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과 세상

거미줄과 세상
요한복음 8장 31절~51절

요한복음8장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월요일(9월1일) 사천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갔었다. 예전에 아버님 산소까지 길이 있었는데 길이 없어지고, 대신 집이 들어섰다. 그래서 집을 돌아 험한 산길을 거쳐 아버님 산소에 갈 수 가 있었다. 여동생은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포도주를 무덤 위에 뿌리고, 산소 앞에서 바다를 보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아버님 같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산소 앞에서 여러 생각이 스치는지 말이 없었다.

무덤 앞에 묘비가 있었는데 묘비 위 앞 뒤로 두 마리 거미가 자리 잡았다. 나는 손으로 잡지 못하고, 구두를 벗고, 구두로 거미를 내리쳤다. 그리고 여동생이 무덤 앞에 놓아 둘 꽃을 쌓았던 비닐로 거미와 거미줄을 닦아 냈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거미와 거미줄이 스쳐 지나간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서 곤충을 거미줄로 유혹하여 걸려든 곤충을 먹고 산다. 거미는 거미줄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려드는 곤충이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거미가 바라보는 거미줄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과 비슷하다.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 뿐인 세상이고, 하나 뿐인 인생이라고 믿으면서 산다. 사람들은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혀 산다.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히면, 거미줄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몸을 흔들어 나가려면 나갈수록 세상의 거미줄은 점점 몸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거미줄에 붙잡힌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의 거미줄에 잡힌 사람들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거미줄 속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몸이 엉기게 되고, 점점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 지쳐 거미줄 속에서 죽게 된다. 세상의 거미줄은 거미줄에 잡힌 사람들이 계속해서 몸부림치도록 격려한다; “너는 경쟁에서 이겨야 해, 경쟁에서 이겨야 세상의 거미줄에서 살아날 수 있어.” 그러나 세상의 거미줄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점점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포기하게 하여 죽게 하는 마력이 있다. 세상의 거미줄에 걸린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와 논리 속에서 점점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들은 거미줄 속에서 굶어 죽게 된다.

유대인 역시 세상의 거미줄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거미줄에 붙잡힌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살 길을 보여 주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거미줄에 걸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듣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였다. 유대인은 예수님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대인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였다. “네가 아브라함보다 크냐? 네가 아직 오십이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하고, 유대인은 예수님께 말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하였다. 유대인을 둘러 쌓고 있는 세상의 거미줄이 유대인의 눈과 귀를 닫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거미는 거미줄만 보인다. 거미줄 밖에 세상은 모른다. 거미는 거미줄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거미는 거미줄 밖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거미는 거미줄에 갇힐 곤충만 기다리고 있다.

세상의 거미줄도 거미줄에 잡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거미줄에 붙들리면 스스로 끊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세상의 거미줄에 갇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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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 다른 삶

같은 길, 다른 삶
요한복음 8장 20절~30절

요한복음 8장 20절,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길’을 그리게 하는 미술 치료가 있다. 사람마다 길을 그리라고 하면 서로 다른 길을 그린다. 그들이 그린 길은 그들의 내면을 표현한다. 오솔길, 언덕길, 큰 길, 작은 길, 교차로가 있는 길, 교차로가 없는 길, 나무가 있는 길, 꽃이 많은 길 등 여러 모양의 길을 그린다. 각기 그린 ‘길’을 내담자에게 설명하게 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내면의 세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 “내가 간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가면 너희들이 나를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대비가 되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에 오신 이유가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고(요3:17)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다른 말씀을 하신다; “너희들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다.”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진리인가?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인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너희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도 예수님을 믿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시험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고난을 주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각자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하나님이 참 모습일까?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나타나신다. 무서운 하나님이면 무서운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난의 하나님은 고난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요즘은 ‘사랑의 하나님’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바르게 인도하는 사랑이 있다. 사랑에는 ‘당근과 채찍’이 있다. 즉 사랑은 무조건적인 헌신과 바르게 인도하는 징계가 포함이 되어 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계3:19).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자신의 하나님’은 무조건 자신을 용서해야 되지만, 다른 사람은 무조건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는 마음의 경향성이 있다. 이러한 마음의 경향성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의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에 들보를 보라(마7:4)고 말씀하신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의 경향성은 나의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불하는 대가는 ‘나의 기쁨’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값을 지불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지 ‘내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 보면 된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나의 기쁨’을 쫓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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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잡초

