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 뼈

살과 뼈
창세기2장 18절~25절

창세기2장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교제하는 사람이 없거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부부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이유가 서로에 대하여 모른다는 사실이다. 서로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상대를 생각하여 자기가 좋은 것을 상대에게 준다. 자기가 싫어 하는 것을 상대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많고, 그 만큼 한국에 혼자 사는 가정이 많아졌다는 시대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1:26)”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우리’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함께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아내를 데리고 오셨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남편을 주셨다. 세상의 모든 제도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부부는 서로에게 복이 되는 존재이지 화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이지 남편 아래 기죽어서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해서 아내의 군림자라는 말도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서로 동등하다. 동등한 부부 관계 속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다. 부부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경험하고, 이 땅에서 가정이 천국으로 될 것이다.

가정이 천국이 되기 위하여 살과 뼈가 있어야 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 당신은 나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라고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뼈와 살이다. 남자는 여자의 몸이다. 살과 뼈는 몸에 붙어야 한다. 살과 뼈가 몸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나간다면 몸도 살 수 없고, 뼈와 살도 살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등지고 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면서 한 몸을 이루는 관계이다.

요즘 가정이 무너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한국에 이혼을 설계해주고 도와주는 직업까지 생겼다. 부부가 무너지면 자연히 자녀들도 같이 무너지게 된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는 무너지게 된다. 뼈와 살이 찢어지면 살 수 없듯이 부부가 서로 뼈와 살이라고 말한다. 살과 뼈가 튼튼해야 몸이 튼튼하고, 몸이 건강하여야 살과 뼈가 생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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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것인가, 만날 것인가?

피할 것인가, 만날 것인가?
창세기2장 1절~17절

창세기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직면하여 죽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최초의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주지 않았다면 죽음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 죽지 않고 잘살 수 있었는데 짓궂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선악과를 주어서 지금까지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선악과를 왜 주셨을까?”하는 질문은 창세기를 읽으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떠오르는 질문이다.

어떤 신학자는 선악과를 주신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과 자기중심성 가운데에서 선택할 자유를 주신 자유인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사람을 사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주셨다고 말한다. 즉 말씀을 기억하여야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고 인격이 있는 사람인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주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때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선악과를 먹을 때는 사람이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탄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사탄을 선택한 결과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생명의 존재가 아니라 죽이는 존재이고, 또한 하나님께 심판 받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은혜의 통로였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선악과를 먹었음이 분명하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저항(이성적 저항, 사회적 저항, 영적인 저항)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죽음은 피하면 두렵고 불안해 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알고, 새로운 삶을 산다. 예수 그리스도를 피하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만나면서 살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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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복, 담겨진 복

흐르는 복, 담겨진 복
창세기1장 14절~31절

창세기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의 상징은 ‘호랑이’이다.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고 싶어서 신웅(하늘님)을찾아갔다. 신웅은 쑥과 마늘 20개로 30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산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호랑이와 곰에게 말했다. 곰은 30일이 지나서 여인이 되었고, 호랑이는 30일을 참지 못하고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인이 된 웅녀(곰사람)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항상 신당수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환웅(하늘님)이 사람으로 환생하여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이었다.

단군신화의 내용에서 몇 가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집단 무의식을 알 수 있다. 오래 참아야 한다. 기도해야 일을 이루어진다. 기도는 지속적으로 물을 떠놓고 기도해야 한다. 한국인의 형상은 곰이다. 한국인에게는 호랑이가 항상 위협적인 존재이다. 즉 위협적인 존재가 있어도 기도하면서 오래 참아서 일을 이룬다는 민족적인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오래 참는데 무엇을 위하여 오래 참아야 하는가?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오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이유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따라 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어도 복을 맛볼 수 있어도 복을 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복이 흐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복을 담을 수 있다.

우리의 복은 흐르는 복인가 담겨진 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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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새로운 시작
창세기1장 1절~13절

