있는 이천으로 옮겼다. 이들 부부는 아들 옆에서 편하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익숙한 환경과 친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편함보다 불편함이 더 많았다. 또한 이들 부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들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적응력도 떨어진다.

야곱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예전의 야곱은 자기의 생각이나 욕망대로 움직였지만, 백 삼십세가 된 야곱은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야곱은 이미 낯선 곳에서 사는 고통을 알고 있었다. 젊었을 때도 고통스러웠던 타향 살이를 백 삼십세의 노인이 되어서 다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야곱은 심히 두려웠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창46:2-4,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 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말씀은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 하나님이다”이다. 아직까지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고, 야곱 아버지의 하나님이셨다. 야곱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이 이집트에 있는 동안,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야곱 아버지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부모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너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아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혼자 남아 있을 때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남아 있을 때 ‘너가 알던 하나님’을 경험하여, ‘나의 하나님’이 된다.

마음의 소원

마음의 소원
창세기 45장 16절~28절

창세기 45장 27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사람들이 듣고 싶은 소식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듣고 싶은 소식이 다르다. 마음에서 원하고, 소원하는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소원의 대상이 가족이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오늘 야곱은 자기가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을 들었다. 죽었던 요셉이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집트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자, 아버지 요셉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해졌다. 야곱은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야곱이 중얼거린 말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으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하는 말이었다(창45:26-28, 표준새번역 참조).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우리가 듣고 싶은 소식은 무엇인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 앞에 듣고 싶은 소식을 조용히 올려드리고, 그 분의 처분을 두렵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러면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듣고, 행하신다.

찾아야 할 것

찾아야 할 것
창세기 45장 1절~15절

창세기 45장 7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한국 T.V에서 “빛나거나 미치거나”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이야기로 고려 정종이 왕욱의 도움으로 왕식렴을 쫓아낸다는 큰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왕식렴은 정종과 함께 고려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을 왕으로 세웠다. 만약 드라마에서 정종 뒤를 이어 왕욱이 왕이 된다면 왕욱은 고려 광종이고, 광종은 호족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고려의 왕권을 확립한 임금이었다.

광종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려의 도읍을 서경에 세우자는 왕식렴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종은 반대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려의 도읍을 개경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왕식렴이 주장대로 고려의 도읍을 서경으로 정하였다면 고려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려는 중국과 경쟁을 하면서 고구려가 잃었던 땅을 다시 차지 하였을런지도 모른다. 고려의 역사 중에서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아쉬워하는 사건 중에 하나가 왕식렴의 서경천도 계획이다.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았을 때, 그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사건이 무엇이냐 물으면 그들은 한 목소리로 요셉을 판 사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의 인사에 그저 놀라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나타났으니, 그들은 요셉을 보고 얼마나 두려웠을까?

요셉이 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이집트의 종으로 팔리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종에서 이집트의 총리로 올려 놓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면, 요셉은 평생 이집트의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모든 상황을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황을 바꾸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환경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서 간직해야 한다.

위기의 산

위기의 산
창세기 44장 14절~34절

창세기 44장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셨사오니.”

한국이 일본에 36년간 무력으로 점령 당한 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러한 일본의 정책에 기독교가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백성들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종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가 기독교였다. 3.1운동에 서명한 33인의 지도자 중에 천도교 지도자가 15인, 기독교 지도자가 16인 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기독교가 신사참배의 높은 위기 앞에 주저 앉아 버렸다.

요셉의 형들에게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누군가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었다. 이 일로 인하여 베냐민은 이집트에 잡힐 위기에 놓였고, 형들은 어떠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만 찾으려 할때, 유다가 이집트의 총리 앞에 당당하게 말했다: “종들은, 막내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갈 수도 없고, 아버지 얼굴을 뵐 수도 없습니다(창44:26).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창44:33)”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집트 총리 앞에 드렸다. 유다가 베냐민의 생명과 바꾸려는 마음을 어떻게 가졌을까? 유다가 자녀를 잃어버렸던 아버지였고, 동시에 자녀를 잃게되는 아버지 야곱의 고통과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야곱이 자녀를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유다 자신이 이집트의 종으로 사는게 유다에게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자녀를 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면,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연민을 갖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쉬운 말인데 실제적으로 적용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위기의 산을 쉽게 넘는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면, 우리가 위기를 넘어가려고 하기보다는 위기의 산보다 더 높은 물(성령)이 차올라서 자연스럽게 위기의 산을 넘도록 기다리게 된다.