꽃과 잡초
요한복음8장 12절~20절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2011년 MBC 창사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5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사회상을 그려내려고 했지만, 그 드라마는 밝은 부분보다는 어두운 부분을 더 많이 그려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빛이 비추면 그림자가 지게 된다. 사물 스스로가 빛이 되어야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그림자는 사물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이다.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게 되면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자라고 있던 부분들이 보인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자라고 있던 잡초들은 다른 반응을 한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잡초들은 세 가지 반응을 한다. 빛을 피하거나, 빛을 저항하거나, 빛 속에 사라진다. 첫째, 바리새인들, 서기관, 제사장들은 빛이 비추자 빛을 향하여 강하게 저항하였다. 빛이 세상에 비추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빛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다. 빛을 향하여 어둠이라고 말하고, 빛이 세상에 비추지 못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군중들은 빛이 비추자 빛을 피하려고 하였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제사장,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빛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군중들은 어둠 속에 자란 잡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빛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빛을 지켜 보았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빛이 비추자 모든 것을 버리고 빛을 따랐다. 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빛과 함께 하였다. 빛이 제자들에게 비추자, 제자들이 모르던 잡초들의 속성이 들어났다. 빛이 세상의 왕이 되시면 왕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가 싸웠다, 한 제자는 잡초의 욕심이 더 커져서 빛을 세상에 넘겼다. 다른 한 제자는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자 잡초의 두려움이 커져서 빛을 부인하게 되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빛이 사라지자 잡초가 익숙한 세상 속으로 몸을 숨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사라진다. 어둠이 사라지면 어둠 속에 자라던 잡초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이 자라기 시작한다. 잡초가 죽고, 꽃이 자라려면 빛 속에 있는지 어둠 속에 있는지 스스로 진단하여야 한다.

빛과 어둠의 속성을 살피면 잡초인지 꽃인지 알 수 있다. 빛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빛은 육체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빛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빛은 참되다. 빛은 혼자 계시지 않고 보내신 분과 함께 하신다. 그러나 어둠은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둠은 육체에 따라 판단한다. 모든 사람을 어둠의 잣대로 판단한다. 어둠은 빛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늘 혼자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신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빛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다니게 된다. 빛을 따르는지 어둠을 따르는지는 “내게 빛의 속성이 있는지 어둠의 속성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면 안다. 그러면 내가 잡초인지 아름다운 꽃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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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성경, 살리는 성경

죽이는 성경, 살리는 성경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요한복음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부자가 되었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들의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하나 뿐인 자녀는 자기만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5세정도의 아이를 둔 부모가 이혼하는 비율이 예전보다 더 높아져서 지금 5세의 아이의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고 있다. 노인들은 자녀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삶의 초점을 즐기고 먹는 것에 두고 있다. 예전의 가정은 서로 헌신하는 가정이었는데 지금의 가정은 서로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유대의 율법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있었다. 특히 율법을 지켜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면 로마법을 어긴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면 유대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판결을 하던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법에 따라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다. 아마도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였던 사람들의 죄를 땅에다 쓰셨을 것이다. 그러자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였던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마지막에는 간음한 여인 한 사람만 예수님 옆에 남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너를 고발한 사람들이 있느냐?”하고 물으니, 간음한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무기가 되지만, 요리사가 칼을 사용하면 맛있는 음식이 된다. 도구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성경은 살리는 말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는 말씀이 된다. 성경을 자기에게 적용하면 살리는 성경이 되지만, 성경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죽이는 성경이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어떤 성경일까? 죽이는 성경일까 아니면 살리는 성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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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생명수

