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선택한 반응

오늘 선택한 반응
요한복음 19장 1절~16절

요한복음19장 10절~11절,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친히 고난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해할 권한이 있었다. 주어진 권한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주셨는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묵묵히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피하려고 많은 수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 따라 고난에 대한 반응이 다르듯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나를 해할 권한을 주지 않았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힘을 써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쪽으로 빌라도의 힘과 권한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그의 권한과 힘을 써도 놓아 줄 수 없었을 때 빌라도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빌라도는 혹시 예수님이 정말 왕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각각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말씀 앞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 말씀을 회피하는 사람, 말씀에 저항하는 사람,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 말씀에 따라 살면서 기뻐하는 사람 등 사람의 반응은 각각 다를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은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고 말씀한다. 말씀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히브리서는 말한다. 말씀 앞에 오늘 우리가 선택한 반응은 무엇일까?

large porn tube

오늘 지킬 것

오늘 지킬 것
요한복음 18장 28절~40절

요한복음18장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 다투는 것 하나가 자존심 싸움이다. Sparkling water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와 나눌 때 아내를 힘들게 한 적이 있다. 나는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오는 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아내는 sparkling water는 자연적으로 나오 물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인 물이 아니라고 하는 근거는 과학적으로 탄산이 물에 녹으려면 자연적인 압력을 넘는 높은 압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가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온다고 하였고, 아내가 주장하는 근거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듣거나 읽었기 때문이다.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내는 내게 20불 내기를 하지고 하였고, 나는 아내의 내기에 거절하였다. 그런데 내가 아내에게 sparkling water가 자연적으로 나온다는 상상력은 좋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아내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미쳤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내에게 말한 ‘상상력’은 ‘창조성’을 말하였는데…

개인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자존심이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존심 아래 있던 개인의 수치심이 올라와서 자기(self)를 허물기 때문이다. 자기가 수치심에 짓눌려서 힘든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받고 계시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빌라도에게 대답하신다. 왕과 진리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반대로 질문을 하면 왕이 거짓말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써 진리를 말하는 왕에 왕이심을 강조하신 말씀이라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세상이 예수님의 것이라면 예수님의 종들이 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세상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세상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나를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려고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lesbian porn

오늘 선택할 것

오늘 선택 할 것
요한복음18장 12절~27절

요한복음 18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루살렘을 여행하지 못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여행하다 보면 시온산 남쪽 중턱에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다고 한다. 통곡 교회 꼭대기를 닭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갈 때, 베드로는 문 밖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베드로 통곡교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교회 꼭대기에 닭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체포되기 전에 예언하셨다. 예수님의 예언에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자기는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담은 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거짓임이 밝혀졌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그것도 한 번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갈수록 부인의 강도가 강하여 졌다. 베드로는 한 번은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장면 가운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의 고난에는 어떠한 사람도 동참할 수 없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누구도 죽음을 선택해서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십자가의 길만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자기를 보호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다.

요즘 마지막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지진과 기근, 전쟁과 전염병, 특히 하늘의 징조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불안한 상황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우리는 떨 수 있다. 예수님 옆에 있으면 그 분의 당당함이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세상 옆에 있으면 세상의 불안과 공포가 우리에게 전해 질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쫓을지 아니면 어둠과 불안에서 건지실 예수님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을 선택하여 따르고 있는가? 불안인가? 당당함인가?

youporn

오늘 찾을 것

오늘 찾을 것
요한복음 18장1절~11절

요한복음18장 4절,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싸우는 싸움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다. 어제는 노트북의 자판이 움직이지 않아서 힘든 하루였다. 노트북 자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내가 웹사이트에 설교를 올리다가 바이러스가 노트북에 침투해서 자판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줄 알았다. 그리고 어제 올린 설교가 은혜가 있으니 설교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컴퓨터 수리 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설교가 은혜가 있으려나 보다’라는 생각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트북의 자판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아침에 물티슈로 노트북 자판을 닦고, 마른 종이로 닦았는데, 그 일을 하는 도중에 노트북 자판에 물이 들어가서 자판이 고장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아버지께 하는 고백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하신 말씀을 이루어지게하려합니다(요18:9)”이다. 내게 온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고백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살 때에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시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찾았고,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찾았고, 베드로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베려고 예수님 옆에 있었다. 저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가 달랐다. 자기가 원하는 마음의 동기를 이루려고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돈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인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헤어진 가족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하고 예수님께서 묻고 계시지만, 그 질문은 ‘너희는 예수님을 찾는 진정한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가?’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라는 질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가? 오늘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다시 “오늘 누구(무엇을)를 찾고 있느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anime porn

오늘 머무를 곳

오늘 머무를 곳
요한복음17장 21절~26절

요한복음17장 21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계정부에 대하여 들어보았는가? 세계정부는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사람들을 통치하려는 기구를 말한다. 세계정부는 성경에서 시작된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되어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서 말하는 세계정부와는 내용이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세계정부는 개개인을 종으로 묶어 두어 개인을 통치하고 통제하여 한 통치자의 끝없는 욕심을 이루기 위한 정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개개인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어서 개인이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나라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게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나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도 하나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하나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지만, 세상이 원하는 하나는 속임수로 하나되게 한다.