창세기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를 새로 시작한다. 마음이 설렌다. 하늘과 땅이 어떻게 창조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이끄실 것인지 알 수 있는 책이 창세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창조자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창조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자를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더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왜냐하면 시작을 모르면 끝도 모르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다고 말씀하신다(창1:2). 혼돈이란 말은 땅이 형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스콜필드 주석은 형체가 없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 구절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땅이 대변동을 거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한 대재난의 흔적들이 지구의 표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사건이 이전에 있었던 사탄의 반역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에스겔28장12절~15절과 이사야 14장 9절~14절을 보면 거기에 언급된 이야기들이 두로나 바벨론 왕들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땅이 사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한차례 큰 격동을 겪었다는 말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의 역사가 성경이 말하는 6천년이 더 될 수 도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과학적인 사고로 성경을 바라보기 보다는 성경을 근거한 과학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과학적 사고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믿으면 보이고 해석이 되고, 과학적으로 증거가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개인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는 세상이 되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세상은 외친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세상에 사람들은 오히려 영적인 부분에 목말라서 영적인 우물을 찾아 헤매고 있다. 영적인 부분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닉하다. 보이는 것만 찾아 해석하는 과학적인 사고가 개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 중요하다. 그 시작에 의해서 우리는 새롭게 형성되어 갈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시작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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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밧줄

자유와 밧줄
요한복음 21장 15절~25절

요한복음21장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7월 9일에 시작한 요한복음이 오늘로 끝을 맺는다. 요한복음을 시작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웹을 처음 시작할 때 설렜던 마음이 새롭게 다시 솟아 오른다. 웹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있는 웹을 만들어 주어 세상에 말씀을 전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신 이준성 장로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다. 예전 같으면 베드로가 자신 있게 ,”내!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대답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압니다’로 베드로의 말이 바뀌었다. 바뀐 말을 통하여 베드로의 인생의 주인이 ‘베드로’에서 ‘예수님’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를 이렇게 바뀌게 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렇게 바뀌었다. 베드로의 중한 죄가 예수님 앞에서 들어나자 베드로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다. 예수님을 은30냥에 판 가롯 유다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중에 누가 더 큰 죄를 지었을까? 어떤 학자는 베드로가 더 큰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세워서 죄가 없음을 판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팔았지만, 베드로는 온전하게 예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마27:3-5참조). 과거에 베드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고, 위로를 받자 베드로는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는데 오히려 더 많은 줄(법과 규칙)로 자기를 묶고 있는지-진리가 자유가 되지 않고, 진리가 밧줄이 되어 나를 묶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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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등

안내 등
요한복음 21장 1절~14절

요한복음 12장 1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조금씩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면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생활이 나아질 수 없다면 절망하게 된다. 아브라함 메슬로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랑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아브라함 메슬로의 욕구의 5단계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론이다. 그는 빈민층에 태어나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그는 빈민가에서 먹을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가 공부를 잘하여 대학교를 가니 안전을 원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안전이 채워지니 학교에 모임에 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빈민가의 사람이라고 학교에 어떤 그룹에 속할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한 그룹에 속하니 다른 욕구가 생겼다. 그가 그룹에 속해도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했다. 그는 그룹에서 존경을 받고 싶어했다. 학문의 업적을 쌓아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니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겼다. 그가 말한 자아실현이란 모든 사회적 그룹의 사람들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교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욕구도 없었다.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살았다. 생명이 있기에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고기를 잡았다. 제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절망과 포기 그리고 의미 없는 삶이었다. 예수님께서 좌절한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기를 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생활에 지친 제자들에게 “아침을 먹으라(요21:12)”하고 말씀하신다. 아침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제자들은 직감적으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절망의 눈에서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 것이다.

우리도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세상은 노력하여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세상에 부활의 빛이 사라진다면 모두들 절망 속에 헤매게 될 것이다. 부활의 욕구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는 안내 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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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꿈

오늘 주신 꿈
요한복음20장19절~31절

요한복음20장21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로라.”

사는 모습들을 보면 각양각색이다. 어릴 때에는 장미 빛 인생을 꿈을 꾸어보지만, 세월이 지날 수록 꿈은 희미해져서 기억도 나지 않고, 있는 꿈도 잿빛으로 변해간다. 세상이 두렵고, 사람들이 두려워서 꿈을 갖기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세상과 사람들 속에서 섞이지 못하고 구별되게 살게 하였다. 제자들은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찾아가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꿈이 있었다. 제자들이 꿈을 꾸지 못하고 잃어버린 이유는 그들 마음에 평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 사람이 주는 두려움, 실패가 주는 두려움, 절망이 주는 두려움이 마음의 평강을 사라지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옆에 계시지 않으니 제자들은 두려워졌다.

