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입가경

점입가경
요한복음 2장 1절~11절

요한복음2장 10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든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점입가경(漸入街境)은 중국의 고개지의 화가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그는 사탕수수를 먹을 때 꼭 맛이 없는 끝부터 씹어 먹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갈수록 점점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에서 유래한 점입가경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첫 번째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께서 없었더라면 설상가상이 될 뻔하였다. 설상가상은 눈 위에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2장 1절은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이 된다. 혼인 잔치가 사흘 동안 계속 되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 혼인 잔치가 되던 부활의 시간을 의미하던 기쁜 날이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속에 포도주가 빠지면 결혼의 흥이 깨지게 된다. 기쁜 날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흥이 떨어지게 되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 예수님께 “저들이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여인이여’ 이 말을 가지고 예수님은 어머니도 모르는 불효자식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인은 ‘여인’의 높인 말로 쓰였다.

예수님이 계셔도 혼인잔치가 엉망이 될 뻔 하였다. 예수님이 계셔서 떨어진 포도주를 채우는 일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 혼인 잔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설상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상가상이 될 뻔한 가나의 혼인잔치가 어떻게 점입가경이 되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의 믿음과 하인들의 순종의 조화가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또한 하인들은 예수님의 어머님의 말에 따라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시킨 그대로 행하였다. 그랬더니 가나의 혼인잔치에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기적을 보려면 넘어야 하는 산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가졌던 믿음과 하인들이 행하였던 순종이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순종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떻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도 순종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계시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도가 거절되어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의 길은 설상가상의 길이 아니라 점입가경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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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정점

화룡정점
요한복음 1장 43절~51절

요한복음1장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다나엘은 마음에 거짓이 없고, 성경에 능통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아직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화룡정점이란 장승요가 벽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즉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완성시키다라는 뜻이다. 나다나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는데 어떻게 중요한 부분을 채웠는가? 빌립의 전도가 나다나엘의 부족함을 채웠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어도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요1:45)”라고 소개했다. 성경은 메시아는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친구의 말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찾아 오셨다(요1:47).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말씀하시니,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묻기를 “언제부터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였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빌립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을까? 오실 메시아에 대한 묵상을 하였을 것이다.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을 꾸었을 것이다. 나다나엘에게는 꿈이 있었지만 꿈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꿈을 이룰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재주와 능력이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펼치는 사람들은 적다. 용에 눈을 그려야 한다. 용의 눈은 어떻게 그리는가? 예수님께서 눈을 그려주셔야 한다. 나다나엘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눈을 그려주셨다. 의심스러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을 때 화룡정점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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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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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5절~42절

요한복음1장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걸어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의 말에 제자들이 ‘토’를 달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과 제자들이 어떠한 관계로 맺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이 말을 할 때 제자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선생님이 제자에 대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영향력을 주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선생님이라면 그 영향력은 더 클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King James에는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하는 사이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이었다.

요즘 한국에는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회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다. 부모와 자녀, 형과 동생, 언니와 동생, 선생님과 제자 사이가 서로 소통하기에 너무 먼 사이가 되고 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상호간의 관계가 무너지고, 무너진 상호 관계는 사회를 암울하게 이끌어갈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소통’이다. 소통은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소통이 된다.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도 ‘세상에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의 소통을 이룰 수 있다. 사회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뜻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목사인 나도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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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소리

메아리 소리
요한복음1장 19절~24절

요한복음1장 23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산을 올라가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산 정상에 섰을 때의 기쁨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있다. 특히 산에서 “야호”하고 소리 질렀을 때는 지금까지 마음 속에 묻혔던 10년 묵은 때까지도 흘러내려 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야호’하는 메아리 치는 소리가 귀에 다시 들릴 때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흐르는 전율을 느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말씀을 믿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묻고 있다. “네가 엘리야냐?” “아니다.”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그리스도)냐?” “아니다.” 그러면 넌 누구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세례 요한은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 별명이 “소화제”였다. 그 친구는 자기를 “소화제”라고 부르면 싫어했다. 사람을 물건에 비유하거나 소리에 비유한다면 매우 싫어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넌 소리 없는 그림자야”하고 나에게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다. 회개하라고 외치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리를 질러야지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면 누가 회개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하고, 또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광야에서 회개를 소리치고 있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전략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전도 전략은 ‘도시 전도’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전도 전략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람의 시선을 피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넌 귀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우쭐하여 “그래 난 귀한 사람이야”라고 메아리 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례 요한에게 “당신은 귀한 사람이야”하고 말해도 세례 요한은 “아니야, 난 단지 광야에 소리에 불과해”라고 대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광야에 소리치는 사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다.

