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공감
창세기 38장 1절~30절

창세기 38장 25절,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요즘 한국에서 ‘공감’을 강조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머리로 가슴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공감은 세대와 세대사이를 잇은 다리이고, 끊어진 관계를 잇는 소통의 기술이기도 하다. 특히 상담가가 내담자의 아픔을 깊이 공감할 때 내담자의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유다의 이야기로 바뀐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유다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야곱의 집에서 요셉을 제외한 다른 형제 중에 성경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인물이 유다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를 초점 맞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자녀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약속의 자녀가 죄를 지은 후에 회개가 없다면, 아무리 약속의 자녀이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대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 넘기는 죄를 지었다. 르우벤은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지었다 (창35:22).

유다는 어떠한가? 성경은 유다와 그의 아들들이 악행을 기록하고 있다.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은 악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셨다. 엘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에 여호아께서 엘을 죽였다. 동생 오난은 형의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오난이 악하여 여호와께서 오난을 죽이셨다. 유다에게 남은 아들은 셀라 뿐이였다.

유다의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성경이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 유다가 두 아들이 죽음으로 아버지 야곱의 슬픔을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야곱이 요셉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떠났다. 물론 유다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다가 두 아들을 잃고 나서,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공감하고 야곱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또한 유다 자신도 아버지 야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다가 아버지가 행한 죄에 대하여 스스로 공감하게 되었다. 유다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다도 야곱과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다가 어떻게 야곱과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다는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야 하지만, 셀라가 죽을 것을 염려하여 유다는 의도적으로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다말은 형 엘의 자손을 이어야했다. 그래서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친정 가까이에 왔을 때,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유다와 동침을 하였다. 유다가 동침한 여인이 창녀가 아니라 다말인 사실을 알때,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 야곱과 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창38:26).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하여 주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공감은 가정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정에서 서로 공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을 시작하신다.

터널과 동굴

터널과 동굴
창세기 37장 25절~36절

창세기 37장 35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는 마음이 허전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떠날 때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차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잃을 때 슬퍼한다. 부모가 자녀를 영원히 떠날 때 자녀가 흘리는 눈물은 ‘그리움’을 슬픔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곁을 영원히 떠날 때 부모가 흘리는 눈물은 자녀의 죽음을 부모가 대신하지 못한 ‘절망’을 눈물로 표현한다. 같은 눈물이더라도 다른 감정을 표현한다.

오늘 말씀은 야곱이 요셉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고 말한다. 야곱이 요셉을 잃었을 때의 슬픔은 어떠했을까?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견디기 힘든 아픔이 전해져 온다. 더 이상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야곱이 듣고 야곱도 스올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땅 끝이라도 요셉과 함께 하겠다는 아버지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푸시킨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고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며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느니”라고 삶을 표현했다. 현재의 삶에서 슬프고 견뎌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으면 푸시킨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성경도 야곱과 요셉의 삶이 앞으로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형제들에게 팔린 동생의 분노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두 가지 다른 감정을 대비하여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요셉과 야곱의 삶이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그들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현재 슬픔과 분노를 가진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준다. 슬픔과 분노는 우리를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현재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면 우리의 미래는 터널 밖으로 나온다.

복과 화

복과 화
창세기 37장 12절~24절

창세기 37장 18절~19절, “18절: 요셉이 그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절: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살다가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치기도 한다. 불행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불행이 아니라 불행을 다루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불행을 잘 다루면 ‘전화위복’이 된다 .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뜻은 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을 다루지 못하면 불행은 불행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불행이 커져서 더 큰 불행으로 변하게 된다.

요셉의 형들이 세검으로 양을 치러 갔다. 요셉의 형들이 세검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야곱에 대한 반항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세검으로 갔다. 세검에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추억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면 야곱이 요셉의 형들을 걱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간 곳이 세검이기 때문이다. 세검은 야곱의 아들들, 즉 시므온과 레위가 세검 추장의 아들이 동생 디나를 강간하여, 강간에 대한 복수로 세검 사람들을 죽인 곳이 세검이다. 세검사람들이 요셉의 형들에게 복수는 하지 않을까 야곱은 걱정하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불행을 잘 다루지 못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을 인정하지 않고, 불행을 피하여 세검으로 갔다. 그러나 불행을 피하여 갔던 그들의 길에는 더 큰 불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단에서 양을 치던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요셉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을 때 그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마음을 합하였다. 그러나 맏형 르우벤이 요셉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여, 그들은 요셉을 죽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 속에 넣기로 하였다. 그들은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요셉을 구덩이에 넣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근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넣은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이 아니라 더 큰 불행이었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불행을 만날 때 불행을 피하거나 거부하면 더 큰 불행이 우리를 찾아 올 수 있다. 불행을 다루지 못하면 화가 된다. 그러나 불행을 잘 다루면 복이 된다. 불행을 다루는 법은 불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행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불행을 다룰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의 불행이 화가 아니라 복이 된다.

꿈을 꾸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창세기 37장 1절~11절

창세기 37장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사람들은 자면서 3-4번의 꿈을 꾸게 된다. 꿈을 꾸었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꿈을 꾸는 이유가 REM(rapid eye movement)수면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REM수면 상태에 들어가면 근육은 깊은 잠에 빠지지만 뇌와 다른 신체기관들은 활동적이 된다. 이를 역설적 수면이라고 한다. 또한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반영하는 도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허기질 때 밥을 먹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현실에서 어렵고 힘든 상황을 탈출하기 위하여 부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현재 희망이 없은 사람들은 미래에 소망이 가득한 꿈을 꾸기도 한다.

