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호기심
창세기 36장 9절~43절

창세기 36장 9절~10절, “9절: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절: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예전에 아이들에게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불의 뜨거움을 아이가 깨닫게 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불을 아이 옆에 보이지 않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여도 어떤 아이는 불에 가까이 가고 싶어한다. 불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닌 에서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에서의 자손들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다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죄에 대한 생각이 둘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죄를 용서하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다른 확신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나’라면 용서 할 수 있는 죄가 있기도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응하면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부르심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보이신 사랑이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죄 아래 있는 에서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고의 메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기 위함이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는 기록은 역대상에도 기록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세우려고 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창세기가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적용해야 될 말씀은 무엇일까? 성경은 사랑과 심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쳐준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려면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어야 한다. 죄에 대한 호기심은 죄를 따라 간 사람들의 결과를 바라보고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게 된다. 죄를 따라간 사람들의 결과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룰 수 없게 된다.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창세기 36장 1절~8절

창세기 36장 7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었다. 도덕성 발달 이론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이론 중에 하나이다. 5세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그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했고, 7세 부터는 Boarding School(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생활하였고, 공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 기대로 인하여 성공한 그는 사람들의 기대로 인하여 자살하게 되었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그가 최고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살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고(물론 그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도덕성 이론을 발표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만든 이론의 함정에 빠져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는 요인이 ‘절망’이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많은 소유’이다. 소유가 많으면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없다. “두 사람이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창36:7).” 에서와 야곱이 함께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진 것이 풍성해지니,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재산때문에 에서와 야곱이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산이 아니라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았다. 야곱이 에서의 생활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으셨다.

영적인 관점이 다른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야곱은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에서는 이 땅에서 이 땅만 바라보고 산다. 바라보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에서와 야곱은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험난하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평탄하고 쉬워 보이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두 길을 구분하여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평탄하고 쉬운 길이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속의 길에는 가시와 큰 돌들이 있어서 하나님 약속이 없는 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약속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약속의 길을 걸을 때 그 길이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는 우리가 받은 아픔과 상처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된다.

그 분의 걸작품

그 분의 걸작품
창세기 35장 16절~29절

창세기 35장 18절~19절, “18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9절: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이름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명소에 가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가정이 어떻게 불려지느냐에 따라 가정도 달라진다. 어떤 가정이 되느냐는 그 가정의 가훈을 보면 한다. 아버지가 만든 가족의 가훈 중는 ‘백인(百忍)’이라는 말이 있다. ‘백인’은 백 번 참으라는 말이다. 가훈에 백인이 있으니 자녀들은 참는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성격대로 사셨는데 자녀들에게는 ‘백인’하라고 하니,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게 되었는가? 자녀들이 자기의 성격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으니 자녀들의 삶은 ‘백인’해야 한다. 그래서 가훈을 백인(百忍)빼고, 백자로 시작되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생각이 났다. 백전불태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백번 싸워도위태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백전불태’로 가훈을 바꾸면 가정에 싸울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그녀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라헬은 죽으면서 낳은 아이의 이름은 베냐민이 아니라 베노니였다. 베노니는 라헬이 죽으면서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지어준 이름을 바꾸어서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베노니의 뜻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베노니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면서, 베냐민의 인생이 달라졌다. 베냐민의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찰뻔 했는데, 그의 이름을 바꿈으로 인하여 그가 힘차게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야곱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헬의 시각으로 보면 베냐민은 어미 잃은 슬픈 아이이다. 그러나 야곱의 시각으로 보면 어미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날 오른 손의 아이였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연약하고, 무익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우리는 만왕의 왕의 아들과 딸들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능한 능력을 받아 살아가는 그 분의 걸작품이다.

주위를 둘러싼 담

주위를 둘러싼 담
창세기 35장 1절~15절

창세기 35장 1절, 9절,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9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장소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곳이 벧엘이고,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한 곳이 벧엘이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의도적으로 벧엘을 피하였다. 야곱이 의도적으로 벧엘을 피한 이유가 무엇인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어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디나의 강간 사건과 그로 인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살륙한 사건으로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게 되었다. 야곱이 경험한 가정의 불행은 야곱이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은혜가 되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었다. 야곱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을 때, 야곱은 벧엘로 돌아갔다.