넘치는 생명수
요한복음 7장 37절~44절

요한복음7장 37절~38절,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의 성 추행 사건으로 한국 검사들의 단면을 알 수 있었다.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창 전 검사장은 기자회견을 열면서 자기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맡은 검사까지도 그가 한 거짓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성 추행 모습이 CCTV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몇 차례 바바리맨으로 여자 고등학교 앞에서 신체의 일부를 들어냈다는 것도 밝혀졌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자 김수창 전검사장은 자신이 성도착 증세가 있고 정신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수치심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착각하면서 살고,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는 가면을 쓰고 산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죄 된 모습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은 죽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예수님이 비춰주는 거울이 우리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을 덮어준다. 두려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예수님이 주신 생명수를 마시면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덮히고, 기쁨과 평강과 죄에 대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에게 다가 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대신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들의 두려움과 외로움, 수치심이 덮는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생명수가 넘치리라.”

배에 생명수가 넘치는 사람은 수치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자존감이 세워지게 된다. 생명수가 넘치는 사람은 병든 자존감을 치유되고, 병든 정서와 감정이 회복되어,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믿는 사람은 “나는 믿는데 그러한 회복과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이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하는 믿음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현실넘어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할 때에도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하고 예수님이 생명되심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현실을 바라볼 때 그들에게 생명수는 흐르지 않았다.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생명수가 넘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과 철학을 믿는 믿음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가 생명수가 넘치지 못하게 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는 세상의 말과 철학을 믿는다. 인간의 철학과 이성이 가득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흐르지 못한다. 성경은 생명수가 “배”에 흐른다고 말씀하신다. 배에 생명수가 넘치게 하려면 배에 있는 세상의 생각과 철학과 이성을 배에서 흘려보내고, 말씀으로 배를 비워야 한다. 배에 있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이성을 배에서 흘려보내고, 말씀으로 배를 비울 때 생명수가 넘쳐 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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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지식, 열린 지식

닫힌 지식 열린 지식
요한복음 7장 25절~36절

요한복음 7장 33절~34절, “3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절: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하리라 하시니.”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14일에 한국을 방한하였다가 오늘(18일) 로마로 떠난다. 교황의 방한 기간 중에 광화문 일대 교통이 종종 통제 되었다. 교황은 가난한 자를 살피는 자신의 이미지에 맞추어서 검소하게 작은 차(기아 Soul)를 타고,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고, 대대적인 환영행사 보다는 간소하게 의전행사를 치루었다.

낮은 사람과 같이하고자 하는 교황은 정의를 강조하였다. 교황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말하였다. 정의란 과거의 불의를 잊지 않지만 용서하는 관용, 협력을 통하여 불의를 극복하는 힘,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를 토대로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워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태도, 현재의 장애를 극복하는 힘, 가난한 사람과 함께 비전을 이루려는 의지가 정의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은 과거의 불의를 용서하고, 현재의 장애를 넘어서, 행복한 미래를 이루어야 하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메세지로 들렸다. 희망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메세지었다. 그러나 교황의 메세지는 일방적인 메세지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메세지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들었던 메세지를 전달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쌍방으로 메세지를 전달하신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 “나는 너희들과 조금 더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너희들이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또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들은 오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전달하는 말씀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앞으로 할 말을 동시에 전달하셨다.

예수님의 말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말은 닫힌 말이고, 쌍방으로 교환되는 말은 열린 말이다. 쌍방으로 전달되는 말을 열린 대화라고 말하고, 일방으로 전달되는 말을 닫힌 대화라고 말한다.

