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때

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때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요한복음12장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하고 한탄하는 소리와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그때 나의 대답은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이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새옹지마’의 뜻은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변화가 무쌍하여 복과 화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일들을 보고 복과 화를 판단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눈으로 복과 화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새옹지마는 눈으로 보이는 일들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판단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제자들도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다리가 아파서, 혹은 예수님이 조금 쉬고 싶어서 나귀를 타셨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나귀 타신 사건은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사건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건으로 제자들은 재해석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된 것이다. 믿음의 눈을 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기 위하였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왕이신 메시아셨어’라고 성경이 기록한 사실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때 나귀를 탄 예수님이 왕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나귀 탄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셨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지금 잘 되었다고 좋아할 것 없다. 그렇다고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어깨를 축 내릴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믿으면 지금 눈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내 눈으로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과거의 아픔과 눈물이 기쁨과 환호로 바뀌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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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꼬리, 뱀 머리

용 꼬리, 뱀 머리
요한복음12장 1절~11절

요한복음12장 8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일상생활에 바쁘다 보면 때로는 현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자리를 돌고 또 돌다가 지쳐버릴 때가 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문뜩 떠오르는 질문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의문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았을까?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가롯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까? 오늘 말씀에 나오지 않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이 된 후에 왕 다음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툰 것이나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툰 기록(막9:34; 10:37)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동기도 가롯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에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비싼 향수(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 발 아래 붓고, 여인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 백데나리온(근로자 300일치 급료)이었다. 아마도 마리아의 전 재산을 예수님께 드렸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가롯 유다는 마리아를 비난하였다;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었으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쉽게 돈을 이렇게 허비하느냐?”

이렇게 말한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가만 두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롯 유다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충고이다.

용의 꼬리가 되지 말고 뱀의 머리가 되라고 사람들은 충고한다. 용의 꼬리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결정하지 않지만, 뱀의 머리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결정해야 한다. 믿는 자로써 뱀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할 것과 나중에 포기해도 되는 것을 구별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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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동기, 선한 결과

악한 동기, 선한 결과
요한복음11장 45절~57절

요한복음11장 50절~52절, “50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절: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어수선하다. 곳곳에서 지진과 스나미, 전쟁과 기근이 멈추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만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들어내기를 좋아한다. 험악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심히 염려가 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을 그대로 두면 예수님을 믿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자는 말이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동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존경하여 두려워 떠는 것은 예배를 위한 두려움이지만, 지금 가야바가 느끼는 두려움은 육신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가야바의 지위를 지키지 못하면 육신의 욕구도 무너진다는 예견되는 결핍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육신을 지키려하는 가야바의 두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있다. 악한 동기도 하나님이 계시면 선한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회가 싸우고, 교회가 욕을 먹고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예측하지 못할 하나님의 선한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선한 동기를 가져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동기를 가진 악인을 통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기 보다는 성급하게 우리가 먼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대신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불신앙에서 나오는 행동이고, 불신앙은 육신을 앞세우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행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의 역할을 육신이 대신하는 교만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악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선한 일로 바꿀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이 염려가 되지만 소망이 있는 이유는 험한 세상 속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실 선한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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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 곁에 있는 자

떠나는 자, 곁에 있는 자
요한복음11장17절-44절

요한복음11장25절~26절,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한국에 있을 때 아내와 함께 어느 커피숍에 들어갔다. 나는 아이스 그린라테, 아내는 아이스 카페 라테를 주문하였다. 아내가 주문한 아이스 카페 라테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전에 부산에서 아이스 티가 나오지 않고 핫티가 나와서 아이스티를 주문했다고 하니 주인이 영수증을 보라고 한 것이 기억이나서 내가 영수증을 확인해야 하는데 확인하지 않아서 죄송하다고 말하였더니, 종업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이스카페라테로 바꾸어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이스카페 라테라고 분명히 주문했는데 주문을 받는 사람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받았고,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종업원은 아이스 아마레카노를 아이스 카페라테로 바꾸어 주었다.

오늘도 미국에서 한국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컴퓨터 밧데리가 다 되어서 밧데리를 사러 컴퓨터 수리점에 갔다. 밧데리 가격을 물어보니 컴퓨터 수리점에 계시는 직원이 40~50불이라고 말했다. 20불을 예치하고 밧데리를 주문하였다. 정확한 컴퓨터 모델을 알려달라고 해서 집에 와서 직원과 통화하고, 직원에게 정확한 밧데리 가격을 물었다. 그는 정확하게 50불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게에서 40불에서 50불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직원은 45불에서 50불 사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고 말하면서 밧데리는 3일 후에 오느냐고 물었다. 그때 수리 직원은 자기는 3일 후 온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3일에서 5일 걸린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수리 직원이 3일 후에 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또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침 없이 말한다. 특히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종업원은 자기를 변명하고, 손님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운다. 이런 이야기를 내 아내에게 하였더니, 내 아내는 세상이 각박해서 그렇다고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주’인 것은 믿지만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라고 믿지는 못하였다. 신앙 깊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마리아가 들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에서 울면서 “오빠 나사로가 살았을 때 예수님이 왔으면 살았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였다.