작은 일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는 작고 크고가 없다. 사람들의 눈에 작은 일과 큰 일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작은 일과 큰 일이 없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나님이 부르신 소리에 그대로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보자. 주님의 메아리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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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흐르는 물

거꾸로 흐르는 물
요한복음1장 15절~18절

요한복음1장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르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그 분은 나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세상의 이치는 나이 순으로 돌아가지만 하늘의 이치는 존재 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 순으로 흘러가야 세상은 제대로 흘러간다. 물이 흐르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한다. 낮은 곳에서 높을 곳으로 물은 올라가지 못한다. 높은 곳으로 물이 올라가려면 모터로 물을 강제로 올려야 한다. 강제로 물이 올라가더라도 물은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이 흐르는 이치가 세상의 질서이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이 보인다. 질서를 무시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한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은 내려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썩으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시대의 오늘 말씀은 물이 거꾸로 흐르는 말씀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성경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 늦게 태어나도 세례요한은 그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장이 시골의 한 농부를 존중하고 그 분이 메시야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바라보고 하늘의 이치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요한복음1장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사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King James 성경 은혜 위에 은혜를 “grace for grace”라고 말한다. 은혜를 위한 은혜, 진정한 은혜를 받은 자만이 세상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현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였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하늘의 이치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야 세상의 이치를 안다고 말한다.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은혜를 위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받는다는 ‘have received’라고 하고 있다. 은혜는 이미 받은 상태이다. 그 은혜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은혜를 이미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사람들의 은혜(favor)를 받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하는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며 그 사람이 원하는 일들을 해주며 비싼 선물까지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이시고, 나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은혜를 얻는다고 한다.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너무 어렵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거꾸로 흐르는 물에서 뛰어나와 제대로 흐르는 물로 들어가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창조자이며 거꾸로 흐르는 물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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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1장 1절~14절

요한복음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태초는 창조 전 즉 시간이 시작 되기 전의 태초를 말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목회를 할 때 어느 장로님이 내 설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내가 설교 중에 성경 말씀을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야기’나’ 말’로 말한다는 것이었다. 성경 중에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성경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0~40년 전에 한국에서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욕이라고 말하는 목사님도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이에 대하여 토를 다는 목사님은 거의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의 말씀이다. 말씀이 만약에 저주의 말이었다면 어떨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주한다는 신명기의 말씀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의 말씀은 잃어버렸던 에덴 동산에 대한 회복과 개인적 구원을 말하고 있다. 구원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 땅에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도 임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요한복음1장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나님께서 그 말씀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는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있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비추고 계시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추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빛이 비추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가게 되어 있다. 빛이 비추는데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 어둠 속에 거울이 있으면 빛을 비추어도 어둠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거울이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반사하면 빛이 비추어도 어둠은 어둠이다. 어둠이 빛은 흡수되어야 밝아진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사한다면 빛이 있어도 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안에 있는 거울은 무엇인가? 그 거울은 어둠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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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가르침

권위 있는 가르침
마가복음 1장 16절~28절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인 구성원에게 인정을 받고, 사회 구성원이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위는 스스로가 복종하는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강제로 복종하게 하는 영향력이 권위가 아니다.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권위는 사람의 인품을 존경해서 복종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높은 지식에 스스로 복종하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룬 사람을 존경하기도 한다.

22절에 예수님을 가르켜 권위 있는 자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서기관이나 제사장과는 다른 권위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가진 권위가 무엇이었을까?
교수는 지식을 쌓고 전달함으로써 권위가 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을 명장이라고 말한다. 그 분들은 빵을 맛있게 만드는 경험이 그들의 권위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교수가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나오는 권위와 빵을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빵을 만드는 명장의 권위가 합하여진 권위는 아닐까?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사랑을 섬김으로 보여 주었다. 바보 의사, 고 안수현(고려대 전문의, 육군 대위, 유행성 출혈염으로 사망)의사는 죽음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의 가진 권위는 가진 지식대로 실천하는 사랑의 권위라고 생각을 한다.

예수님이 가진 행동을 보인 사랑의 권위, 예수님이 가진 지식을 몸으로 실천하는 권위는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위가 있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권위는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는데 권위가 있다. 그 권위가 사람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 일 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나타내려고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서기관들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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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1장 9절~15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9절에 “그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 이르러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분은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잃었던 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 앞에 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의 사역을 하시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오히려 숨기면서 세상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든 세상의 질서에 스스로 복종하고 따르고 계시다.

정치가, 판사, 검사들은 자기가 만드는 법에 따르기보다는 법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때가 많이 있다. 목사도 말씀의 권위 아래 자신을 숙이기보다는 말씀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이 산산이 부서트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스스로 복종하고 계시다.

인간의 욕망이 산산이 부서져야 진정한 세례를 받을 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몸으로 보여 주셨다. 세례는 육신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성령께서 임하셨다.
그리고 11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욕망이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질서에 따르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내 자신을 향한 질문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매일 매일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하나 하나 벗어 던져 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버릴 때 내게 있던 짐들도 하나 하나 벗기어질 것이다. ‘주님 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내 안에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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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

세례요한
마가복음 1장 1절~8절

복음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복음의 시작을 말하고 마가복음 1장 2절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전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앞을 준비하는 사람을 보낸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기 700년 전에 말씀하신다.

왕의 왕, 왕의 전사라 보냄을 받았다면 멋있고, 훌륭하고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대단한 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례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보냈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말한다(요1:23).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을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 요한
그의 모습을 보면 어느 한 구석도 멋있고,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사람이 모이지 않는 곳…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세례 요한을 바라본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을 해야지,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치는 세례 요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세례 요한은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4절, 회개의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유가 이스라엘 사람들보고 회개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회개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용한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 한적한 곳, 그리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든 곳에서 회개가 이루어진다. 회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광야이다. 회개를 소리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은 혼자서 고분분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회개는 사람의 모인 곳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지 않는 광야에서 외칠 때 회개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오늘 날 목회자가 소리치는 회개의 장소은 어디인가?
광야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외치고 있는가?
광야를 모르면 진정한 회개의 소리를 칠 수 없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바라보고 나가는 자리가 광야이라고 생각을 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광야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광야에서 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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