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한다는 의미

선한 일을 한다는 의미
여호수아 2장 15절~24절

여호수아 2장 24절,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 라합은 믿음이 있었고, 믿음대로 순종하였다. 그녀의 순종은 목숨을 건 순종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정탐꾼을 숨겨준 사실이 발각이 된다면 그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었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약2:17). 믿음에 따른 행동이 없다면 믿음이 없다는 말씀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직 믿음’을 외치고 있다. 믿음과 행위를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믿음의 행위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믿음이 흔들릴 때 믿음의 행위를 행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우리가 받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일을 행하신 그 결과 우리는 선한 일(순종)을 행할 수 있다(엡2:8-10 참조).

라합에게 내민 손

라합에게 내민 손
여호수아 2장 1절~14절

여호수아 2장 10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라고 하였다.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는 사건 앞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수1:17-18)”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낸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정탐꾼을 보내기 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한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여리고성은 죄악이 넘쳐서 멸망해야 할 곳이었으나 그 곳에 복음을 전하여야 할 믿음의 여인 라합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보내셨다. 즉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낼 때 모세와 다른 점이 있었으니, 모세는 백성들의 말을 듣고 정탐꾼을 보냈으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탐꾼을 보낸 점이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다(엡 6:12). 우리의 싸움은 예수님이 승리하신 싸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리한 싸움을 우리가 경험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엡6:10 참조). 우리가 주 안에서 강건해 지려면 세상이나 사람들의 말을 듣고 움직이지 않고, 주님의 말을 듣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여리고성과 같은 죄악된 도성에 우리가 살고 있더라도 주님이 라합에 내밀었던 능력의 손을 우리도 경험하게 된다.

약속하신 말씀의 혜택

약속하신 말씀의 혜택
여호수아 1장 10절~18절

여호수아 1장 13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말씀, 즉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명령을 하였다, “너희가 이제 사흘안에 요단을 건너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차지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할 일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을 기억하는 일이었다(수1:13 참조).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기억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두려움을 떨쳐 버린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기에 너희는 어디에 있든지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담대히 말할 수도 있었다. 여호수아는 약속에 따라 르우벤 지파와 갓지파와 므나셋 반 지파의 여인들, 노인들, 아이들이 먼저 요단강 이쪽에 머물게 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그들의 형제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정복에 참여하여만 하였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함께 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요단강 이편을 차지하여 안전해진 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그들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였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함께 하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 너희들의 가족들도 너희와 같이 안식을 누린다(수1:15 참조)”고 담대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때로는 눈 앞에 보이는 어려움 때문에 갈팡질팡 할 때가 있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은 약해진다. 우리는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게 된다.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고, 우리에게 평강과 안식을 준다.

두려움을 넘기

두려움을 넘기
여호수아 1장 1절~9절

여호수아 1장 7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장군이었다. 지금까지 아말렉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앞장 서서 승리로 이끈 장군이었다. 그러한 장군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여호수아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수아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분열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여호수아의 두려움에 영향을 주었지만 여호수아가 두려워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아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라다녔는데 아버지 같은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는 두려워졌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고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3번이나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해져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해져서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기에 강하고 담대해 진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도 강하고 담대해져야 한다. 환경에 사람에 두려워하면 우리는 주님이 맡긴신 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 질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강하고 담대해진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진다. 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진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 옆에 누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말을 듣는지,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지를 살펴 보면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갈 수 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 하신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도 하신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에 장사를 지내는 일,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일, 부활 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일,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 하셨던 일이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요 3:16 참조) 세상에서 마귀를 멸하시는 계획(요일 3:8 참조)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다 행하시고 난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은 죄에 속한 인류에게 예수님의 DNA를 전해 주는 길을 여신 일이었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 박사가 사라진 공룡을 복제하였다. 고고학자가 사라진 공룡을 어떻게 복제 하였는가 물었더니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모기가 화석이 되었고, 화석이 된 모기에 있던 공룡의 피를 추출하여 공룡을 복제하였다. 공룡의 피 안에 DNA가 있고, 그 DNA는 공룡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와 같다”고 박사는 고고학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DNA를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다 이루신 일’은 우리가 예수님의 DNA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신 일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영적 DNA를 갖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일이다.