그리스도인인과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거짓에 따라 산다면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 다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경쟁을 해야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산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신다(요17:24). 그러나 세상은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서로에게 주어진 것을 빼앗으면서 살라고 한다.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관을 따르는 이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 세상 안에 있으면 끊임없이 경쟁하고, 다투어 나누어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서로가 서로 안(한 몸)에 있어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오늘 우리가 머무를 곳은 어디인가?

xvideos

오늘 남길 것

오늘 남길 것
요한복음17장 1절~20절

요한복음17장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돈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은 돈을 남길 것이고,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명예를 남길 것이고, 믿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믿음을 남길 것이다. 떠날 때 남긴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는 단서가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바란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을 지켜주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이유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예수님에게 맡긴 사람들이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이니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달라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였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이 남긴 것이 이어지도록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제자들과 남긴 것은 영생과 기쁨이다. 그러나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고, 제자들이 미움을 받아서 악에 빠질 것을 예수님은 염려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영광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을 예수님은 염려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제자들에게는 영생과 기쁨을 남기고 싶어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남기신 영생과 기쁨으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또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린 영생과 기쁨이 이어지기를 원하였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늘 남긴 인생의 발자국이 주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이기를 기도한다.

milf porn

오늘 구할 것

오늘 구할 것
요한복음16장 25절~33절

요한복음16장26절,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오늘 새벽(3시20분)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개기 월식이 되어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는 브러드문이 되었다. 학교 제자가 브러드문을 사진으로 찍어 내게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고양이의 눈이 오른쪽으로 90도 돌아 간 모습이었고, 색은 붉은 빛이었다. 세상이 붉은 빛으로 변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라는 메세지 같았다. 요엘서2장 31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라고 말하고 있다. 종말 때의 징조는 먼저 해가 어두워지고, 이어서 달이 핏빛 같이 변한다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출교를 당하거나 죽음을 당할 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대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은 육신의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였지만, 성령님은 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이니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하신 또 다른 말씀은 제자들은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버지께 직접 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직접 아버지께 구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환란이나 핍박이 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평안이다. 요즘 전쟁과 전쟁, 세계 곳곳에 기근의 소식, 지진과 화산폭발, 그리고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까지 세상이 어수선하다. 이는 사람들의 욕심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환경이 변하니 기후가 바뀌고, 기후가 바뀌니 사람들이 더 욕심을 부려 마음이 사막과 같이 메말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오늘 우리가 구할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더 이상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하는 기도가 아닐까?

rape porn

오늘 할 일

오늘 할 일
요한복음16장 1절~24절

요한복음16장 4절,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어제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을 쓴 서사라 목사님을 만났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을 위하여 ‘구국 기도’를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도 요즘 위태위태하다. 올해 목표가 10조를 벌어야 하는데 4조만 벌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스마트폰을 더 산 값으로 만들어 파니 매출이 많이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통일이 되면 더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적어졌다. 미국도 년 소득 25,000불 이하 버는 사람들의 사회기부금액은 늘었고, 년소득 10만불 이상 소득이 있는 사람들의 사회기부액은 줄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성경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벌였다. 잔치를 벌이는 부자 집 앞에 있던 거지 나사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결국 굶어 죽었다. 부자도 잔치를 벌이고 자기의 욕심대로 살다가 죽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누가복음16장 19절에서 20절 사이에 있는 말의 의미를 유추해 보면 안다. 19절 말씀은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절, 그런데 나사로가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절과 20절 사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부자가 지옥에 간 가장 큰 이유는 부자가 놀고 먹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부자가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라고 말씀하신다. 표준새번역에 이 말씀을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절과 3절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죽이고, 그들이 그 일을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제자들을 죽여다고 스스로 말할 것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하나님과 상관 없이 스스로를 믿고 산 사람들의 결과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교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여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바라보지 않고, 나 자신을 매일 점검한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모습을 성경에 비추어 말씀과 먼 ‘나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free hd porn

친구인가, 종인가?

친구인가, 종인가?
요한복음 15장 15절~27절

요한복음 15장 15절,”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나가면 두려운 것이 없다. 동네에 큰 형도 두렵지 않다. 아이보다 크고 힘이 센 어른을 만나도 든든하다. 아버지는 항상 아이의 든든한 후원자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은 “서로 사랑”하는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 있는데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서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랑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고 희미해지고 있다. 사랑한다는 의미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하는 조건적 사랑이나, 남녀의 육체적인 사랑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주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말한다. 상대나 조건에 따라서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서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또한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을 주고 받고 하는 거래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어떻게 서로 조건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서로 ‘아가페’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아가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요15:16)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한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고, 그리고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 만약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서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는 택한 사람들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세상이 미워해도 우리는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기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종파에 속한 젊은 여인이 나와 성경에 대하여 나누자고 했다. 나는 목사이고 신학자라고 젊은 여인에게 말하였는데도, 그 여인은 한사코 나와 성경에 대하여 나누자고 했다. 물론 어떤 종파에서 나왔는지 알기에 나는 괜찮다고 사양을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아내가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아내의 깨달음을 나에게 전하였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죄인이 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말씀을 전하는지 ‘죄’를 면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사랑은 자유를 주지만, 죄는 묶임을 준다. 사랑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만, 죄는 사망의 종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친구인가?

free hd porn

가지가 말하는 것들

가지가 말하는 것들
요한복음15장 1절~14절

요한복음15장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사람들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꿈을 꾼다. 마음에 둔 소원이 이루어질 때를 상상해 본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또 다른 소원이 생길 것이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소원을 바랄 것이다.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없다.

오늘 말씀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데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조건이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을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는가? 나는 포도농사를 지어보지 않았지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오늘 말씀을 거꾸로 추적해 보면,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고,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모습은 성부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이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하고 명령하신다.

명령은 우리가 행하여야 한다. 명령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아는 것이다. 거하는 모습을 알고, 거함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깨닫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랑이 머리에서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으로 느끼려면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이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인가? 만왕에 왕이신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왕의 아들과 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다. 왕의 나무에서는 왕자나 공주의 가지가 나오고, 가지가 말하는 것은 가지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이고 나타내는 일이다.

gay p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