위기의 때에

위기의 때에
창세기 44장 1절~13절

창세기 44장 9절,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다 은잔을 넣었다. 요셉의 청지기가 형들을 따라가서 “너희들이 어찌하여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은잔을 가져갔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이 은잔을 가져가지 않았으며, 만약 은잔이 나온 형제가 있으면 그 형제는 죽어도 좋고, 나머지 형제들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였다(창44:10).

청지기가 맏아들의 자루부터 막내 아들의 자루까지 뒤졌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다. 형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돌아갔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렀다. 그들이 요셉 앞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요셉이 호통을 쳤다, “당신들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소?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쳐서 물건을 찾는 줄을, 당신이 몰랐소?(창세기 44:12-15)”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은 이유가 무엇인가? 요셉은 형들이 베냐민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로 대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십 이삼년 전에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요셉을 죽이는 대신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도록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았다. 요셉을 판 형들이 요셉과 같은 어머니를 둔 베냐민에게는 어떠한 태도로 대하는지 알고 싶었다.

사람의 태도는 위기의 때에 알 수 있다. 아무리 착하고, 신사 같은 척을 하는 사람도 위기 앞에서는 자기를 드러내게 된다. 위기 앞에서 자기를 숨길 수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위기로 몰아 붙여서 위기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알고 싶어하신다.

관리인과 아이

관리인과 아이
창세기 43장 16절~34절

창세기 43장 23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 이끌어내고.”

독일에서 한 아이가 물건 훔치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아이는 독일 갱단의 일원이었고, 갱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었기 때문에 집 밖에서 망을 보게 하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을 갔는데 밖에 있던 아이가 잡히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갱단의 보스가 그 아이에게 “넌 이 자리를 떠나지 말고 지키고 있어”라는 말을 그대로 지켜서 경찰에 잡혔다. 경찰은 아이에게 도둑질을 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아이의 대답은 기상천외하였다: “엄마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요.” 경찰은 아이가 돈을 훔치는데 엄마가 왜 웃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경찰은 아이에게 “너가 돈을 훔치는데 엄마가 왜 웃니?”하고 말었다. 아이의 대답은 더 기가 막혔다: “엄마는 돈이 있으면 웃어요. 내가 훔친 돈을 우리 집 앞에 있는 편지함에 넣으면, 엄마는 그 돈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고 웃을거예요.”

오늘 말씀 중에서 요셉 집 관리인이 아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창43:23).” 요셉 집 관리인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관리인이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일을 직접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의 고백과 관리인이 같은 고백을 하는데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탄식하는 말씀이 있다. 도둑질 한 아이와 요셉의 집 관리인 모두 다 “하나님이 하셨어요”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 아이는 엄마의 생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알았고, 관리인은 요셉의 생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알았다. 무엇을 말하는가? 요셉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바른지식이 있었고, 아이의 엄마는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부족했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하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수용자와 대적자

수용자와 대적자
창세기 43장 1절~15절

창세기 43장 8절~9절, “8절: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가 있다.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져서 아이가 달라지기도 하고, 아이가 교육을 통해서 달라지기도 한다. 오늘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면 유다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유다는 아버지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항적인 아들이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옛 이름은 야곱었다. 야곱의 뜻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과 “속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는 속이는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다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유다가 아버지를 떠나 혼자 살았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유다는 그의 아들 ‘엘’과 ‘오난’을 잃었다. 하나님이 ‘엘’과 ‘오난’ 데리고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을 데리고 간 이유는 그들이 악하였기 때문었다. 그리고 막내 아들 ‘셀라’만 유다에게 남아 있었다. 유다는 ‘셀라’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맏형 엘의 아내 ‘다말’에게 셀라를 주기로 하였는데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약속을 지키기 기다리던 ‘다말’은 시아버지가 약속을 지킬 의지가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다가 딤나로 올라갔을 때,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유다와 동침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유다는 다말의 일로 깨달은 바가 컸다. 그리고 유다는 다말과의 일이 있은 후로 아버지 이스라엘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는 유다가 아버지와 화해했음을 의미하며, 아버지를 증오하는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하는 아들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유다가 막내 아들 ‘베냐민’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다는 자기의 소중한 아들을 담보로 하여 베냐민을 보호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한다. 아들을 잃어 본 유다이기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였고, 공감하였다.