예수님의 메아리

예수님의 메아리
마태복음 27장 46절

마태복음 27장 46절, “제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혼자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겪으셨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는 아픔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랑하는 부모와 헤어지는 아픔, 사랑하는 자녀들과 헤어지는 아픔,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는 아픔이다. 헤어지는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은 부모와 자녀가 헤어지는 아픔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크면 클수록 헤어짐의 아픔은 더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아픔을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고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분리될 수 있는가? 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을 겪고 계셨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보이고 계시지만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난과 조롱의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비록 예수님께서 원수의 손에 넘겨졌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건지시리라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메아리이다.

오늘 예수님의 메아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경험하고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된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47절~48절을 보면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셨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하신 말씀, 즉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말을 가지고 마리아는 모든 믿는 형제 자매의 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을 맡길 때에 하시는 말씀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고, 베드로가 “네,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다. 다른 제자가 복음을 세우고 교회들을 세워나갈 때 마리아를 맡은 요한은 마리아만 돌보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메세지가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는 일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메세지이다. 즉 가정이 세워져야 교회는 세워진다는 예수님의 메세지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교회는 가정을 돌보고 사랑하는 데서 교회는 세워진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계시다.

거룩을 위한 노력

거룩을 위한 노력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너희 몸을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교인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거룩이라는 뜻은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소의 발굽이 둘로 나누어진 것처럼 교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거룩해진다.

교인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영적인 면만 추구한다면 거룩해질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늘 말씀에서 거룩의 부분에는 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교인들 중에는 육신의 부분을 무시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육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절제한다. 이러한 절제훈련으로 영적인 뛰어남을 보인 사람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종류의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육적인 면도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인은 영적인 은혜도 받아야 하지만 육신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은혜도 있어야 한다.

우리의 거룩은 육신과 영의 시소 속에 있다. 우리의 육신이 힘이 들고 아파서 육신의 쪽으로 시소가 내려가 있다면 내려간 부분이 우리 거룩의 수준이다. 반대로 영적전쟁으로 영이 지치고 힘들어 영쪽인 부분으로 시소가 내려가 있다면 내려간 부분이 우리 거룩의 수준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은 육과 영이 누르는 힘이 비슷하여 시소가 균형을 이룰 때이다. 우리는 거룩을 위하여 영적전쟁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육신에 대한 돌봄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육신에 대한 돌봄을 Self-care(자신을 돌보는 시간)라고 한다. 우리는 영적전쟁을 통하여 성장해가지만, 동시에 육신을 돌보는 행위가 있어야 거룩해질 수 있다. 즉 영과 육의 시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가 거룩해지고, 거룩한 산제사를 주님께 드리게 된다.

첫 사랑

첫 사랑
누가복음 14장 21절

누가복음 14장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예수님이 초청한 천국은 성대한 저녁에 초대 받은 부름이라고 말씀하신다. 주인이 큰 잔치에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와 가족에 대한 이유 때문에 초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주인은 종에게 거리에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큰 잔치에 초청하라고 명한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도 위와 비슷한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교회를 향한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가 잃었던 첫 사랑은 요한계시록 2장 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이 두 말씀은 같은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이 에베소 교회에 없었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를 하였지만 믿음이 없었고, 수고는 하였는데 사랑이 없었고, 인내를 하였지만 소망이 없었다. 아무리 헌신하고, 수고하고, 인내하여도 믿음, 사랑, 소망이 없는 헌신, 수고, 인내는 아무 열매가 없는 수고가 된다.

오늘 날 교회에 열매가 사라지는 이유도 형식적으로 굳은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을 부르짖고, 사람들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한다. 또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도 인내하며 신앙을 지킨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주님을 처음 만날 때 넘쳤던 첫 사랑의 회복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작은 지체인 우리가 ‘첫 사랑’을 회복한다면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가 회복하고, 교회의 회복이 되다면 회복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여전보다 큰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자기 중심성

자기 중심성
마태복음 6장 33절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을 구하라는 말인지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모습을 알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구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모습은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말한다. 첫 아담은 자기 중심성에 넘어졌고, 둘째 아담은 자기 중심성을 넘어섰다. 하와가 자기 중심성에 넘어저 선악과를 먹고 그녀의 남편에게 주었지만, 예수님은 40일 금식 후에 사탄에 이끌려 자기중심성에 대한 시험을 보았지만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이 경건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야1:27).”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습을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