아무도 나사로가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여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과 뜻이 자기를 채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한발 더 나가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지 못하였다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아무도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죽은 나사로는 다시 사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도 예수님 곁에 있다면 살아 있는 말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 곁에 있어야 기적을 본다.

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는 자인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도 예수님 곁에 있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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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장 차이

종이 한 장 차이
요한복음11장 1절~16절

요한복음11장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9월13일(토) 이라크 반군인 IS가 영국인 구호요원 데이비드 헤인즈(44)를 참수하였고 발표하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이라크 정부와 협력을 약속하는 장면을 보여 주면서, “이 영국인(헤인즈)은 당신의 약속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한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참혹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라는 의문은 계속 될 것이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좋을 때에 하나님을 보기란 더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을 만났지, 좋을 때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은 적다.

오늘 말씀 중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거나, 징계하는 사람들이 병이 들었으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생명이시지 죽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어느 형제를 만났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최근에 3명이나 잃었다고 내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어찌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있는가?”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늘 말씀에도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서 나사로의 여동생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사로의 여동생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빨리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오기를 원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나사로에게 달려 가지 않았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오히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를 향하여 떠나셨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향하여 가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양파껍질을 까도 또 양파 껍질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까도 까도 그 속을 모르는 양파와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으니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요3:16).

의심과 믿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어지고, 예수님을 등지면 의심하게 된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실족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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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아래 흐르는 물

마음 아래 흐르는 물
요한복음10장 22절~39절

요한복음10장32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즘 한국은 ‘소통’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소통이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뜻이나 생각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로 말이 통하려면 어떻게 할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여러 선한 일들을 너희에게 보였는데 그 중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요10:32)”하고 물으신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너(예수님)를 선한 일로 돌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을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한 일을 하셨는데 선한 일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선한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의 동기가 서로 달랐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하시는 동기(이유)는 유대인을 불쌍히 여겼기(사랑) 때문이고, 유대인들이 선한 일을 하는 동기는 ‘나’를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생의 자랑)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의 동기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싶어서(자기를 들어내고 싶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진 잘못된 선한 동기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유대인)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하고 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스스로가 자랑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귀하게 여기고,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신으로 나타내고 계시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선한 일에 대한 잘못된 동기를 바로 잡고자 하셨다.

같은 예수님을 보아도 마음의 동기에 따라 예수님이 달라 보인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마음의 동기에 따라 말씀이 칼날이 되어 마음을 쪼개기도 하고, 마음이 말씀을 삼키기도 한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생각과 뜻이 통하려면 마음에 소원이 같아야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 움직이는 욕구가 다르다면 서로 소통할 수 없다.

마음 아래 흐르는 물은 어떤 물인가? 그 물에 따라 예수님과 소통할 수 있기도 하고, 예수님과 벽을 쌓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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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없는 내일

오늘 없는 내일
요한복음10장 1절~18절

요한복음10장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어제(9월9일) 인천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에 올라탔다. 그 동안 아내하고 잘 지냈던 장모님을 혼자 두고 와야 했고,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든 어머님을 묵묵히 지켜 보아야만 했다. 비행기 티켓과 여권이 있는 사람은 공항 문을 들어가고, 비행기 티켓과 여권이 없는 사람들은 공항 문 밖에 있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문 밖에 있는 사람들과 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별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경계로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구별된다. 구원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은 부단히 노력하고, 영원히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없다. 진씨황제는 ‘불로초’를 찾아서 영원히 살려고 했지만 죽었고, 노인들도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죽는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성경은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말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을 빼앗기지 말아야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도둑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도둑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킬 힘이 없다. 선한 목자가 계셔야 ‘영원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일뿐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선한 목자가 계셔야 ‘영원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끝이 없다는 의미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 지켜지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오늘’을 지키는 일이고, 오늘을 지킨다는 것은 선한 목자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둑들은 오늘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 도둑들은 오늘이 없는 내일이 우리에게 있다고 속삭인다. 오늘을 내일로 미루게 하고, 오늘 하지 못한 것들은 충분히 내일 할 수 있다고 속인다. 거짓말로 오늘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오늘 없는 내일은 없고, 오늘을 지켜야 내일이 온다. 내일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은 오늘을 지켜야 얻을 수 있다.

오늘을 지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시다. 오늘을 지키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님의 문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예수님의 문 안으로 들어와야 ‘오늘’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도둑은 예수님의 문 밖에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속삭인다. 그리고 예수님 문 밖에 서서 오늘을 빼앗기고, 막연하게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도둑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속으면서 산다.