영아들은 어머니가 없으면 불안해 한다.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영아들의 마음에는 평강대신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영아들은 어머니를 찾기 위하여 슬프게 운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말을 잊어버렸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 돌아와?’라는 세상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자들의 지식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저항기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신다, “보지 못하고 나를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20:29).” 우리는 복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복된 사람이다. 복된 사람은 마음에 평강이 있다. 복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있다. 그러나 복된 사람의 모습이 되지 못하게 마귀는 마음의 평강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평강이 없는 마음에 성령께서 계시지 못하기 때문이다(요20:21-22참조).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복된 사람은 예수님이 주신 살아 있는 꿈이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무엇인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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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손을 내밀 분

오늘 손을 내밀 분
요한복음 20장 1절~18절

요한복음20장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8년 전에 몇 년 동안 멘토로 생각하던 목사님 교회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교회에 사역을 시작하는데 “사람은 지내봐야 일지”라는 말을 내게 하셨다. ‘지금까지 나와 지내 온 기간은 나를 알 수 있는 기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목사님 말이 마음이 상하였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경험하다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거짓말로 포장 하고 있어서,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야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게 되고, 또한 그 사람들이 거짓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실제의 모습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면 삶이 단순하게 되어서 자신을 투명하고 솔직하게 들어나게 된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년 수가 지날수록 더 복잡하고,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장사 지낸 무덤을 찾아 갔다. 찾던 예수님이 없어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우는 이유를 물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운다고 마리아는 대답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대답을 하면서 뒤돌아 보았지만, 그녀 뒤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안타까워서 울고 있었지만, 정작 마리아는 뒤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을 바라보면 너무 어둡다.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돈만 사랑하고, 성적인 욕구가 넘쳐 흐른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이 어두워서 예수님이 뒤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계시지 않는 것 같아서 울면서 탄식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으로 다시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이 어두워갈수록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의 뒤를 예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이 없지만, 어두운 세상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소망이 생긴다.

오늘 우리의 손을 내밀 분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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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붙잡을 것

오늘 붙잡을 것
요한복음19장 31절~42절

요한복음19장 36절,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UC San Diego에 딸이 샌디에고에서 금요일 날 집에 와서 토요일 날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로 일찍 돌아간 이유는 아파트를 같이 쓰는 선배 언니가 다니는 교회가 어떤지 방문하기 위하기 위함이었다. 딸이 쓰는 방에 선배 언니 둘과 함께 지내는데, 두 언니들은 새벽마다 일어나서 손 붙잡고 기도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손에 죽으셨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손에 죽으실 이유도 없고,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나님이시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실 수 있다. 온전한 육신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가 느끼는 모든 아픔, 괴로움, 기쁨, 평안 등을 경험하셨고, 우리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아이를 잃어 본 사람이 아이를 잃은 사람과 함께 아픔과 나눌 수 있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아픔을 겪었기에 우리와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또한 온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아픔을 온전하게 해결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사람이자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를 놓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땅에 흘려졌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하늘에 속한다. 그러나 땅의 것을 붙잡으면 땅에 속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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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잊을 일

오늘 잊을 일
요한복음 19장 17절~30절

요한복음19장 30절,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어제 아들에게 한 장의 생일 카드를 받았다. “가끔 내가 아빠 닮은 모습이 놀랍지? 나도 그래. 아들인 걸 어떻게 ㅋㅋㅋ, 매번 조언 해 줘서 고맙고. 흘려서 말해도 나는 가슴 깊이 다 새겨 듣고 있어…(중간 생략)…아빠는 벌써 최고의 아빠니까 내가 더 바랄게 없네.” 아들의 카드가 내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다. 나와 아들이 생일이 같은데 나는 아들의 생일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는데, 아들은 나를 위하여 카드에 100불을 넣어서 책값으로 유용하게 쓰길 원한다는 글과 함께 내게 카드를 주었다. 아들에게 생일편지를 받아보니 “주님 귀한 아들과 딸을 네게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말이 하나님께 절로 나왔다.

세상을 사는데 순례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피난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순례자는 자기가 원해서 떠나는 사람이고, 피난민은 환경에 의해서 밀려나는 사람이다. 순례자는 가진 것을 나누며 살지만, 피난민은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한다. 피난민은 많은 것을 가져도 감사가 없지만, 순례자는 작은 것에도 감사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순례자의 삶을 마치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승리한 믿음의 선배를 바라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본다. 조금 가지면 더 가지려고 하고, 조금 올라가면 더 올라가려고 하고, 조금 내려가면 주님을 원망하고, 시작은 주님을 위한다고 시작을 하였지만 끝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일들이 교회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에 소망을 갖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능력이 되었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다.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면 기쁨보다 후회 일이, 감사보다 회개할 일들이 더 많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시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오늘 우리가 잊을 일은 무엇인가? 아니 오늘 우리가 잊어야 시작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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