가나안 민족의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벧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나안 민족들에게 야곱과 그의 가족은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이 야곱을 보호하는 안전한 장소가 되었뿐만 아니라, 야곱을 축복하는 축복의 장소가 되었다. 야곱은 가나안의 보복을 피하러 벧엘로 갔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너스로 야곱을 축복하셨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35:9).”

세상과 자기를 내려 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두 가지를 행하여야 했다. 첫 번째는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야만 했다.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창35:3).” 두 번째는 야곱이 의지하는 드보라를 떠나야만 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창35:8).”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의 벧엘은 어디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가 우리의 벧엘이다. 성령이 임재함이 있는 장소가 우리의 벧엘이다. 우리가 벧엘에서 하나님과 함께 때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담도 허물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하나님이 주신 약속
창세기 34장 1절~26절

창세기 34장 2절~3절, “2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절: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아들이 영주권을 잃어버려서 지난 수요일(11일) 영주권에 들어갈 지문과 사진을 찍었다. 영주권 사진과 지문을 찍은 후에 C.J이란 친구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C.J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UCR(유씨 리버사이드)에 박사과정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그 소식을 처음으로 아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제 아들 주변에 노는 친구들은 없다. 다 직장을 잡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들만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힘든 시간이지만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야곱에 세겜에 머물러 있을 때 딸 디나가 그 땅의 추장 아들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다. 딸이 강간을 당한 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을 찾아 왔다. 추장 하몰은 디나를 아들의 아내로 달라고 말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가 세검의 아내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하몰은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조건이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내건 조건이었다.

하몰은 야곱의 아들들의 조건을 좋게 여겼다. 야곱의 아들들과 하몰의 족속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면 하몰의 족속이 되고, 야곱이 가진 모든 재산은 하몰 족속의 소유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 아들들과 하몰의 족속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면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은 야곱의 가족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메시아가 오지 못하는 모든 인류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몰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야곱의 아들들의 조건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 하몰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 움직이지 못할 때,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하몰에 속한 모든 남자를 죽였다(창34:25). 시므온과 레위는 하몰에게 빼앗겼던 동생 디나를 찾아서 야곱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창34:26). 디나의 사건으로 야곱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디나의 사건으로 베델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기억나게 하였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야곱은 베델에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께 약속하였다(창28:22).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 힘들 때는 힘이 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쁠 때는 기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예수님이 떠나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단단한 껍질이 벗겨질 때

단단한 껍질이 벗겨질 때
창세기 33장 1절~17절

창세기 33장 3절~4절,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아내가 D.I.D(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가 무엇의 약자인지 물었다. “Dissociative Disorder(해리장애)”라고 말했다. 그러면 가운데 “I”의 약자가 무엇의 약자인지 아내가 다시 물었다. “Dissociative”의 앞에 단어인 “Di”의 약자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미심쩍은 듯이 다시 한 번 물었고, “Dissociative를 Di로 줄였어”하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책장에서 DSM-5(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를 꺼내서 해리장애를 찾아 보았다. 해리장애의 범주 아래 D.I.D(다면적 인격장애)가 있었다. 아내는 해리장애에서 아래 속한 세부 가지인 ‘다면적 인격장애’의 약자가 무엇인지 물었고, 나는 ‘해리장애’라는 큰 가지의 약자가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부부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곰곰히 아내에게 큰 소리 친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물어보기 전에 ‘해리장애’를 읽고 있었고, 아내가 ‘해리장애’가 영어로 무엇이냐고 물어서 나는 즉석에서 대답을 해주었다. 아내는 약자(D.I.D)가 세 단어인데 나는 두 단어로 대답해주니, 아내는 미심쩍은 듯 다시 D.I.D의 약자가 무엇인지 내게 다시 물었다. 서로 묻고 답하는 말들을 분석하던 중에 내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아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내는 세 단어를 두 단어로 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물었는데, 나는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내가 묻는다고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오해가 나를 화나게 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다. 야곱이 얍복강 건너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에서의 태도가 달라졌다.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야곱과 입을 맞추고 서로 울었다(창33: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에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밤에 도데체 무슨 일을 경험하였기에 에서가 180도로 달라졌을까? 에서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야곱이 바뀌었기 때문에 에서의 태도가 바뀌었다.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야곱은 ‘자아(self)’를 내려 놓게 되었다. ‘자아(self)’를 내려 놓게 된 야곱은 진정으로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겼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야곱을 바라본 에서는 그의 마음에 쌓였던 분한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에서의 겉을 둘렀던 단단한 ‘화’가 눈처럼 녹아 흐르니, ‘화’ 속에 숨어 있던 부드러운 ‘사랑’이 에서에게 나타났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겉에 있는 단단한 껍질을 벗길 때 주변은 변화된다.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주변 사람들과 환경이 변화한다.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부드러운 것이 나타난다.