성경에서 꿈꾸는 자로 알려져있는 인물은 요셉이다. 요셉이란 이름의 뜻은 “그는 더할 것임”이라는 뜻이다. 요셉은 그의 이름대로 다른 형제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다. 요셉은 다른 형제보다 더 좋은 옷을 입었다. 요셉은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은 꿈을 꾸었다.

요셉의 꿈을 성경에서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요셉의 꿈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다. 왜냐하면 요셉이 꾼 꿈을 해석하면 부모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이였기 때문이었다. 요셉이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을까? 물론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 답이 뻔한 해석은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뻔한 해석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해석이기 때문에 사람의 시각에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요셉의 입장에서 요셉이 꿈을 꾼 이유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이 그러한 꿈을 꾼 이유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많은 시기와 미움때문이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 받았던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다. 고통 속에 있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셔서, 현실을 이기고, 미래를 설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얻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로 힘든 상황에 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라는 믿음 아닌 그들의 꿈이 각박한 현실 생활에서 쉴 수 있는 작은 나무 그늘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또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요셉이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이유는 요셉을 향한 미래의 사명때문이었다. 요셉이 꿈을 꾸게 않았다면,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는 커녕, 현재 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에 깔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꿈을 꾸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고 꾸는 꿈은 아닐까? 우리가 꾸는 꿈으로 현실을 이기고,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가 꿈을 꾸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꿈을 꾸지 않는다면 각박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웃을 수있는 힘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꿈을 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미래의 사명을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이아나 루먼스-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으로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일은 덜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을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호기심

호기심
창세기 36장 9절~43절

창세기 36장 9절~10절, “9절: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절: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예전에 아이들에게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불의 뜨거움을 아이가 깨닫게 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불을 아이 옆에 보이지 않게 한다.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여도 어떤 아이는 불에 가까이 가고 싶어한다. 불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닌 에서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에서의 자손들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다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죄에 대한 생각이 둘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죄를 용서하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다른 확신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나’라면 용서 할 수 있는 죄가 있기도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서의 규칙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응하면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부르심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보이신 사랑이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죄 아래 있는 에서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고의 메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기 위함이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들이 왕을 세웠다는 기록은 역대상에도 기록하고 있다. 에서의 자손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세우려고 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창세기가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적용해야 될 말씀은 무엇일까? 성경은 사랑과 심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쳐준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려면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어야 한다. 죄에 대한 호기심은 죄를 따라 간 사람들의 결과를 바라보고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게 된다. 죄를 따라간 사람들의 결과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룰 수 없게 된다.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
창세기 36장 1절~8절

창세기 36장 7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었다. 도덕성 발달 이론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이론 중에 하나이다. 5세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그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했고, 7세 부터는 Boarding School(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생활하였고, 공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 기대로 인하여 성공한 그는 사람들의 기대로 인하여 자살하게 되었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그가 최고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살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고(물론 그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도덕성 이론을 발표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만든 이론의 함정에 빠져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는 요인이 ‘절망’이다. 다른 사람과 단절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많은 소유’이다. 소유가 많으면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없다. “두 사람이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창36:7).” 에서와 야곱이 함께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진 것이 풍성해지니,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재산때문에 에서와 야곱이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산이 아니라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았다. 야곱이 에서의 생활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갈라 놓으셨다.

영적인 관점이 다른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야곱은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에서는 이 땅에서 이 땅만 바라보고 산다. 바라보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에서와 야곱은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험난하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평탄하고 쉬워 보이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두 길을 구분하여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평탄하고 쉬운 길이 하나님 약속이 있는 길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속의 길에는 가시와 큰 돌들이 있어서 하나님 약속이 없는 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약속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약속의 길을 걸을 때 그 길이 약속의 길이라는 증거는 우리가 받은 아픔과 상처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된다.

그 분의 걸작품

그 분의 걸작품
창세기 35장 16절~29절

창세기 35장 18절~19절, “18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9절: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이름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명소에 가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가정이 어떻게 불려지느냐에 따라 가정도 달라진다. 어떤 가정이 되느냐는 그 가정의 가훈을 보면 한다. 아버지가 만든 가족의 가훈 중는 ‘백인(百忍)’이라는 말이 있다. ‘백인’은 백 번 참으라는 말이다. 가훈에 백인이 있으니 자녀들은 참는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성격대로 사셨는데 자녀들에게는 ‘백인’하라고 하니,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게 되었는가? 자녀들이 자기의 성격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으니 자녀들의 삶은 ‘백인’해야 한다. 그래서 가훈을 백인(百忍)빼고, 백자로 시작되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생각이 났다. 백전불태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백번 싸워도위태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백전불태’로 가훈을 바꾸면 가정에 싸울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그녀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라헬은 죽으면서 낳은 아이의 이름은 베냐민이 아니라 베노니였다. 베노니는 라헬이 죽으면서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지어준 이름을 바꾸어서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베노니의 뜻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베노니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면서, 베냐민의 인생이 달라졌다. 베냐민의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찰뻔 했는데, 그의 이름을 바꿈으로 인하여 그가 힘차게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야곱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헬의 시각으로 보면 베냐민은 어미 잃은 슬픈 아이이다. 그러나 야곱의 시각으로 보면 어미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날 오른 손의 아이였다.

우리에게 적용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연약하고, 무익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우리는 만왕의 왕의 아들과 딸들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능한 능력을 받아 살아가는 그 분의 걸작품이다.

어머니의 언더라인-박목월

“어머니의 언더라인”

-박목월-

유품(遺品)으로는 그것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嘉俳節)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니의 유품은
그것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마다 헐어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耳順)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 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