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행복, 밀려드는 행복

찾는 행복, 밀려드는 행복
요한복음14장 25절~31절

요한복음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 중에 하나가 ‘행복’이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직장, 행복한 교회, 행복한 나를 꿈꾼다. 행복한 꿈을 꾸지만 행복을 맛보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가 없는 가정, 개인 같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을 듣고 갈등이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을 쫓아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총리도 되고, 장관도 되려고 하였는데 그 꿈이 무너졌다. 믿었던 예수님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멀어지자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마음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기대와 욕구가 있다. 기대와 욕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하고 좌절한다. 만약 실망과 좌절이 너무 크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을 수 있다. 제자들도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의 실망과 좌절을 맛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너희가 평강을 얻을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뿐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는 이 세상의 임금이 오기 때문이다(요14:30). 세상의 임금이 오면 예수님 대신 세상 임금이 왕노릇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세상 임금이 아무 것도 빼앗을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 임금이 빼앗을 수 없다가 아니라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임금이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로는 우리는 세상의 임금이 우리를 취하고, 어렵게 하는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이는 세상 임금이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착각을 받아들이면 착각이 상황을 깨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각과 느낌을 따르지 말고, 말씀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이 무엇인가? 태풍이 밀려와도 태풍 가운데 평강이 있는 것처럼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면 평강이 넘치는 것을 알고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사실 할 일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구하는 일이다. 오늘 구할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첫째도 예수 그리스도 안, 둘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청일 것이다. 그러면 찾던 행복이 소리없이 밀려 올 것이다.

xvideos

독수리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독수리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요한복음14장 1절~24절

요한복음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신학교 제자 한 분이 어제 나에게 카톡으로 한 유투브 웹 사이트를 보라고 했다. 홍혜선 전도사님이 한국 전쟁에 대하여 예언한 말이었다. 한국에 대한 사정을 모른다고 하는데 한국 상황을 알고 말하는 것 같이 구체적으로 말하였다.군인과 어린이 노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또한 대통령 뒤에 움직이는 어른이 현실에 대한 상황을 잘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땅굴 15개를 찾아내어야 한다 등 구체적으로 숫자와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을 세세하게 말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도사님의 말하는 핵심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이다. 특히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80%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고, 그로 인하여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찢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숫자나 전쟁이 일어날 달(금년 12월) 같은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마음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전도사님의 말을 들은 사람이 근심과 걱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근심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이나 종말론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된다. 한국 전쟁에 대한 예언도 믿는 자에게는 소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근심이 된다. 왜냐하면 한국 전쟁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마음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미리 알려 주신 이유가 만약 너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리고 회개의 시간 내에 돌아오면, 그 일은 면하리라는 메세지가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를 잘 택하여야 한다. 돌아갈 때, 가야 할 때, 멈추어야 할 때, 회개해야 할 때, 그리고 소망을 가져야 할 때 등 그 때에 맞도록 사고, 감정과 의지를 맞추어야 한다. 지금이 회개할 때이다. 회개할 때가 지나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고 심판하신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민족, 가족, 이웃, 개개인이 더 이상 주님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한다. 나 먼저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독수리와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날아올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기도 한다.

youjizz

내게 소중한 사람

내게 소중한 사람
요한복음 13장 31절~38절

요한복음13장 34절,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세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사랑’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사랑만큼 그 뜻이 다양한 것은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이 말씀에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첫째는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는가? 둘째는 예수님께서 오기 전에 있던 계명은 무엇인가?

두번째 질문에 먼저 답을 해본다. 예수님 오기 전에 계명은 율법이다. 그리고 율법은 십계명으로 요약이 된다. 십계명은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어본 말씀을 가지고 요약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영생을 얻기 위하여 율법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고 물으니,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이라고 대답하였다(눅10:27).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면 첫번째 질문인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자리 다툼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서로 다투고 있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만 명령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어머니와 같은 사랑, 서로에 대한 긍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서로 기대어 가는 길이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가는 인생 길에서 서로 기대어 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내게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movie2k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요한복음13장 21절~30절