지식에도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열린 지식과 닫힌 지식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닫힌 지식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인 것 같지만 사람의 지식이었다. 사람의 지식은 닫힌 지식이다. 닫힌 지식은 한 번 받아들이면 그 지식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의 태도를 고정시키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지식 같지만 사람의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열린 지식이다. 열린 지식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더 적합하고, 더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지식이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열린 지식은 사람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성장하게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닫힌 지식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들지만, 열린 지식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 놓는다. 닫힌 지식은 사람의 의를 나타내지만, 열린 지식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나는 어떤 지식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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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 다른 열매

같은 일 다른 열매
요한복음 7장 10절~24절

요한복음 7장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일본 아베 수상은 처음부터 강경책을 주장한 정치인이다. 아베 수상은 이로 인하여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본이 어려운 처지에 이르자 다시 인기를 얻어 일본 수상이 되었다. 특히 아베 수상의 역사 왜곡으로 인하여 한일관계가 나빠지고 있다. 일본 중심의 문화를 형성하려면 과거의 일본이 최고였다라는 신념을 역사 속에서 증거해야 한다. 일본이 역사 왜곡은 이러한 아베 수상의 신념에 동조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숨은 이유는 일본이 겪는 현재의 위기 때문이다. 일본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점점 살 수 없는 나라로 되고 있다. 일본은 영토를 확장시키지 않으면 일본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군대를 일으키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강경책’이다.

과거에도 일본은 살기 위하여 한국에게 ‘강경책’을 취하였다.일본은 조선(한국)과 전쟁을 하였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일본 내의 분쟁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과 전쟁을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일본에서 줄어드는 생필품을 늘이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의 양을 제한하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교역의 양을 제한한다는 말은 일본에서 지도층이 필요한 물건이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한 이유는 일본의 지도층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일본이 취하였던 ‘강경책’은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 한 가지 일만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행하였던 한 가지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유대인을 살리는 일이었다. 유대인을 살리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셨다. 그러나 유대인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을 하신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으로 심판하려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에게 “안식일에 사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들은 ‘할례’를 하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나의 일에 대하여 왜 화를 내느냐?”하고 말씀하셨다(요7:23). 그리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요7:24). 예수님이나 유대인이 한 가지 일을 하였는데 예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유대인의 일은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행하는 많은 일이 있지만 일의 종류는 두 가지이지만 행하는 일은 한 가지 일이다. ‘나를 위한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일’이냐 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일 같지만 나를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일이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일 같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내가 잘사는 일 같지만 그 또한 하나님을 위한 일이 있다. ‘하나님 일’이냐 ‘나를 위한 일’이냐는 밖으로 보여진 일로 구분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로 구분된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면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일’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나’를 항하고 있으면 어떠한 일을 하여도 ‘나를 위한 일’이 된다. 그러나 같은 일 같이 보여도 일의 열매는 다르다. ‘하나님을 위한 한 가지 일’이 나의 영혼을 살찌우고 또한 나의 육신도 평안하게 한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일’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되어 끝없이 나를 괴롭게 하고, 결국은 나를 죽인다.

여러분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를 위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겉으로는 다 ‘같은 일’ 같이 보이지만, 삶의 열매(결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열매를 맺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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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로 가면

예수께로 가면

어머님 친구 분 외손녀가 4년 동안 백혈병을 앓다가 8월 4일에 하늘 나라로 갔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백혈병이 거의 완치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건강했는데
올해 들어서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주치의는 부모에게 강한 치료를 할 것인지 서서히 치료를 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고,
부모는 서서히 치료하기를 원했다.
소녀는 서서히 치료되지 않고 갑자기 천국으로 갔다.
11세부터 백혈병을 앓고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지만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딸을 잃은 슬픔, 손녀를 잃은 슬픔이 잔잔하게 몰려왔다.
소녀는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담당 의사에게 빨리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의사는 소녀에게 주는 약을 끊었더니,
소녀는 자기가 소원하던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소녀의 장례식은 참여한 사람에게는 많은 은혜를 주었다.
가족 모두가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어서 간증이었다.
이모부부는 천안에 있는 대학교 교수인데 방학 중이었고
사촌오빠는 군대에 가 있는데 5일 간의 휴가기간 중 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선교 가기 전에 조카와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부모에게는 나 같이 아파서 천국에 오지 말라고
나 같이 아프다 천국에 오면 부모를 힘들게 맞이해야 하니
건강하게 살다가 천국에 오라는 말을 남겼다.
소녀의 밝은 얼굴에 가족 모두 감동을 받았다.