우리가 화로 차있으면, 우리 주변에 화가 난 사람들만 모인다. 그러나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겨 은혜 속에 차 있으면, 우리 주변에 은혜가 넘친다.

머리와 가슴의 씨름

머리와 가슴의 씨름
창세기32장 13절~32절

창세기 32절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생명의 위협 앞에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야곱은 첫째, 둘째, 셋째로 그 떼를 나누었다. 첫째 떼가 무사히 건너가면, 두 번째 떼를 보냈고, 두 번째 떼가 무사히 건너가면 세 번째 떼를 보냈다. 화해를 표현하는 예물이었다. 야곱이 보낸 예물은 580마리에 이르는 염소, 양, 소 및 나귀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물질적인 면에서 얼마나 축복하였는지 알 수 있다.

야곱의 소유와 가족들도 얍복나루를 건너 보냈다.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혼자 있었다. 사람들은 무리에 속하려고 한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 있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들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두려움이다. 야곱이 지금까지 겪었던 두려움은 혼자되는 두려움이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떠날 때에도 혼자되는 두려움이었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 들어갈 때에도 혼자 있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겪는 야곱의 두려움은 혼자 있는 두려움과 함께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이었다.

백척간두의 위험에 있는 야곱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야곱이 그 누군가와 함께 씨름을 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는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이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어긋났더라(창32:25-26).”

야곱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누군와 함께 씨름한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보다 육체적인 보호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씨름으로 야곱의 관심이 자신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씨름으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니 눈 앞에 에서는 야곱을 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 올 때 우리의 생명을 지키게 된다.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느냐, 아니면 머리에 남느냐에 대한 씨름이 우리의 씨름이다.

치려는 자, 돕는 자

치려는 자, 돕는 자
창세기 32장 1절~12절

창세기 32장 11절~12절, “11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말씀에 순종하여 인생을 항해할 때 순풍만 만나면 얼마나 좋으랴? 말씀에 따라 살면 순풍이 따라서 불어야 하는데 역풍이 불 때가 있다. 말씀에 따라 살면 일이 잘풀려야 하는데 오히려 일이 엉겨서 안될 때가 있다.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때로는 원망하기도 한다. 때로는 불의한 자가 세상에서 성공하여 큰 소리 치는 모습을 보면 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떠나기도 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가보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에서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서가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기다리지 않고, 야곱과 그의 식구를 치려고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서가 야곱을 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서가 사 백명의 군사와 함께 야곱을 기다린다는 말로 알 수 있다(창32:6).

에서가 기쁜 마음으로 야곱을 기다리고 있다면, 사 백명의 군대와 함께 야곱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에서가 사 백명과 함께 야곱을 기다린 이유는 야곱에게 에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에서가 야곱에게 자신의 힘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에서는 힘으로 야곱과 그의 식구를 치기 위함이었다. 야곱도 이러한 에서의 속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창32:11).”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치려는 자를 만나기도 한다. 치려는 자는 우리가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자이다. 우리가 치려는 자를 기도로 맞이하면 치려는 자가 돕는 자로 바뀌게 된다.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역풍을 만날 때는 그 역풍은 우리를 치려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크고 담대하게 키우려는 돕는 바람이다.