요한복음13장 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 스타일대로 본다. 같은 그림인데 어떻게 보면 젊은 여성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서 젊은 여성의 그림을 먼저보게 되면 늙은 할머니의 모습의 그림은 보이지 않게 된다. 반대로 먼저 늙은 할머니의 모습의 그림을 보게 되면 젊은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다. 한 번 인식된 지각은 바꾸기 어렵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동안 같이 생활하였어도 그들의 지각을 바꾸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고,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베드로는 그에게 머릿을 하여 예수님을 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시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팔린다는 사실보다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을 팔 사람보다 팔릴 예수님에게 더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의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먼저 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반영하듯이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가롯유다보고 예수님을 파는 일을 속히 하라)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제자들 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삶을 살면서도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먼저 할 때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다. 중요하고 긴급한 일인데 먼저 하지 못하고 나중으로 미룰 때가 있다. 사람의 시간은 수명이라는 시간 속에 제한이 되어 있다. 마귀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을 나중으로 미루게 하고, 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보내게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의미 없는 싸움을 하게 한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무엇일까?

cartoon porn

바빠서 챙겨야 할 일

바빠서 챙겨야 할 일
요한복음13장 12절~20절

요한복음13장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중년이 지나면서 중년의 위기를 겪는다. 융은 중년의 위기를 겪는 이유가 자기를 찾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즘 중년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자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에 바빠서, 삶에 찌들어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에게 발을 씻어 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서로의 발을 씻기 전에 알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는 것과 보냄을 받은 작 보내는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은 너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말이 아닌가?

그러나 좀더 깊이 묵상을 하면 서로 섬기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보낸 자가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서로에게 평등하도록 주장하지 말고,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평등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평등이란 각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녀들에게 가장 참기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중 하나가 “unfair(불평등)”이라는 단어이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달라는 자녀들의 요구이다. 자녀들이 말하는 평등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단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말하는 섬김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데서 나오는 단어이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포기할 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자기를 포기하였는데 어떻게 자기를 찾을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나를 바라볼 때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기를 찾으려고 거짓된 자기를 진정한 자기라고 착각하면서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참과 거짓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라 보낸 사람이 알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바쁘게 하여 거짓 자아를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한다. 바빠서 챙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black porn

가면놀이

가면놀이
요한복음13장1절~11절

요한복음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내가 부목사 생활을 할 때였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내게 “사람은 겪어 봐야 알아”라고 말하였다. 그때는 그 목사님의 말의 의미를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말한 대로 있는 그대로 보여진 그대로의 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산다. 이를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라고 말하고 각자가 맡은 사회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역할에 맞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기업에서 과장인 아버지가 있다면 집에서는 아버지의 특성, 직장에서는 과장의 특성, 교회에서는 성도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개인은 개인이 소속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성격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가져야 할 성격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으로 보여주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글 가운데 들어가서는 안된는 글이 사이에 들어가 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이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할려는 가롯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음을 의미한다.

한결같이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기란 어렵다. 상대방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하여도 인간 관계는 무너진다. 그런데 자기를 배신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배신하려는 사람을 그냥 둘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음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겨줄 때는 발을 씻기신 이유를 몰랐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의미를 깨달았다. 섬김은 종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낮은 자리에서 종을 섬기는 것이다. 주인이 낮은 자리에서 종을 섬기려면 ‘자기’가 살아 있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사람은 페르조나를 당연히 인정하고 있다. 물론 사회에서 살려면 사회에 맞는 역할의 특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면 뒤에 숨겨진 개인은 자신의 아픔을 상대방에게 내어 놓지 못하고, 진솔하게 그들을 대하지 못한다. 이는 페르조나는 ‘자기’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솔하고 솔직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가면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과 진솔한 만남이 시작이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기(?)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면놀이에서 해방되어 나를 찾는 진솔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youjizz

시소놀이

시소놀이
요한복음12장44절~50절

요한복음12장47절~48절,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나에 그를 심판하리라.”

음식점에 가서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이냐?”하고 물으면 음식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선택하라고 물으면 바로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선택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고, 선택이 쉬운 사람이 있다.