‘오늘’없는 내일은 없다. 오늘 지켜야 영생을 얻고,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지킬 때 주어지는 내일의 생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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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릴 꿈, 되찾아야 할 꿈

잃어버릴 꿈, 되찾아야 할 꿈
요한복음9장 35절~41절

요한복음9장35절~36절, “35절: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어제(9월8일) 작은 아버지 댁에 찾아갔다. 작은 어머님께서 맛있는 추석 아침상을 차려 주셨다. 작은 어머님은 힘들게 사시는데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작은 어머님의 아들이자 나의 사촌 동생이 의젓하게 잘 자랐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은 외고 출신으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과외라는 것을 할 수 없었고, 부모님들이 넉넉하지 못해서 충분하게 사촌동생을 돕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가졌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심이 깊다. 사촌동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승진도 싫고 가늘고 길게 회사에 오래 남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꿈, 보이지 않는 꿈, 이루기 쉬운 꿈, 이루기 어려운 꿈, 꿈의 종류가 다양하다. 오늘 말씀에서 나온 소경이 꿈이 있었다면 보이지 않던 눈이 보이는 것이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꿈을 이루고 나니, 더 이상의 다른 꿈은 생각할 수 없었다. 꿈을 잃어버린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꿈을 되찾으라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꿈을 찾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이 된다. 예수께서 소경을 만나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꿈을 잃어버린 소경에게 “인자를 믿느냐”하고 예수님이 물으셨더니, 소경은 “인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인자는 바로 나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소경은 “내가 당신을 믿고자 합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 이렇게 꿈을 잃어버린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자 꿈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믿음이 없는 꿈은 모래 위에 세워진 성이다. 믿음 없는 꿈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바리새인들도 믿음 위에 그들의 꿈을 세웠다. 그러나 잃어버릴 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꿈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워진 꿈이었다. 믿음으로 세워진 꿈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일이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달려가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버릴 꿈과 되찾아야 할 꿈을 혼동하고 있다.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한국이 잃어버릴 꿈과 되찾아야 할 꿈을 모르고 있다. 잃어버려야 할 꿈은 잃어버려도 된다. 그러나 되찾아야 할 꿈은 찾아야 한다. 믿음을 찾아야 꿈을 되찾을 수 있다. 잃어버릴 꿈을 잊고, 되찾아야 할 꿈을 되찾으면 젊은이들은 생기가 돌고, 열정이 생기고,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질 것이다.

잃어버릴 꿈은 무엇이고 되찾아야 할 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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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토끼

호랑이와 토끼
요한복음9장13절~34절

요한복음9장16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오늘(9월8일)은 한국의 명절 추석이다. 예전에 추석의 여인들은 음식을 하랴, 마켓에서 장을 보랴, 손님을 맞이하랴 바쁜 날이다. 그러나 요즘 추석은 자녀들만이 학원 다니라 바쁘다. 한국인들이 추석을 최대의 명절 중에 하나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곡식을 풍성하게 맺게 하신 ‘그 누구에게’ 감사하고, 같이 농사 지었던 사람들과 서로 기쁨을 나누려고 하였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사실인지, 만약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사실이라면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었던 다툼 아닌 다툼이다. 다툼 아닌 다툼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눈을 뜬 사실을 알았고, 또한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뿐이라는 것을 율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9:31, 33).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9:16).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이고,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율법이 그들을 살리지 못하고 죽였다. 그들이 율법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라고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되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율법은 바리새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거부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없을까? 누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일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또한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뜻은 죄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지위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마귀를 멸한다는 뜻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 전쟁에 승리하면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뜻은 이 땅에서 영적 승리가 하늘 나라의 영적 승리로 이어지면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영육간으로 회복 것을 의미 한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인 왕을 몰아내고 토끼인 ‘내’가 왕이 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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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본 이정표

거꾸로 본 이정표
요한복음 9장 1절~12절

요한복음9장 2절~3절,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보모니이까,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제(9월5일) 한 형제를 만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마귀에 들렸다, 탕자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괴롭다고 말했다. 그 형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자신이 죽기까지 희생하였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은 지키려 하면 잃게 되고, 버리면 얻게 된다. 목숨을 얻으려 하면 죽게 되고, 목숨을 버리면 살게 된다. 노력하면 물질은 얻을 수 있지만,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옛 어른들은 사람의 마음을 갈대라고 말하기도 하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맑은 물은 보면 알지만 까만 사람의 마음은 보아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사람 관계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죄에 대한 돌이킴(회개)은 내 마음을 깨끗하게 보게 한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유대의 소경이나 절름발이 등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죄로 인한 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습관이나 전통을 완전히 뒤집고 계셨다.

예수님은 죄의 손가락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로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죄는 인간을 죽게 하고, 인간을 병들게 하였다. 죄는 기쁨보다 슬픔을 화평보다 다툼을 가져온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기쁨이나 화평은 없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뱀의 말을 따른 결과였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가 죄이다. 죄는 알면서 따라야 할 것을 따르지 않고, 알면서 의도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마음의 결과이다.

죄는 마음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죄는 다른 사람의 죄는 깨끗하게 보이게 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흐리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흐린 눈을 씻고, 지금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죄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요9:3).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도 ‘나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죽어가고, 나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산다. 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어제 만난 형제는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할 ‘소경’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부르는 사인이고, 하나님께서 그 형제와 직접 만나고 싶다는 하나님 사랑의 사인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정표를 거꾸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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