소녀가 자신의 장례식 곡으로 “예수께로 가면”을 선택하였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장례식 곡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가사였지만
소녀가 가는 길에 맞는 곡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예수께로 가면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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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

인생역전
요한복음 7장 1절 ~9절

요한복음 7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상처 중에 하나는 거절감이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를 당하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래 남는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험난하게 만든다.

‘내적 치유’로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여 마음의 고통도 사라지게 하고 인생도 바꾸고자 한다. ‘내적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 상처를 들어내어야 한다.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숨긴다면 상처는 치유 할 수 없고, 상처는 더 악화된다. 말씀 앞에 마음을 열면 말씀이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치유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여기서 유대인은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을 말함)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러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은 치유하지 못하고 갈릴리인들만 치유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갈릴리인은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았는데 치유 받은 이유는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환영’과 거절이다. 환영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고 상처가 더 커졌다. 커진 상처는 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이 ‘양반’이라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은 ‘상놈’이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자 치유 받은 갈릴리 사람과 치유 받지 못한 유대인의 위치가 바뀌었다. 영적으로 갈릴리 사람이 ‘양반’이 되고, 유대인들이 ‘상놈’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상놈’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 앞에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환영을 환영하지 않고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 앞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가 들어나자 예수님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미워하였다.

상처가 예수님 앞에 들어나면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된다. 한 반응은 상처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조용히 나가 상처를 치유 받으려는 마음이고 다른 반응은 상처를 건드리니 아픈 상처가 더 곪아 미쳐 날뛰는 반응이다.

말씀이 들어가면 두 가지 반응을 한다. 한 반응은 “내 죄를 어찌할꼬”하고 통곡하고 회개하는 반응과 또 다른 반응은 “내가 죄인이 아닌데 나를 죄인이라고 해”하고 말씀 앞에 강하게 상처를 부인하는 반응이다. 말씀 앞에 반응에 따라 사람의 지위(status)를 바꾸어 놓는다. 한마디로 말씀 앞에 인생역전이 있다.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한 갈릴리인들과 예수님 앞에 교만해져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의 지위가 바뀌어졌다.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던 갈릴리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약속의 자녀였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멀어졌다.

말씀 앞에 인생역전이 있다.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들어낼 때 죄의 수치감은 사라지고, 나약함은 나의 강함이 된다. 말씀 앞에 치유를 받으면 인생역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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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퍼즐

말씀의 퍼즐
요한복음 6장 52절~65절

요한복음6장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만 잘하면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도 잘 해결 할 수 있다는 한국의 속담이다. 말하는 기술에 따라서 험한 산길을 가기도 하고 평탄한 길을 가기도 한다.

유대인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살아 있는 떡이고 이 떡을 먹어야 산다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다;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사람이 자기의 살을 주어 사람에게 먹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역사나 경험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말씀은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영으로 먹는 사람이 산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세계에 몸을 담그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영으로 나의 피와 살을 먹으라”하고 말씀하셨으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보다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시고, 또 예수님은 기술적으로 말씀하셔서 말이 마음에 와 닿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말이 잘 전달되고, 말의 기술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말이 잘 전달되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이해하는 인식, 지식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나의 피와 살을 먹으라’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고, 떠난 제자들은 그 이후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6:66).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예수님을 떠나게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들으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셨다.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을 하셔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성경을 읽으면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들이 있다. 말씀이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하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생명을 주는 말씀은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의 이치에 맞는 말은 생명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말은 죽음의 말이지 생명의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생명의 말씀을 이치에 닿는 말씀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의 말씀을 퍼즐과 같이 맞추어야 한다. 생명의 말씀 퍼즐 한 조각 한 조각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한 조각 한 조각이 전체 그림에 맞는 위치에 놓여질 때 하나님이 그리신 전체 그림의 퍼즐을 바라 보게 되어 이치에 맞는 말씀이 된다. 오늘 전체 그림에 놓아야 할 한 조각 말씀의 퍼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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