주의 거울 앞에

주의 거울 앞에
창세기 31장 43절~55절

창세기 31장 49절,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명품 매장에서 명품 물건이 없어져서 매장 직원이 도난 신고를 하였다. 수사를 해 보니 배달사고 였다. 4개의 박스가 배달이 되어야 할 집에 5개의 박스가 배달이 되었다. 5개의 박스가 배달이 된 집에서 자신이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다. 잘못 배달된 집의 주인이 도둑으로 몰리게 되자, 매장직원에게 화를 내고 항의를 하였다. 항의를 한 분은 ‘목사’였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예전에는 큰 교회 목사들이 작은 교회 목사들을 돌보고, 세워 주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않고, 힘들고 고생하는 다른 후배 목사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후배 목사들은 큰 교회 목사들을 ‘참 목자’로 따르고 배웠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큰 교회 목사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그 분들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세우자고 하였다. 언약의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야곱은 라반의 딸들을 괴롭히지 말 것, 야곱은 라반의 딸들외에 다른 아내를 취하지 말 것, 야곱이 강성해져도 라반에게 보복을 하지 말 것이 언약의 주된 내용이었다.

라반과 야곱이 세운 언약이 깨어진다면 그 모든 책임은 야곱과 야곱의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고 라반은 말했다. “야곱 조상의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 사이를 판단하라(창3153).” 이 말은 라반의 하나님은 라반을 감시할 필요가 없지만,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을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라반과 야곱 사이의 언약이 깨어진다면, 그 책임은 야곱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이를 ‘적반하장’이라고 말하던가? ‘적반하장’은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나무란다는 뜻이다. 라반이 야곱과 언약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반이 아무 죄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요, 또한 라반이 가지고 있는 죄의 수치심을 야곱에게 넘기기 위함이었다.

라반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반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라반의 죄된 인생 전부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라반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라반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속임수로 살아온 라반의 인생이 라반을 속이고, 속임수가 라반을 ‘참 인생’이 아닌 ‘거짓 인생’으로 살도록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오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매일 살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매일 살피지 않으면, 라반이 살던 인생을 쫓아가게 된다. 내면의 살핌은 주님의 거울 앞에서 우리의 거짓을 벗어버림을 말한다.

선악의 다툼

선악의 다툼
창세기 31장 17절~42절

창세기 31장 42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영성신학 강의를 어제 시작하였다. 수업을 들으시는 한 권사님께서 법원에 가서, 재판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머리가 깨지듯이 아팠다고 했다. 아픔을 경험한 권사님께서 법원에는 갈 곳이 못된다고 말했다. 권사님은 자신의 머리가 아픈 이유가 재판장에 있는 분열, 시기, 속임, 욕심의 악한 영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곱은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곱은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떠났다. 라반은 야곱이 떠난 사실을 야곱이 떠난 삼일 후에 알았다. 야곱이 떠난 사실을 안 라반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쫓았다. 라반은 칠 일을 달려 야곱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라반이 300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단 7일 만에 갔다(야곱이 하루에 30마일씩 10일을 갔다고 가정하면). 라반이 급한 마음으로 야곱을 쫓았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이 야곱에게 도착한 그 밤에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창31:24).”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에게 선악을 말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라반이 야곱을 쫓는 목적이 야곱이 돌아오도록 설득하거나, 야곱이 소리 없이 떠난 사실에 대하여 책망할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은 야곱을 죽여서 야곱이 가진 모든 재산을 빼앗을 목적을 가졌다. 그 밤에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반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라반에게 분명하게 보이셨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야곱도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함께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간밤에 다시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선악을 다투고 싶어도 선악을 다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가리신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정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악을 다투려고 하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