오늘 말씀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거절하고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부류의 사람들의 인생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을 거절하여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죄를 지을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유사하게 들린다. 이는 세상에서 행하는 법과 다르다. 세상의 법은 죄를 지을 의도가 있던 없던 심판한다. 죄를 지을 의도가 없는 사람은 ‘과실범’으로 심판하고, 죄를 지을 의도가 있는 사람은 ‘고의범’으로 처리한다. 과실범에게 주는 혜택이 있다면 고의범보다 과실범의 형벌을 낮추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려 한다. 그리고 될 있는 한 적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기 원하신다. 나를 거절한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면 나 같으면 가차없이 심판 할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에게도 영생의 기회를 주시기 원한다.

진리와 은혜의 균형을 갖춘 예수님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만 강조하여 옳고 그름만 따진다. 옳고 그름에 은혜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은혜만 강조하여 어떠한 죄도 넘어간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못하다. 두 종류의 사람 모두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진리, 진리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은혜에 편에 있는가? 아니면 진리의 편에 있는가? 은혜와 진리 사이에서 끊임없는 시소놀이를 해야 할 것이다.

free gay porn

사랑의 큐피트

사랑의 큐피트
요한복음12장 37절~43절

요한복음12장 40절,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과 감각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는 깨닫기 어렵다. 예를 들면 신호등에서 가장 위에 있는 색깔은 무엇인가? 매일 신호등을 보지만 정작 신호등 맨 위에 있는 색깔이 어떤 색깔인지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 눈 앞에 나타나셨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주는데 어떠한 사람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나면 믿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나도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시고 들려주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복음12장 41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려고 혹은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셔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면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사람의 내면은 두렵워 떨게 된다. 모든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두려워 떤다. 마치 왕 앞에 서면 백성들이 두려워 떠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두렵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쫓아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부인하면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억압된 두려움은 다른 욕망을 쫓거나 사물이나 사람을 의지하게 한다.

오늘 말씀 중에서도 관리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많지만 그들이 드러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렇게 말하면 그들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출교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그들에게 존재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아직 사람의 영광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도 사람의 영광을 버리지 못하면 여전히 두려움이 존재하게 된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경외)하면 사람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영광은 순간이다. 사랑의 큐피트가 어디에 꽂히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이 사라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이 들어나기도 할 것이다.

large porn tube

흐르는 전율

흐르는 전율
요한복음 12장 20절~36절

요한복음12장34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사람들이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살기가 그 만큼 힘이 들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지금의 어려움과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로마의 시민이면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로마 시민의 종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로마는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지만, 로마시민과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의 양적인 삶의 차이는 있다. 양적인 삶이란 물질이 풍부한 삶을 말한다. 물질이 풍부하면 삶이 편안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이 정신적인 행복이나 영적인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을 첫번째 가치로 두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요12:16)”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소”하고 기도하니, “내가 이미 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너를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는 사실을 기도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온전한 인간의 인성으로 사셨던 것을 독자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인성으로 사신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릴 것이고, 그가 땅에서 들릴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다. 그 어떤 존재나 창조물이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없다. 그 분 스스로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던져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 땅에서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첫번째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행하여 할 가치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리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하늘로 들려져야 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이 흐르는 전율로 우리 마음에 다가올 것이다.

lesbian porn

떨어지는 폭포수

떨러지는 폭포수
요한복음 12장 20절~36절

요한복음12장34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사람들이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살기가 그 만큼 힘이 들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지금의 어려움과 비슷할런지도 모른다. 로마의 시민이면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로마 시민의 종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로마는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지만, 로마시민과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의 양적인 삶의 차이는 있다. 양적인 삶이란 물질이 풍부한 삶을 말한다. 물질이 풍부하면 삶이 편안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이 정신적인 행복이나 영적인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을 첫번째 가치로 두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요12:16)”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소”하고 기도하니, “내가 이미 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너를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는 사실을 기도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온전한 인간의 인성으로 사셨던 것을 독자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인성으로 사신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릴 것이고, 그가 땅에서 들릴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다. 그 어떤 존재나 창조물이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없다. 그 분 스스로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던져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 땅에서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첫번째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행하여 할 가치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리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하늘로 들려져야 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이 떨어지는 폭포수로 우리 마음을 시원케 할 것이다.

youp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