아버지를 대적하던 유다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유다로 바뀌었다. 아버지를 지지하는 유다는 하나님에게 큰 약속을 받게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약속이었다. 유다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유다가 대적자에서 수용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도 우리의 아픔과 가족들의 보기 싫은 모습에 벽을 쌓는 대적자가 아니라 수용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간간이 들리는 부모와 자녀들간에 벌어지는 사건, 사고 소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적자에서 수용자로 바뀐다면 우리 주변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죄와 자유

죄와 자유
창세기 42장 18절~38절

창세기 42장 20절, “너희 막내 아우를 애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부정적인 감정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부모가 재정적으로 자녀를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는생각이 들면 자녀들에게 미안해 한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던 자녀가 자라서 부모가 되면 부모에게 미안해한다. 부모 자녀사이에 서로 미안한 감정이 들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상한 감정이 쌓이게 되면 폭발하게 된다. 폭발한 감정은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서로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상대의 마음을찌르는 이유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수치심, 열등감, 교만, 자기비하, 시기심, 질투, 미움 등으로 표현이 된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은 죄성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죄때문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들도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묻어 두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버린 사건을 합리화하였다. 요셉의 교만과 거만은 그들을 참을 수 없게 하였고,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요셉에게 벌을 주었다고 스스로 합리화 하였다. 만약 형들이 ‘죄’를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책감’때문에 살 수가 없다.

요셉은 형들이 마음 속 깊이 묻어 놓았던 ‘죄책감’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요셉이 형들을 이집트에 정탐하러 온 정탐꾼이라는 죄목을 씌워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형들이 감옥에 있는동안 그들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죄책감’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한 요셉의 결정적인 말이 있었다. “당신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당신들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만 여기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나가서,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이 허기를 면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반드시 막내 아우를 나에게 데리고 와야 하오. 그래야만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음을 면할 것이오(창42:19-20, 표준새번역).”

요셉의 말을 들은 형들은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 때에, 그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창42:21, 표준새번역).”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그들의 범죄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였지만, 그들은 그들의 범죄때문에 그러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인과응보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일이, 나쁜 마음을 가지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인과응보의 사고를 넘어야 죄에서 해방이 된다. 인과응보의 사고 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받은 벌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한다.

꿈이 현실로

꿈이 현실로
창세기 42장 1절~17절

창세기 42장 9절, “요셉이 그들에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사람들은 꿈을 꾼다. 꿈을 꾸고 나면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성경에서 꿈은 소망을 말한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가장 으뜸이라고 말한다(고전13:13).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랑이 있어야 꿈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바로의 꿈을 해석하셨다. 바로의 꿈은 7년 동안 풍년이 있은 후에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었다. 바로가 꾼 꿈대로 이집트 주변의 모든 나라에 7년 풍년 뒤에 흉년이 찾아왔다. 흉년이 계속되자 이집트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흉년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가나안에 있는 야곱과 그의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곱의 자녀들은 극심한 흉년을 넘기기 위하여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집트에서 형들은 요셉을 만났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다.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할 때, 요셉은 형들에 대한 꿈을 생각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현실로 이루어짐을 보았다. 요셉이 처음 꿈을 꾸었을 때에는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형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다. 요셉이 꿈을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셉이 종으로 있을 때나, 감옥에서 죄인으로 있을 때나,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환경이 좋아지면 현실에 안주하다가 꿈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우리의 환경이 나빠지면 불평하다가 꿈을 잊기도 한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 될 말씀은 무엇인가? 꿈을 기억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꿈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요셉과 같이 그 꿈이 현실로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