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주신 예수님

자유를 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23장 18절

누가복음 23장 18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서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아내가 빌리도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의 재판에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간밤에 예수님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끔찍한 꿈이었고 아직도 그 꿈때문에 괴롭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매질을 한 후에 놓아 주겠다고 군중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려 주라고 말했다.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힌 자였다(눅23:19).

예수님은 바라바에게 자유를 주시고 바라바대신 죽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바라바는 컴컴한 동굴 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에 있는 동안 바나바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돌아 보았을 것이다.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동굴에 갇혀 있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바나바는 사면을 받기 위하여 예수님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무지한 바나바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자유를 주신다.

소원과 표적

소원과 표적
누가복음 23장 8절

누가복음 23장 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예수님이 헤롯 왕 앞에 섰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다.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는 기적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헤롯이 기적을 보기 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헤롯의 마음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중들도 예수님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증거하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요나의 표적이외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였다(마16:4).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보이라고 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 원하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하나님임의 표적을 구하였다.

우리들도 예수님에게 하나님임을 보이라고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자녀의 탈선을 막을 수 없을 때, 또한 우리 육신이 병이 들어 의사가 우리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심을 보이라고 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소원을 내려놓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고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의 소원도 육신의 욕망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욕망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마10:38).

축복

축복
-피 천득-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날으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날으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싶은 시입니다.

천상의 기도

천상의 기도
누가복음 23장 34절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래에 있는 군중들을 위한 기도의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본 군중 속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빌라도, 가롯유다, 베드로 등이 서 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스라엘에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의 신임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황제에게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내렸다. 돈과 세상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서 가롯유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이 언도되자 예수님처럼 자기도 처형될까봐 두려워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오늘도 천상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신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저들’ 속에는 ‘우리’가 있다. 현재의 안락함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우리, 돈과 명예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리, 개독교라고 욕하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우리, 고난이 어려움이 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우리,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은 천상에서 기도하신다.

넘쳐 흐르는 은혜

넘쳐 흐르는 은혜
마태복음 26장 63절~64절

마태복음 26장 63절~64절, “63절: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여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네가 말한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세운 증거자들의 거짓 증거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지만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이 믿어야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거짓 증거에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지만, 복음의 핵심적인 사실에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누명을 쓸 때가 있다. 누명을 쓰면 우리는 누명을 벗고자 한다. 누명을 벗기 위하여 우리가 옳다고 증명한다. 어떤 때에는 교회 내에서 교인들 사이에 옳고 그름을 주장하다가 서로 다투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교인들의 잘못을 회개시키려하지 않고 은혜로 덮으려고 한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준다. 진리는 옳고 그름을 따질 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진리의 말씀이 육화(말씀이 육신이 되는 과정)되어야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육화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말씀이 우리에게 머물러 사랑이 넘쳐 흘러야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에 육화된다. 우리에게 은혜가 넘쳐 흘러 사랑으로 바뀌어야 진리가 지켜진다. 넘치는 은혜가 흘러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때 은혜가 사랑으로 바뀌여 진리에 문을 닫고 있던 그들에게 스며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진리가 그들에게 머물기 시작한다.

주님을 의지할 때

주를 의지 할 때
마가복음 14장 30절

마가복음 14장 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베드로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베드로는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고, 원망할 때가 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신 것 같이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돌아보아야 할 ‘나’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일이든 장담하지 못한다. 장담한다는 뜻은 ‘나’를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장담하는 일들이 있다면 우리는 장담하는 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된다. 장담하는 일들로 인하여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일도 장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한다.

2000년 전의 짐들

2000년 전의 짐들
이사야 53장 7절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죽기 770년 전에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당신의 억울함이나 죄가 없음을 호소하지 않고 털 깎기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계셨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다.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이 가만히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은 아무 변명도 하지않고 형벌을 받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시고, 형장으로 가시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말없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자녀의 죄를 대신하여 형장으로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형장으로 가면서 아버지가 죽어서 자녀가 잘된다면 그렇게 하리라. 아버지가 형벌을 받은 후에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우리를 학대할 때가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 주님 앞에 다시 드려야 한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것들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고 가셨던 짐들이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눈으로
-진 영정-

새로운 눈으로 밝아오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어제보다 밝은 오늘을
오늘보다 더 밝아질 내일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새로운 눈으로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미련함이 아닌 마귀의 허를 찌르는 주님의 지혜로
새롭게 바라봅니다

새로운 눈으로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고통의 절규 속에서
무능함이 아닌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의 능력으로
새롭게 바라봅니다

새로운 눈으로 영원한 집을 바라봅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이 땅에서 무너질 집이 아닌 하늘에서 빛날 영원한 거처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새로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당신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하보다 소중한 하나님 형상으로
당신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고양이 앞에 쥐

고양이 앞에 쥐
마태복음 26장 56절

마태복음 26장 56절,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가 파송한 큰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잡히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잡히시자, 아마 무리들은 제자들도 잡으려 했을런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한 제자 중에 베드로도 있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하였던 제자였다. 그러한 제자도 두려움 앞에 눈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떠나지 뭐가 그렇게 급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라고 생각하셨을런지도 모른다. 그럼 혼자 남겨진 예수님은 어떤 느낌이셨을까? 예수님은 홀로 고독함을 느끼셨을까? 아니면 혼자 남겨 두어 분노하셨을까? 홀로 남겨진 그때에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걱정하셨을 것이다.

우리도 어떠한 일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우리는 두려움 앞에 고양이 앞에 쥐꼴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는다. 두려움 앞에서 벌벌 떠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는 고양이를 잡으러 고양이 뒤에 서 있다. 너희는 고양이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 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예수님이 고양이를 잡으러 고양이 뒤에 서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룟유다의 입맞춤

가룟유다의 입맞춤
누가복음 22장 48절

누가복음 22장 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가룟 유다는 돈(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 주기로 하였다. 그 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기회가 찾아왔다. 가룟유다는 입을 맞추어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알려주는 사인으로 입맞춤으로 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룟유다는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은밀하게 알려주기 원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실을 감추기 원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는구나”하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원망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룟유다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예수님은 무너진 가슴을 안고 울고 계셨을까? 아니면 담담한 마음으로 가룟유다를 쳐다 보셨을까? 또한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을 배신할 때 예수님의 느낌은 어떠셨을까?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화가 나셨을까? 아니면 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기셨을까? 그리고 가룟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추었을 때 예수님에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알려도 되는데 가룟유다야 네가 구지 입을 맞추면서 나를 알려야 했느냐하고 원망스런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면 가룟유다 네가 입맞춤으로 나와 끝내기를 원하는구나하고 가룟유다를 품는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 우리는 가룟유다와 같은 입맞춤을 예수님에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하고 우리를 돌아 볼 때이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상과 손잡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우리가 가룟유다와 같은 입맞춤을 예수님에게 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더 열심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 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